늘 인간은 위험성을 감수하고 살아간다. 위험은 보호를 위한 필수적인 예측이다. 보호와 보존을 인지할수있는 효과범위를 증폭시킬수있는것도 위험이다. 그러나 위험을 걱정이랑 착각하며 막연히 고민하고 낙심하며 상황에 대한 짐작만 하려는것도 인간의 고질적인 결함이다. 위험은 미래의 어떠한 행동을 각성하거나 수정할수있게끔 의미를 지연하거나 확장할수있다는 조던 피터슨 교수의 말이 떠오른다. 난 그분의 견해에 전체적인 옹호는 하지는않지만 인간 본연의 자아가 어떻게 의미를 재구성하고 설계하는지에대한 논제만큼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본다. 그래서 피터슨교수가 출간한 책이 "의미의 지도"이다. 과연 지도란 무엇을 뜻하는가? 지도는 사실 시각적으로 인지할수있고 보여지는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이지않고 숨겨져있는곳을 수많은 난관을 겪으면서까지 탐험을 반복해서 굳혀진 삶의 혜안이 지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보이지않는 곳은 철저하게 없다고 믿는것이 아니라 불확실하다는걸 겸허히 인정하며, 보이지않는 미지의 영역에 충분한 희생을 감내할 용기를 가지는것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인간은 수많은 잠재적 위험에 언제든지 직면해있으며 그것이 자연이 돨수도, 예측불가능한 현실이나 능력에 대한 좌절, 혹은 인간끼리의 갈등이 되기도한다. 그러나 사람이 진짜 위험해지는것은 위험한 상황에 쳐해서가 아니라, 위험을 묵과한채 자신의 가치관이나 방향성을 수정하지않음으로써 발생하는 일관성이 진짜 위험이다. 물론 여기에 일관성은 전통주의적인 측면에 있어서 지극히 방법론의 효력이 그만큼 있었다는걸 방증한다. 연속적으로 나라는 존재와 인생의 상황들이 "성격"이라고 불리우는 유일한 일관성덕분에 존속해왔다고 스스로 고취시키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걸 자가당착이라고 명명한다. 음..자가당착이라, 지극히 보수적인 맥락에서 모든 현상을 보려는 태도이다. 정치나 사회에서도 나타나지만 개인에게도 즉물적으로 발현되는 감정이나 행동이 되기도한다. 그러나 예상만 해왔던 위험은 실재계에 도래한다면 기존의 행해졌던 "성격" 이라는 절차는 변화를 맞이하도록 촉진한다. 즉, 위험은 자아를 계량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들은 결과론적인 확실성을 내포하지는 않는다. 오직 본래의 방법이 항시적으로 타당한것이 아니라며 자신의 오만함이나 확고부동하게 지속하려는 고집이 조금더 사동적으로 활성화될수있게끔한다. 이걸 간단하게말하면, 위험이 이런데에 작용하는것이란, 성격을 외재적인 현상에 맞게 조율해야할 의지를 각성시키는것이다.
그러나 이제 위험은 인간이라는 개별적 영역을 벗어나서 사회적 표상이 되었을때는 역할이 완전히 달라진다. 여기 대목부터는 위험이 아니라 위험성 이라고 정의하겠다. 그 이유는 뒤에 영화리뷰와 함께 설명할것이다.
교통사고를 당해서 주인공이 깨어나보니 지하 벙커였고, 지상에 온갖 위험한 상황으로 인해 지하에 생활하게되었다고 설명하는 벙커주인인 털보 아저씨이다. 처음에는 끌려온 생존자 2명은 주인의 말을 믿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미심쩍은 분위기는 여전히 불협화음만 감돌았다. 결국 하나하나 벙커내에서 단서를 찾으며 여러 의구심을 품은끝에 결정적으로 벙커주인의 과거 행적들이 낱낱히 밝혀지고 자신들과 함께할수없다는걸 깨닿고 탈출을 감행하지만 결국 외부상황도 만만치않았고 거기서 해쳐나가는 내용의 줄거리다. 벙커내부에서 벙커 주인이 설파하는 위험성이 처음에는 설득력이 있었지만 주인의 이해관계에 일방적으로 몰두하느라 생존자들의 입장을 반영하지못했고 생존자들은 주인의 사소한 결점까지 엮어가며 그가 강조하는 위험성을 회의적인 시각으로 봤다. 이것을 본다면 위험성까지는 신빙성이 있더라도 과장된 사회적 위험성은 이미 효력을 잃으며 사람들이 불신하는 경향이 짙어지며 여기서 안전불감증이 차출된다. 사회젇 위험성은 객관적인 지표로 환산할수도 없으며 모두를 대변할수없는 가치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벙커주인은 오로지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생존자들이 두려워하는 "바깥상황"이라는 위험을 상세히 묘사하고 자극함으로써 공통된 목표로 교묘하게 피력시켰다. 이건 현실에서도 볼수있는 광경이다. 군중들을 선동하기위해서 외부의 적대국가 혹은 혐오하려는 민족을 시시때때로 들먹이며 바깥의 심각성을 공표하고 많은 내부의 군중들의 성원에 영합하겠다는 식으로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는 현대 사회와 다를바없다.
