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다양한 차원이 존재한다. 눈에 닿을듯이 보이는 여러 감각들, 몸으로 겪는 현상들부터 도래하는 공간과 시간들이 있다. 그러나 인간이 이해할수없는 영역도 분명 존재한다. 존재한다고는 할수있어도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그걸 "없다"고 말한다. 오직 증명된 존재여야만이 실제라고 불리는것이다. 그것이 3차원이라고 이야기할수있다. 각 차원은 일정한 규칙이나 연속적인 범위를 상정한다.그리고 각 차원은 항시적으로 전체라고 간주된다. 전체였지만 차원이 경계에 있어서는 일부분이 되고 일부분을 구성하는 전체를 본다면 한 단계 높은 차원이다. 인간이 이해할수있는 차원의 최대 가역범위는 4차원까지라고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담지하는건 "의식"을 통해서 주관하기때문이다. 인간의 의식은 원론적으로 가정할수있는 불변적이고 절대적인 대전제 조건이 되기때문이다. 특정한 대상을 대상이라고 부르고 생각할수있는건 그렇게 규약된 사회적 함의나 학습성도 있지만, 그것보다 최상위에있는것은 "의식"에서 시작되고 마무리되었기때문이다. 데카르트가 말하길, 의심하는 나 자신도 의심한다. 고로 나 자신이라고 하는 흔한 구절이 있는것도 여기서 볼수있다.
그러면 의식으로 파악하고 반추할수있는지의 여부나 기준점은 어디서 발양될까?
생물학적이고 육체적인 욕망으로인해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향한 "적소성"으로 모든 사물을 통칭하고 아우르는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거기서 "필요 한도"를 준거한다면 소위 "목적"과 "동기"가 발현된다. 여러 대상을 감각기관으로 보면서 책상이라고, 날개라고,나뭇가지 라고 생각할수있는것도 인간의 해석에 주안점을 둔다. 육체적인 경험으로부터 기반해서 간접적으로 모든 사물이 형성된다. 근대 후기철학자들은 이를 두고 의지는 인간의 복잡한 감각기관과의 상호작용으로 탄생한것이라고 말한다. 그중에서 인간과 확연히 다른 대상인 나뭇가지를 그렇게 생각할수있는것도 다양한 생각을 추동할수있는 지적생명체에게 부여된 의식자체가 시각적 분리를 경험했기때문이다. 나뭇가지는 나무라는 대상에게서 분리되었다는것을 외현적으로 인정한 의식의 사례이기때문이다. 혹은 다르게 나무에 가지가 달려있다고 생각할수도있다. 그것또한 시각을 통한 대상의 구분이다. 그리고 과학이 발달하고 문명이 형성되면 이런 의식단계들은 욕구를 충족시키기위해서 인간적인 유효함을 위해서 주변 물자체들을 확립시키기시작했다.
그러나 세상을 포함해서 광할하다고 여겼던 이부분까지가 3차원이고 더 이상은 전개될수가없다. 왜냐면 그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고차원적인 학술적 논의 조차도 3차원이며, 심지어 이것이 어떤 원리로 가능캐하는지를 밝혀내도 3차원이다. 사실 4차원은 근접해있지만 이해될수없는것이기도하다. 4차원은 인간의 자의식과 동류하고있다. 3차원의 정합된 모든 규칙을 뒤엎으려면 3차원에 접근할수있는 방법들이 개체의 일환이라는것을 인식해야만한다. 안타깝데도 4차원을 파악하는건 "의식"이라는 기능이 수행할수없는 영역이다. 단지 의식 외적으로는 이해될수는있지만 이해를 실행할수는없는것들이다.
얼마전 4차원과 초공간에 대한 과학 유튜브 영상이 게재되었다. 인간이 알기도힘든 범접할수없는 다차원을 수학적이고 원론적으로 영상에서 설명해놓았다.점과 선이 그려진 종이에서 그림이 만들어지고 종이를 뒤집으면 그림위치가 변하는것부터 시작해서 갖가지 논재들이 오갔다. 그리고 유명한 초공간에 대한 도서를 영상에 나온 교수가 소개했다.
