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은 동일할수가 없다. 차이점들이 상보적으로 교류되면서 소통이 형성되고 동의와 거부가 현실화됨으로써 집단이 형성된다. 여기서 같은 생활방식이나 예측가능한 행동들을 기대할수있는 경우에 그것을 문화라고 일컫는다. 문화는 적절한 규준에서만큼은 건전하게 사유할수있지만, 고착되거나 엄격해지면 다양성을 억압하고 통제적으로 변질될수있는 가능성이 항상 있다. 여기서의 관계규율에 반대하고 저항하는것을 캔슬컬쳐라고 부른다. 이제 본 주제에서는 이러한 캔슬컬쳐와 전제조건에 대한 고찰을 두고 논쟁을 벌이는 조던 피터슨의 모습이지만 그의 태도는 정말이지, 저런 분야에서는 철학적 무지뿐만 아니라 통찰력에 있어서 문외한이다.
그는 캔슬컬쳐의 주요 동인을 두고선, 첫번째로는 문화로 축적된 산물은 결국 보편적 위상이나 명예로 이어지며 그것을 항상 파괴시키려한다고 했다. 그리고 성별의 개념에 한정시켜서 여성의 특질을 비유하여서 폄훼하기도 했다. 이 부분을 요약해보면 그는 사회에 공진화 된 군중의 암묵적 견해가 기존에 있는것을 말살한다는 부정적인것만 누차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며, 그는 이데올로기의 극렬한 혐오자인건 미국내에서도 자명하다. 그의 저서중에 "의미의 지도" 라는 책이 있다. 유일하게 그가 집필한 그나마 현학적인 흉내를 내는 책이기도 하다. 간략히 설명해보면, 의미는 사회적 기억에 의해서 탄생하며 기억은 3가지 단계로 나뉜다. 일화,절차, 그리고 최종적으로 의미로써 마무리된다는 것이다. 거기서 관계, 규범이 설계되며 인간이 선험적으로 행동해야할 지평이 결정된다는 것이 그가 쓴 책 내용이다. 그리고 뒷 5개 목차의 내용에는 그것에 반대하는 이데올로기가 어떤 모순점을 함의하고있는지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는것들이 열거된다. 결국에는 그는 이데올로기의 혐오자로써 현실적 가치를 동경하며 미래지향적인 발상이나 생각들 조차도 모두 "이데올로기"라고 치부해놓는다. 다시말해,새로운 견해가 도출될 가능성조차도 이데올로기의 단어 정의를 확고하게 견지해놓았다. 그렇기에 모든 새로운 생각이나 의견들은 이제 조던 피터슨이 제시해놓은 "반골적인 특징"이 이데올로기라는 맥락을 규정할수있는 조건부로 피력되어있기때문에, 새로운 생각들이 무엇인지는 신경쓰지않고서는, 반대한다는 그 자체에서 오류를 담지하는것을 전제로 한다는것이다.
즉, 이데올로기라고 해서 무조건 오류가 많은게 아니라, 이데올로기라는 사전적 정의에서 얼마든지 모든 새로운 생각들을 이데올로기의 특성에 적용시킬수있는 수단이 되었다는것이 핵심이다. 문화에 반대하는 문화는 캔슬컬쳐라고 단정지은것도 마찬가지다. 캔슬컬쳐는 사실 조던피터슨의 입에서 유명해진 단어다. 캔슬컬쳐가 아니라 의미의 위계질서에서 항상 지금의 현존하는 보편성을 절대개념으로 세속화하여,거기서 창발되는 다양한 생각들은 보편성을 거부한다고 특정지어놓는다. 그렇게 사회 부적격으로 취급하는 캔슬컬쳐는 "반대의 기치를 올림, 혹은 불쾌한 자의 반란"이라는 형용구어들을 내포하는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캔슬컬쳐를 비롯한 다양한 생각들)을 허용함으로써 "그 외적인" "예외의" 과 같은 경계선이나 구획망을 증축함으로써 또다른 폭력이 시작된다. 밑에서 더 자세히 설명해보겠다.