그러나 중요한건 과장된 위험상은 항상 불가역적인 "본질"을 모종의 개념으로 한다는점이다. 다시말해, 부풀려지고 왜곡된 위험성은 실제로는 없는것이 아니라 그것자체가 기정사실이었다는 전제조건을 함축한다. 예를들면 멕시코 인들이 미국의 치안질서를 위협하고 건물을 불지르기때문에 국경을 막아야된다고 트럼프가 2016 대선때 연설했었다. 물론 엄연한 인종 차별이며 미국통계에 의하면 불법이민자 출신 멕시코인들의 범죄율은 합법 국적을 가지는 미국내의 흑인보다는 낮은 범죄율을 기록한다는것이다. 그러나 통계가 아닌 현상론적인 접근을 한다면 실제로 멕시코이민자들은 치안질서를 위협했고, 건조물 방화와 같이 그들은 위험요소를 유발시켰었다. 하지만 사실로만 추정한다면 그런 범죄는 미국뿐만아니라 전세계.보편적으로 발생하는 범죄의 다양한 종류일뿐이다. 그러나 공화당은 주체집단을 미리 선점해두고 그들의 행동양식을 모든인간에게 공통적으로 발생할법한 방화, 공공 질서 위협 과 같은 일반적인 맥락에서의 범죄와 등치시켰다는것이다. 이러한 논리적인 트릭은 누구나 다 속을수밖에없다.예를들면 "철수라는 사람이 학창시절 친구를 때렸다"와 "학창시절 친구를 때리는 철수라는 사람" 은 사실관계만 보면 같은 문장이다. 그러나 후자는 트럼프가 실제로 선동했던 구호와도 같다. 멕시코인들이 미국에서 범죄를 저질렀다가 아니라 바로 "미국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멕시코인들" 이라고..
위험성이라는 군중들의 심리적 도구를 요긴하게 남용해서 이익을 갈구하는게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그런 현실에 대한 저항감에 북받혀서 반대급부에 해당되는 안전불감증으로 오판하는 경우가 있다. 클로버필드에서는 주인이 누차 강조했던 위험성과 내용들을 거짓이라고 치부하고 밖으로 탈출을하려고했지만 실제로 모든 대기에 가스가 번져서 피부에 상처가 나서 도와달라는 마을 사람을 보고 위험성이 사실이라는걸 직감하게되는 장면으로 묘사를 한다.
자본주의가 없이는 매우 위험해진다는건 거짓이라고 쳐도 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위험성은 여실히 존재한다. 또 다른걸로는, 공부를 하지않고 노는걸 좋아한다면 불행하고 고난과 시련을 겪는다는건 거짓이라고 해도된다. 그러나 확실한건 공부를 하지않고는 대학을 입학할수없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이러한 모든 과장된 위험성 ~ 위험성끼리의 간극은 명백한 존속관계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는것이다. 위험성이라고 불리우는 선결적인 상위개념에서만 과장된 위험성이 활개를 칠수있는 터전이 되어준다.
흔히 일상에서 부모님이 자녀에게 훈육하면서 사회의 위험성을 낱낱히 설명할때
무언가 반항심이 절로 생길때 어떠한 동적인 욕망을 충족시킬 논리적인 대응이 필요해진다. 단순히 감정적으로 고함만 지를것이 아닌 이상 누군가를 통해 이런 말을 듣거나 본다. "부모말만 옳다고 생각하고 인생을 살아서는 안된다" 라고 연설가 혹은 주변 청년 멘토들은 저렇게 표현한다. 이제 반항하는 자식입장에서는 부모님들의 말이 거짓이라고 단념하여서 너무나도 독선적으로 20대를 살면서 여러 경험을 겪는다. 결국 그렇게 해서 독립해서 어느덧 20대 중반 혹은 30대가 된 자식들은 이런말을 남긴다.
나직히 비오는 창가를 소탈하게 보면서 "부모말이 다 틀린것은 아니었다"라고..연거푸 내뱉는다.
그래서 나 스스로 혹은 내가 확언하고자하는 간결한 요지는 바로 이것이다.
"우산이 옷깃에 닿으며 왜 불편하다고 생각할까? 왜냐면 우산없이는 부단히 모든 비바람을 다 맞아야 한다. 부모님도 사람들도 세상도 모두 그러한 존재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필요있고 소중하며 사랑받을만한 존재라고 어릴적 수많은 어른들과 주위사람들이 되세기며 말했던 이유를 지금이야 깨달았다. 시대의 현인이여.. 묻지마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