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낭만 Nov 03. 2023

한참 늦은 작별 인사

온양



지금은 ‘아산’이 공식 명칭이지만 토박이인 엄마와 30년을 살아온 아빠의 영향으로 나는 ‘온양’이라는 단어가 훨씬 친숙하다. 나는 어릴 적부터 온양 구석구석을 살아왔다. 태어날 때는 벽산 아파트가 있었던 실옥동, 아주 짧게 살아서 기억도 안나는 현충사, 나이가 한자리에서 두 자리로 바뀔 때까지 살았던 음봉면, 십 대 시절의 전부를 보냈던 풍기동. 그 외에도 자주 왕래하던 큰 이모네 집이 있던 아산 시청까지. 깡시골부터 읍내, 시내까지 번갈아가며 누빈 셈이다.


가장 많은 기억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은 단연 음봉면과 풍기동이다. 나는 농장을 하던 부모님을 따라 4살 때부터 14살 초입까지 산골인 음봉면에 살았다. 산신령이나 귀신이 나타나도 놀라지 않을 만큼 외진 곳이라 자동차가 없으면 들어설 수 없었고, 바로 옆에는 산이 있어서 가을마다 추락한 밤을 주웠다. 오후에는 고된 농장일을 하다 숨을 돌린 엄마와 토끼풀로 반지를 만들었고, 땀에 젖은 회색 티셔츠를 입고 담배를 피우는 아빠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는 밖에 나가서 자연 속에 뛰어노는 것만큼이나 자기만의 방에 틀어박혀서 책 읽는 일도 좋아했다. 나와 언니의 책장에는 엄마가 세트로 구비해 놓은 문학 전집이나 어른들에게 선물 받은 소설책이 빼곡하게 박혀있었다. <발 끝으로 서다>, <마당을 나온 암탉>, <너도 하늘말나리야>, <연어>, <톰 아저씨의 오두막>, <비밀의 화원> 등 그때 읽었던 책을 아직도 기억한다. 텐텐북스에서 나온 여자 아이들을 위한 예쁘고 깜찍한 그림체의 만화책도 시간 날 때마다 펼쳐보며 언니와 수다를 떨었다.


언제나 그랬듯 나는 나 자신을 가장 싫어하고 어려워하고 낯설어했다. 하지만 활동범위가 좁았던 시골에서 살았던 시절에는 지금보다 스스로를 덜 미워했다. 자신감은 부족했어도 주변에 널린 잡초나 책을 보면 부족함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게 자연스러웠다. 언니와 나는 그곳에서 서로를 비교하지 않았고 저 멀리서 큰소리로 엄마를 부르면 슬픔 같은 건 애당초 있지도 않은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꿈도 없었다. 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냥 나. 나로 있어도 모든 게 충만했으니까. 외진 시골이 우주였고 우뚝 서 있는 것만으로도 빛나게 만들어줬다.


중학교에 입학한 뒤 우리 가족은 시내로 이사를 왔다. 나는 14살 때 처음으로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다. 풍기동. 이름은 마음에 안 들었다. 처음 맞이한 아파트는 2층이었고 계단을 후다닥 내려가면 1분 거리에 만화 가게가 있었다. 거의 매일 두툼한 만화책을 한 권 혹은 왕창 빌려서 집으로 가져왔다. 다른 동에 거주하는 친구들이 놀러 오면 만화방의 높은 책장 앞에 서서 유행가를 흥얼거렸고, 서로에게 작품을 추천해주기도 하면서 만진 적 없는 연애를 꿈꾸기도 했다.


새로 사귄 시내 친구들과 초조한 우정을 나누면서, 여느 아이들과 다름없이 아이돌 그룹에 빠지고 떡볶이를 사 먹다 보니 짙은 회색이었던 교복이 감색으로 변하는, 지난하고도 꿈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언뜻 나는 답답함을 느꼈다. 열아홉이었고 이제는 이 작은 도시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대학 원서를 쓸 무렵, 온양의 대학교는 안전빵으로 딱 한 곳만 지원했고 전부 서울이나 경기도에 위치한 학교로 원서를 채웠다. 외딴 시골부터 시내까지 살았으면 참 많이도 머물렀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일까. 나는 온양이 재미없어졌다.


대학에 입학해 봤자 거주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부모님은 온양에서 지냈고 겁 많던 나는 통학을 자처했다. 떠나고 싶지만 용기는 없어서 머무는 모순. 겁쟁이처럼 구는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덕분에 나는 버스와 지하철, 늦으면 택시를 타면서 피곤함을 피부로 느꼈고, 귀에는 언제나 이어폰이 꽂혀있었다. 설레는 지역에서 익숙한 지역으로 횡단하는 일이 중단되길 바랐지만 머나먼 미래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건 큰 다짐이 필요한 일이었다.


작별은 갑작스럽고도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2학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막내이모는 얄팍한 줄을 잡으며 간신히 생에 발을 담갔다. 그리고 이모가 먼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하자, 나도 언니도 부모님도 수순처럼 온양을 떠났다. 아예 새로운 곳에서 지내보자. 우리 자매는 서울로, 부모님은 강원도로 이주했고 온양은 어쩌다가(그 ‘어쩌다가’도 일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횟수다) 들릴 지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는 단정하거나 확실하거나 멋들어진 인사 없이 온양과 헤어졌다.


아주 긴 시간 동안, 나는 특색 없는 고향을 외면하며 지냈다. “어디에서 왔어?”, “집이 어디야?”라는 간단한 물음에 답하는 게 가끔씩 부끄러웠다. 단박에 알아챌 만큼 유명하지도 않은 지역의 주변에는 부연설명으로 가득하고, 설명하는 나는 종종 말하기 꺼려져서 아예 입을 다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누구나 알만한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게 큰 장점이 되지 않는다는 것, 앞으로 만날 땅이 나를 만들어준다는 것. 이 사실을 제대로 알아채기까지 먼 길을 돌아왔다. 아마 그래서 나는 온양과 제대로 된 인사 없이 매정하게 등을 돌렸던 것일 테다. 고향을 무시하는 행동이 과거의 나와 추억을 부인하는 것과 다름없는데...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애써 외면까지는 불필요하지 않은가. 그동안 어리석은 생각을 가졌단 사실이 피부로 감지되면 애꿎은 타임머신만 찾게 되었다.


이번에는 진심 어린 작별 인사를 해야겠다. 순수하게 좋아한 적은 없으나 온양에서 만든 순간은 애정한다. 성분이 순한 화장품처럼 무매력이지만 그래서 무탈한 순간이 더 많았음에 안심한다. 네가 평평한 땅이라서 마구 달릴 수 있었다. 화려한 조명도 높은 건물이 없어서 내 핸드폰에 넓고 푸른 하늘 사진으로 가득 채울 수 있었다. 발전이 느려서 아날로그를 아끼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내가 다시 널 찾아갈 일이 생길까? 확답은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돈주고도 못 살 촌스러운 추억을 줘서 고맙다. 매력이 없는 게 매력인, 나의 온양. 정말 안녕.



매거진의 이전글 유명하지 않은 곳에서부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