자, 이제 절대법칙이라고 불리는 "사회적 보수"가 경계를 형성하고부터는 "예외의 생각들"은 이데올로기라는 범주에 부합시킨다.내가 하는 또다른 생각도 언제든지 좌파,공산주의자 혹은 무정부주의자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힐것을 두려워해야한다. 조던 피터슨은 데리다와 그의 저서까지 오욕하며 심한 망발을 늘어놓는다. 데리다는 문화와 사회를 두고 주변부와 중심부로 나누었다. 주변부는 잠재적이며 미확정성을 가지고있으며 그것을 확실성에 도달하기위한 소통의 반복수행이며, 거기서 완성된 결론은 중심에서 소화되며, 중심부는 주변부의 결속을 위해 설득과 강제를 병용함으로써 완성된(막연히 혹은 당위성)문화가 자리잡는다는것이 데리다의 철학이다. 데리다의 철학에 따르면,이제 확고해진 틀은 누구에게나 강제될수있다. 왜냐면 주변부의 어수선하고, 다양한 소통들이 이루어져있지만 그것을 가능하다고 보장해주는 수단이 중심부로부터 차출되기때문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복잡한 동학을 보고, 우리가 소위 말하는 "권력"이 탄생되어진다고 하며, 권력의 뜻을 역사와는 다르게 새로 상정하자고 제안했었다. 이제 조던 피터슨의 엉터리 주장으로 다시돌아와보자면, 그는 권력을 이렇게 정의했다. "권력은 남을 강제하는 힘의 수단"으로.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가시적이고 표면적인 잣대로만 추이한것에 불과하다. 권력을 알려면 권력의 현상이 아니라, 권력의 원인을 아는것이 그것에 대한 올바른 학술적 통찰이다. 그러면 이제 권력은 "공유된 상념의 집합" 이라고 볼수있다. 물론 그렇게 기준점을 책정한다면, 나 주변에 모든 현상들은 광범위하게 권력이라고 말할수도있다. 틀린말은 아니다. 그러나 전근대적인 상황에서의 권력이라는 인식에서 익숙해져있는 우리모두의 생각부터 의구심을 가진다면 전혀 이상할게 없는 권력이다. 그리고 보잘것없는 임상치료사가 미국 대학 강단에서 여러 강의나 연설을 통해 명성을 획책했지만, 사실은 미국의 공화당 정치인들이 대거 수많은 청탁과 로비를 그와함께 지원하는 관계였다. 자신 또한 때묻은 권위의 창출인지라, 그것에 대한 비난을 감수할 자신이 없으니 캔슬컬쳐라는 용어의 정당성부터 찾으려는 저열한 심보이다. 권력은 명시적으로 갈망되어서 생기는것이 아니다. 원초적 욕구나 개인적 선호에 의해서 필요로하고 그것에 동의를 얻는 여러 과정들을 포함하여 배태적으로 구현되는것들이다. 그러나 조던피터슨은 권력을 수행하는 자아의 측면만 보면 당연히 권력을 선망하고 추종하는것이라는 단면적인 결론은 내렸으며 맞는말이지만 세상을 설명하기에는 허술한 근거이다. 위대한 관습이나 문화는 엄혹한 권력의 손길에서 생장하고 번창하는것이다. 르네상스가 찬란했지만 뒤에는 강력한 가톨릭 교회의 타락한 뒷배가 있었고, 영국의 신사적 태도나 규율은 19세기 극단적인 자본자의 착취를 자유주의를 이용하여서 정당화하기위해 생긴것이며, 미국식 표현의 자유는 과거에 백인이 흑인의 발언권을 묵살하기위히 혐오표현을 자유롭게 하기위해서 동의된 전유물이다. 이렇게 모든 문화는 불투명하게 늘 얼룩진채로 권력의 비극과 참상을 낱낱이 회자한다.
조던피터슨에게는 권력을 부정하는것은 역설적으로본다면 권력을 긍정하는것이다. 미국은 줄곧 개인주의를 자처해왔다. 그러나 지독한 집단지성이 고무시킨 청교도 관습주의는 여전히 생활곳곳에 포진되어있으며 강요되어진다. 흑인에게도 아시아 인종에게도 더 극심한 형태의 규율이 강요된다. 여기서 말하는 규율은 간접적이고 암묵적으로 행해진다. 그것을 어기면 인간적인 행동에서 벗어난걸로 간주하여 질타를 하거나, 타 인종에게 불이익이 있더라도 당연하게 여기는것이 미국사회의 전통이며 근간이다. 미국식 개인주의는 집단주의의 실존성을 거부해서 나타난 질서일뿐이다. 여타 국가들의 개인주의와는 확연히 이질적이다. 동양의 집단주의도 아니면서 서양의 개인주의를 향배하는것 같지도않으니 말이다. 여전히 강대국이 존립할수있는 이유도, 미국이 자유로운지에대해 누군가 비판을 한다면, 자유가 당장 나에게 없더라도 타자에게 기능을 한다는것을 항상 부각하면서 그 누군가를 짖누른다. 그러나 공공연하게 미국사회에서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백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선전해왔다. 코카콜라 광고,아이폰 광고, 같은 상업 매체 뿐만 아니라, 헐리우드 영화들 조차도 화려하고 행복한 표정으로 외각지에 집값이 비싸고 부유한 장소에서 광고가 촬영되며 모든 장르의 영화에서도 풍요로운 배경에서 시작되는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흑인이나 유색인종이 출연하는 영화,광고들은 범죄와 관련된 어둡고 음침하거나 다른 민족의 전통적 분위기를 낡고 퇴색된거처럼 묘사한다. 미국의 멀티 컬쳐 "multi cultures" 라고 다원적 가치를 내세우지만, 사실은 미국이 허용하는 질서 내에서의 문화적 스팩트럼에 근거할뿐이다. 한마디로 "다름을 허용해도 차별은 그것과 현저히 다르다" 라는 것이다. 다른 정서나 문화를 국가적으로는 허용했지만 우리(백인계층, 미국 사회)와는 차별하겠다는것이다. 그러나 허용했기에 차별은 미국사회에 애시당초 없는걸로 치부된다.
전문가로써 권위를 얻는 경로는 매우 복합다당하다. 조던 피터슨도 경력을 쌓는데있어서 복잡한 경로를 거쳐왔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전문적인것"과 "옳음"은 다르다. 조던피터슨과 같은 위선적 태도와 전문성을 항상 예의주시해야하며 그의 심리학적 권위를 타인에게 착복하려하지 않는지 조심스럽게 봐야한다.
옳음은 뒤엉킨 난제를 위한 편리한 과정일뿐이다. 옳음에서 생긴 법칙에 순응하는건 단지 불편함과 고통없는 상태를 개인적으로 반영할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