그 책에 주된 내용은 인간이 이해할수없는것은 "존재하지않는것이다"라는것이다. 그러나 교수와 대부분의 독자들은 "5,6,7°°°차원을 이해할수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들은 존재한다"고 했다. 교수가 말하길 "모르는것도 무엇을 모르는건지 모른다고 한다, 이미 안다면 찾기시작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영상에 교수마저도 과학적인 모순을 피해갈수도없었다. 왜냐하면 그 교수또한 "의식"의 눈으로 봤기때문이다. 가장 결정적이고 거스를수없는 1가지는 바로 "모르는것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모른다고 하지만 그것이 존재한다고 단정지은거자체는 통상적으로 "없다"라고 일컬을수있는것들과 분별할수없다. 그러므로 고정적 의미가 부여된 또다른 실재에 도달했다는것이다. 무슨말이냐면, 간단히말해,"없다 존재하지않는다"라고 생각할수있고 우리가 피력할수있는 이유는 이미 "존재한다 혹은 실재한다"라고 결정지은 그 순간에 조건에 벗어날수없는 상태여야만 하기때문이다. 즉 3차원에 의해서 존재의 없다와 있다를 결정지을수있으며 실재성을 판가름하는 거대한 메커니즘이 3차원에 머물러있다는것이 된다.
그럼, 다시돌아와보자면, 영상에 나온 교수를 포함한 모든 의식(생각할수있는 능력, 지적생명체)들은 4차원을 넘어서서 가능한지를 생각하기도전에 3차원에 발생되었던 실증적인 논의로는 불가능하다. 존재를 구성하고 형성하는 개념부터 시작해서 모든 식별의 과정에 있어서 수정될수밖에없다. 이것또한 인간으로는 절대불가항력적이다.
총체적으로 본다면, 인간이 이해할수없는 영역은 "없음으로써 존재한다" 가 결론이 된다. 이걸 없음으로 볼수도있고 있음으로 여길수도있지만, 단순히 "몰이해"(알수없지만 있다고 유보해두는 상태)로써 존재를 증명가능태에 놓아두는것은 믿어의심치않는 의식안에서의 "가정된 예지적 대상"을 부여할수없으며 틀린것이다. 중요한건 교수를 포함한 의식이 판별한 "인간이 이해할수없는것은 존재할거라고 봅니다"에 결부된 맥락이 설정의 오류를 역설하고있다. 이미 "이해할수없는 존재"의 기준점은 있고 없음과는 무관하며, 의식으로 "이해할수 있고 없음" 또한 존재를 나타내지는 않는것이다.
그러면 이제 재밌는 상상을 해보지면 3차원에서 인간이 시간을 초월한 4차원에 있다면 인생은 의미있을까에 대한 주제가 영상 마지막에서 나온다. 교수는 그것이 나름 의미있다고 평가했다. 개인적으로도 그건 매우 흥미롭고 이색적인 느낌을 가져다줄것이다. 하지만 의식을 지닌 인간이었기에 결국 교수는 마지막에 "인간이 영원히 산다는것"이라고 가정하고 인간을 4차원에 놓여졌다고 볼수밖에없었다. 4차원은 이론적으로 시간을 벗어난 해방된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이 영원이 사는것 또한 표면적으로는 시간을 거스르는것 같아도, 시간의 지배를 받는 조건하에 영원히 지속되는것을 상정할수밖에없다. 적어도 영원한건 시간안에서의 불멸이다. 변하지않는 고정된 값 또한 시간이 허용해준 공간의 연속성일뿐이다. 단지 4차원이 되려면 시간 그 자체 혹은 시간을 가시적으로 나타낼수있는 어떠한 무언가가 되는것뿐이다. 그렇기에 결국 유튜브 과학 영상에 나온 내용들을 포함해서 "인간이 절대로 이해할수없다"는것으로 다시하여금 회귀한다.
생각하는것 혹은 생각 되어야만 하는것들이 곧 전부라고 믿고싶은게 때때로 인간의 모습이기도하다. 그렇기때문에 왕성한 여러 활동이나 연구를 통해서 발전을 이루었다. 인간이나 지적인 생명체의 특성상 의식을 중심으로 사고를 하기에, 주변의 대상을 판별할때에 대상의 기능, 역할, 필요 와 같은 수식어는 때어놓고 순수하게 사물을 직시한는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만일 그렇게 볼수있다면 "의식"은 성립되지않는다. 차원을 포함한 우주 만물은 생명체의 의식을 넘어서있다.
아니, 얼마나 의식을 넘어서있는지조차도 우주처럼 무한대로 펼쳐진다.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할수있으며 존재와 부존재의 기준을 놓을수있다는것까지가 의식이 수행할수있는 종착점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