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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R Jun 09. 2024

연인戀人, 단상 #3

2023. 09. 17.


드라마 배경이 되는 시대 이후 세대에 예송논쟁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최명길의 이야기를 들으며 기분이 조금 묘하네. 본편에선 별 생각 없이 보면서 그저 대단한 충심이다 싶었는데 저 사람이 가진 근간의 생각이 뭘까 궁금해진다.


"전하께서 어좌에 오른 이상 그저 인간이 아니지요. 또한 전하께선 만백성의 아버지시니 사사로운 마음에 머물러 계셔선 아니되지요. 소인은 전하께서 성인의 길을 가도록 힘써 길을 밝힐 뿐입니다."


내가 유학자도 아니고 유학도 해석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명길-남연준의 대화씬으로 인해 <왕과 사대부는 다르다, 왕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지는 것이 맞다> 라는 기조의 남연준의 일관성은 더 두드러진다.


최명길의 경우는 보는 이로 하여금 여러 생각이 들게 한다. 이 사람은 인간 인조에게 측은지심은 있을지언정 그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조선을, 조선의 백성들을 사랑하는구나, 라는 생각.


"전하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은 인간일 뿐임을." 최명길이 이 대사를 뱉으니 남연준이 깜짝 놀라는 장면이 흥미롭다.


최명길에게 인조는 천명을 받은 하나의 몸뚱이에 불과한 건가.


"그럼에도 백성들이, 전하를 천명을 받은 이로 <여기도록 하여> 그 뜻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신하된 도리일세." 이 대사를 듣고 의아하고 묘하다고 생각했다. 왕과 사대부가 다르지 않다는 생각, 임금도 먹고자고싸고울고웃는 인간에 불과하다는 생각, 적에게 자식을 내어준 아비의 마음을 임금 또한 똑같이 느낄 거란 생각, 을 가진 사람인데, 그에게 충심은 "그럼에도 백성들이, 전하를 천명을 받은 이로 여기도록 하여 그 뜻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신하된 도리일세" 라고 한다. 임금을 천명을 받은 이로 <여기게> 만들어 그 뜻을 <하나로 모으는> 게 사회 전체에 어떤 이득이 있는 거지?


둘의 대화를 접하고 나니 역설적으로 인간 인조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드라마를 보기 전엔 '무능한 임금' 의 이미지였다면, 짊어진 자의 고뇌가 느껴진달까. 결국 굴욕을 감내하며 산성을 나갔고, 결국 아들을 내어주었고, 사대부가 <무능한> 왕조에 충심을 보이지 않는 거 아니냐는 의심은 남연준의 말로써 사실인 거로 드러났으니.


"지조 있는 선비는 골짜기에 몸을 맡겨 세상 밖으로 나오지 말라 한다지"


무엇에 대한 지조일까.



공부할만큼 하고 세상 이치를 알만큼 안다고 자부하는 선비놈들은 현실을 외면하는데, 그들이 무시할지도 모르는 규방 규수, 아녀자인 은애가 훨씬 더 이치에 밝다. 이 세상에 더 이롭다.


유학자이기 때문에 충의 이데올로기는 머릿속에서 빼낼 수 없는 것 같지만, 자기는 부인할지 모르나 기본적으로는 임금보다도 백성이 먼저인 사람. 그 백성을 살려야 하니 임금을 산성 밖으로 끌어낸 거고, 그렇다 해도 인간 인조에 대한 측은지심이 없는 건 아니고, 그 측은지심의 근간에는 왕도 나와 같은 인간이다라는 마음이 깔려 있고.


역적에 송도환 캐릭터가 재밌었는데.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겠으나 송도환도 순수한 이상을 가진 유학자였는데 어느 순간 공맹좀비가 돼버린다. 그 전환의 계기가 되는 사건이 계유정난이었는데, 이상적 유교 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이상이 권력을 향한 폭력에 짓밟히는 걸 보고 와장창돼버린.


