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길채에 대한 감정을 떠나 남연준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자기가 말한대로 배운 것 따로, 사는 것 따로 할 줄 모르는 융통성 없는 인간의 한 전형이지 않을까 싶고, 그렇기에 개인적으로는 마냥 미워할 수가 없다.
다만 남연준의 '올곧음' 이 지나치다 어떤 계기를 만나면 역적의 송도환처럼 변하지 않을까, 라는 의문이 들긴 한다. 송도환도 이상을 꿈꾸던 순진한 유학자였고 계유정난을 계기로 현실 속 이상의 구현이 현실의 폭력 앞에 좌절될 수 있음을 알고 흑화됐던 거 아닌가.
여하튼 연준은 자신이 배운 바를 임금에게도 요구하는 대담함을 보이지만 한편으론 이 사람에겐 언제나 인간보다 사상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그 사상의 가르침이 약자에 대한 억압의 근거가 될 때 눈 감지 않을까" 인 거지. 개인적으로 은애가 '그때의 진실' 을 연준에게 밝힐 때 연준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가 궁금한데, 이게 현실을 사는 자신의 연인과 공맹의 가르침 중 무엇을 더 우선시하느냐를 보여줄 거란 생각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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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채가 지금 이장현이랑 이뤄지면, 유길채는 평생 도망 다녀야 한다.
소현이 온전하게 조선에 돌아올 때까지 이장현은 포로사냥꾼 노릇을 계속 할 텐데
구원무를 떠나 도망간다 ➡ 조선에서 평생 도망 다녀야 함
청에 간다 ➡ 9회에서 보여줬던 이장현의 줄타기 인생 유길채도 함께 해야 함
청에서 도망친다 ➡ 조선에서도 쫓기고 청에서도 쫓기는...
이게 해피엔딩인가? 유길채의 삶을, 현실을 극중 맥락 속에서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살아야 사랑도 할 거 아닌가. 아무리 정인이 있다 한들 평생 이 땅에 발 붙이지 못하고 먼지처럼 부유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삶이라고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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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준이가 은애가 말을 한다 해도 오히려 얼마나 힘들었냐 보듬어줄 사람이지 않을까. 융통성이 없는 거지, 사람 자체가 악한 사람이 아니고 현실과 이상이 다르다는 걸 전쟁 참여 이후로도 꾸준히 본인 스스로 느끼고 있는 것 같아서.
다만, 드라마 속에서 이걸 고민하는 장면을 보고 싶다. 은애가 두려워하던 위협이 망상이 아니라 실체가 있는, 국가 폭력과 같은 위협이었고, 그 상황에서 연준이 자신이 평생을 배우고 따르던 규범과 가르침보다 내 눈 앞의 연인의 아픔을 보듬는 걸 보고 싶어.
장철을 비롯한 "뜻 있는" 선비들이 연준을 뒤흔들 경우는 어떨까? 이 부분도 되게 궁금하고 기대된다. 이장현이 그들과 대립하는 경우도 있을까? 사실 길현과 송도환에게는 없지만 연준에겐 있는 게 올곧고 이치에 밝은 은애인데... (어쩜 이름도 은애) 사랑이 있기 때문에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겠지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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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군리에 어머니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를 더해보고 싶은데 일단 같이 덕질하던 분들과의 흐름 속에서 나온 의견들이 "전작부터 그런 경향이 좀 있었다," "아버지들의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거다" 등의 여러 공감 가는 의견들이 있었다. (물론 더 있을수도)
한편으론 유길채와 경은애라는 인물들이 새로운 어머니상의 기준을 세울 것 같단 생각도 든다. 물론 어머니가 안 될 수도 있겠지만, 어머니 없이 자란 길채와 은애가 어떤 어머니가 되는지도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싶고.
2023. 09. 21.
매체 속 여성의 삶에 족쇄를 채우려 든다면 그 족쇄가 현실 여성의 삶에 부메랑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해보면 좋지 않을까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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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채의 남장 장면 묘해. 카메라의 시선이 길채의 머리를 틀어올리고 있는 장현에게 가닿아 있는데, 그 시선이 누군가의 머리를 올리고 있는 자신이 생경하게 느껴져 보고 있을 장현이라 생각해도 묘하고,장현 몰래 장현의 모습을 꼼꼼히 들여다 보고 있는 길채라 해도 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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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채가 장현을 따라가지 않고 원무와의 집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게 보는 입장에선 <갑자기> 가 되는데 사실 의도한 연출일 수도 있겠다 싶다. 구원무가 유길채는 놓아줬지만 이장현을 살려준다는 말을 한 적은 없기 때문에, 조선에서 구원무에게 죽임 당할지도 모를 이장현의 살리기 위해 유길채가 이장현을 보냈다는 해석 정말 너무 납득이 간다.
그렇게 생각하면 길채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나 아닌 다른 이들을 걱정하고 우선시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