그런데 송도환은 이걸 "단종의 왕권이 약해서다" 라고 결론 지어버리고 산속에 처박힘과 동시에 뒤틀린 절대 왕권을 추구하는 공맹좀비가 돼버렸었다.


역적과 연인이 재밌는 건

당대의 지배적인 관념을, 당대 보편적인 모습들을 보여주며 뒤트는데

그 문제제기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는 점이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천한 것들' 때문에 몰락한 왕족 충원군이 읊조리던 구절. 공맹이 말하던 예와 그가 말하는 예는 같은 것인지.


"이런 구분이 없는 세상은 무질서이며 무질서는 혼란을 불러오게 될 것입니다. 귀한 사람은 천한 사람을 부리고 천한 사람은 귀한 사람을 따라야 할 것이요. 이런 이치가 이루어지면 나라는 저절로 다스려질 것이고, 이런 이치가 이루어지면 집안은 저절로 다스려질 것이며. 임금은 임금다워지고, 신하는 신하다워지고, 남편은 남편다워지고, 아내는 아내다워지는 것이요."


역적에서부터 이어지는 '이치' 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 '-다움' 에 대한 문제제기.


"절박한 자의 열정, 그 아이는 온전히 제가 만든 작품입니다."


"이 나라 조선에서 제일 힘이 센 것, 민심. 정확히 말하면 양반 사내들의 민심이 조선의 오늘도 내일도 다가올 수백년도 결정할 것입니다."


나는 최명길이 기본적으로는 '우리 주상전하' 라서 인조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좀 도구적 가치로서 받들어 모시는 것 같단 생각이 든다.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보니, '백성 = 인조' 라는 마음에서 측은지심을 가지고 대하는 것 같달까. 동시에 전근대 사회의 전제군주의 위치를 지우지 못하는 것 같단 생각도 들고.



"근래 논의가 과하지 않은가. 젊은자들은 이게 문제야 순정하고 뜨거우나 인간을 모르거든. 인간 말일세. 먹고, 자고, 싸고, 울고, 웃는 인간. 인간을 모르고 나랏일을 논할 수 있을 듯 싶은가."


여기까지만 해도 연준은 임금이 아닌 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했을 것 같은데,


"전하를 가까이서 뫼시는 우리 대신들은 알고 있지. "전하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은 인간일 뿐임을." (놀라는 남연준의, 대감! 소리)


최명길이 말하는 인간이 임금임을 안 순간 화면 밖 나까지 놀라고.


"그럼에도 백성들이, 전하를 천명을 받은이로 여기도록 하여 그 뜻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신하된 도리일세. 나는 이것을 충심이라 부르네. 그러니 볼모로 간 세자 저하에 대해선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게. 적에게 자식을 내어준 아비의 심정을 자네가 아는가."


"자식을 내어준 아비의 심정" 이라면 본인과 같은 필부의 마음/관점에서 투영한 마음일 건데, 그럼 결국 [사대부 = 인조] 라고 보는 거니까, 천명을 이유로 임금을 보필하지만 그 임금은 천명을 담는 도구적 존재에 불과하고 그 천명이란 것 또한 언제든 이용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전제 같아서 흥미로웠다.


"몰랐어? 나 원래 이렇게 노는 놈이야."


이 장면이 좋은 이유는 언제나 허허실실 속을 알 수 없던 이장현이 환영에서나 현실에서나 감정의 바닥까지 헤집어서 보일 수 있는 상대는 길채 뿐인 것 같아서 흥미로워.


네가 여기 있을리 없다 이야기하면서도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건 지금의 떳떳하지 못한 삶을 본인도 아는 거겠지. 길채가 지금 내 삶을 본다면 뭐라고 할까 역시나 연준도령을 좋아하는 게 맞았다라고 생각할까 속이 뒤틀릴 테고.


길채 입으로 이야기했듯 길채는 "늘 그곳에 있는" 사람인데 어쩌면 유길채는 이장현이 돌아가고 싶은 곳, 뿌리 박고 싶은 곳이었을 것 같아. 그런데 그런 이의 눈에 비칠 자신의 현 모습을 볼 수 있을리가.


나는 늘, 경계 밖으로 내몰리는/내몰린, 터전에 발 딛지 못하고 부유하는 삶을 사는 캐릭터들에게 자꾸 눈이 가.



2023. 09. 18.


이장현에게 유길채는 조선이라는 무간지옥 속에 흐드러지게 핀 생명력 강한 분꽃.


솜털도 안 떨어진 어린 애기 걱정해주는 여유 부리던 이장현이 유길채랑 한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게 흥미로워.


낯선 경험, 생경한 감정.


길채가 돌아온 장현을 가만히 안아보는 장면이 섬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꿈에나 그리던 정인이 눈 앞에 살아 돌아왔다는 걸 손끝으로 인지하고 싶으면서도 혹시나 꿈일까 두려운 마음이 눈빛으로 느껴져서.


밀어내나 모질게 내치지 못하고 붙잡으나 거칠게 잡아채지 못하는, 두 사람이 애처로움.


이장현은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게 당연하다. 왜냐하면 생전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으니까. 그리워하고 갈망하고, 신념을 깨부수어서라도 곁에 두고 싶었지만 손끝에 스치며 잡히지 않던 여자가 남들 앞에 저를 자신의 서방이라 소개한다는 게, 누군가의 삶에 영원히 뽑히지 않을 박힌 돌이 되고 싶다는 게 익숙한 감정일 순 없지.


길채 마음은 그 밤, 그 공간, 그 눈빛으로 다 이야기된 거 아니었을까.


인생에 욕심이라곤 없이 흘러가던대로 살던 사람이 누가 앗아갈까, 혹여 따라오던 이가 놓을까 두려워서 손을 꽉 쥐고는.


꽃신을 갖다댈 수 있다는 건 잠든 이가 나를 경계하지 않고 잠들어 있어야 하고, 내가 그이를 위해 준비한 꽃신이 있어야 하며, 은연 중에 그이의 모든 것을 눈에 담은 까닭에 눈대중으로도 발 치수를 알 수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듯해서 한참을 웃었다.


재회 후 길채는 이제 장현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올곧게 인식한다, 물론 현실 속 자신의 위치도. 사랑에 어리숙했던 나를 그가 휘둘렀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 마음이 안절부절 애가 타서 어쩔 줄 몰랐던 거구나. 사랑을 알게 해놓고 야속하게 나를 내버려두었던 이가 밉고 원망스럽지만 애증의 마음을 최대치로 끌어모아 상처주고 싶지만, 그래도 끝내 모진 말은 내뱉지 못하고 한다는 말은 고작 "당신도 나처럼 울며 기다리다 시들어버려."


장난스레 이야기했지만 결국 "내 세상이 너로 가득차 있고, 네가 내 세상의 중심이다." 고백하는 장현의 마음을 전해받은 길채의 눈빛이 감격에 젖었다.


장현은 길채를 사랑하면서도 사랑하는 이에게 어떻게 해야 온전한 제 마음을 보일 수 있는지 몰랐던 게 아닌가 싶다. 꽃신으로 길채를 자신의 옆에 묶어둘 수 있으리란 생각, 아니 꽃신을 주면 자신을 보아줄 거란 생각. 이는 다소 미성숙한 상태의 사랑으로 머물러 있는 거 아닌가 싶고.


온 신경을 곤두세워 생과 사의 줄타기를 하는 와중에도 이성을 거두는 찰나의 순간을 틈타 마음 저변이 헤집히며 떠오르던 사람이었는데 잊었을리가 있나. 천일간 술잔을 기울였다면 천일을 그리움에 젖어 보냈을 테고, 언제고 그 마음 보일 날이 오리란 걸 꽃신 사기로 달랬을 텐데.


문득 깨달은 건데 장현과 길채는 아직 서로에게 사랑한다, 연모한다, 은애한다, 당신이 내 연인이고 정인이다 등의 말을 하지 않았다. 온몸으로 사랑한다 울부짖으면서도 마치 그 말을 뱉으면 서로가 연기처럼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눈을 감아야만 보이는 그리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


작품 속에서 왜 어머니가 없을까 내내 궁금했다. 어쩌면 그 평화롭던 능군리에서조차 왜란, 정묘호란 이후 결혼한 '모범적' 여성상을 보이지 못하면 어떤 조치가 취해졌던 걸까 생각도 들고. 노인들이 계속해서 왜란 이후 여성이 지켜야 할 정조를 강조하는 것도 묘했어.


물론 의도 없었을 거라 하면 뭐 할 말은 없는데 그래도 그냥 지웠을 것 같진 않달까. 연준이 의병 나가자 외칠 때 보면 중년 여성들이 없는 건 아니었는데, 정작 주요 인물인 장현, 길채, 은애, 연준 모두에게 어머니가 없으니까.


좀 진부한 은유긴 하지만, 어머니를 자신을 지켜주고 보듬어줄 울타리(국가)라고 본다면 길채와 은애는, 아버지들과 비틀린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르신들'만' 있었다는 점에서 언제든 부서질 수 있었던 반쪽짜리 울타리를 가지고 있었던 거고, 애초에 조실부모한 연준은 울타리가 없었음에도 성리학 이념으로 상상의 울타리를 짓고 살았던 거 아닌가 싶고, 장현은 일찍이 그 울타리가 피로 세워진 울타리란 걸 알아서 벗어났던 거 아닌가 싶다.


사실 이건 능군리가 유길채와 경은애에게 고왔던 어린 시절을 대변하는 마음의 고향인 건 이해하나, 작품 전체적 측면에서의 유토피아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앞으로도 달 밝은 날이면 그대가 떠오를 텐데."


장현이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달 밝은 날이면 길채를 떠올리게 됐다는 건, 이제 낮밤이 존재하는 장현의 생애 내내 길채가 떠오를 테고.


길채가 아니었더라면 장현은 천연두에 걸려 생과 사를 오갈 때 망설임 없이 피안의 길로 떠났으리란 생각이 든다. 꿈속에도 길채는 떠나지 말라, 부유하지 말라, 이 땅에 발 붙여 나와 함께 있어 달라 이야기하는데, 어쩌면 장현 자신도 원하는 바가 아닌가 싶고.


길채가 웃으면, 한여름 태양 아래 피는 분꽃 피는 소리가 들린다. 길채가 웃는 모습만 보고 싶다. 이게 태양 아래, 이 땅에 발 붙이고 살고 싶다는 말이 아니면 뭐란 말인지.


분꽃 피는 소리가 듣고 싶어서, 그 꽃이 우는 걸 보기 싫어서, 그 꽃이 필 수 있는 한여름 낮이 올 수 있게 팔자에도 없던 피범벅을 뒤집어 쓰다니.


극중 길채가 이유가 있어서 결혼을 안 하거나 파혼을 한다면 상관이 없는데, 개인적으로는 "여주가 어떻게 남주 말고 다른 사람이랑 결혼을 해? 절대 그럴 리 없어" 라는 주장은 작품 밖에서 작품 속 여성에게 그게 마치 진리인양 정신적 정절을 강요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장현은 1화에서부터 자타공인 조선 팔도 각양각색의 여자를 만나왔다고 이야기한다. 닳닳남 밈 돌던 것도 다 알고 도는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조건 속에서 길채에게만 정신적 정절을 요구하는 건 왜란타령 하면서 능군리 애기씨들 쥐어잡던 노인들이랑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제도로서의 혼인은 개인에게, 특히 여성에게 굴레와 족쇄가 될 수 있음을 역사가 보여줘왔고 작품도 보여주지 않나. 개인적으론 (구원무와의) 혼인이 마음조차 묶을 수 없다는 걸 보여주면 드라마 취지에 더 맞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끊어진 걸 묶는다는 표현이 좋다. 존재로서 인간은 상처투성이 누더기일 수밖에 없는데 그 흔적 속에 사랑하는 이를 엮고 끊어지거나 찢어지면 또 깁고.


뭐든, 우리 길채도 '산해진미' 다 맛보고 선택하게 해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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