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이해하는 꽤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소설을 읽는 것이다. 보다 보편적이고 경험적이며, 꽤 복잡하고 다각도인 세계관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에 나를 빗대어 삶을 바라보면 때론 위로를 받기도 하고, 사소하게 지나가던 일상의 그 무언가를 재발견하는 기회가 된다.
얼마 전 도서관에서 테라치 하루나의 <헬로 마이 보이스, 2021, 박우주 옮김> 빌려 왔는데, 보통의 한 여자가 평범하지만 어쩐지 불행한 삶 속에서 내면의 목소리를 발견하며 한 사람으로서, 어머니로서 성장해 가는 내용의 소설이다. 전통적으로 요구되는 여성의 삶 그리고 부모의 역할에 대해서도 많은 인사이트와 공감을 주는 책이기도 하다.
주인공 키와가 '애프터스쿨 가네'라는 조금은 수상한 돌봄 센터에서 일을 시작하며 마주치는 일상적인 사건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언어화 해가는 과정은 참 인상적인데, '미온으로 남아 사라지지 않는 마음의 이야기'라는 책 표지 뒤의 구절과 꼭 맞는 잔잔하고 울림이 남는 내용이다.
글의 초반부에서, 주인공 키와는 딸기시럽을 만든다. 생딸기를 좋아하면서도 굳이 잼을 만들고, 그 과정을 하나하나 찍어 SNS에 업로드한다. 백 엔 숍에서 산 매트 위에 딸기잼을 올려놓고 구도를 고심하며 사진을 찍는다. 그녀의 SNS에는 이런 류의 게시물이 예쁘게 정돈되어 있다.
이를 '삶 즐기기'라는 그럴듯한 말로 표현해 내는 주인공은, 실제로 이런 것들을 만들 때 보다 그 게시물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야 말로 '정성스러운 삶'을 사는 기분이 난다(p.16)고 설명한다. 주인공은 때론 마트에서 산 매실에 '친정 마당에서 딴 매실'이라고 적어 업로드하기도 한다. 보다 근사해 보이는 하나의 씬(Scene)을 창작해 내는 것이다.
누군가의 하이라이트와 나의 비하인드
어딘가 많이 익숙한 장면이 아닌가 싶다. 소설의 많고 많은 부분 중 SNS에 대해 굳이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아마도 그것이 가장 요즘스러운, 보통의 삶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전 나도 한창 SNS에 빠져 거의 매일같이 게시물을 업로드했는데, 그 게시물들에는 늘 '꽤 괜찮은 삶'을 모토로 하는 듯한 해시태그가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팔로워가 느는 것이 재미있었고, 찰나의 빛나는 순간들이 모인 손바닥만 한 공간이 마치 내 일부인 듯 매일 페이지를 들여다보았다. 소설 속 키와가 말한 것처럼, '소박하고 귀엽게' 인생을 즐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나는 해외 생활 중이어서 내 계정에는 온갖 여행 사진과 유럽에서의 일상, 핫플레이스 사진으로 가득했기 때문에 꽤 많은 사람들이 이를 부러워하곤 했다. 실상 그 이면의 나는 그렇게 화려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환율이 높아 식비를 아끼느라 가장 싼 마트에만 갔고, 핫플레이스는 입장료가 비싸 외부에서 사진만 찍고 들어가 보지 못한 곳이 많았으며, 대부분 밤 새 논문을 쓰느라 얼굴은 늘 퀭했다.
때로는 친구들과 한 자리에 모여 화려한 디저트 사진을 서로 올리고 '좋아요'를 눌러놓고는, 정작 후줄근하고 화딱지 나는 남자친구 이야기나 일, 학업 등의 스트레스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그럼에도 나의 솔직한 일상을 잘 알고 있는 가까운 친구들 조차 나의 하이라이트를 자신들의 비하인드와 비교했다. 때로는 그들에게도 SNS 속 내가 또 다른 사람으로 인식이 되는 느낌이었다. 어플로 잘 보정된 '나를 닮은' 사진이나, 구질구질한 부분은 빼고 예쁜 것만 크롭(crop)한 끝내주는 사진이 모여 하나의 인격체를 형성한다.
소셜 미디어 속 흔히 '인플루언서'라 불리는 사람들을 접할 때 이런 느낌을 더욱 강하게 받았다. 실제로 단 한 번도 대면한 적 없는 사람의 취향부터 일상, 가치관을 모두 알게 되는 것 같은 착각. 습관적으로 멋진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다가 문득 자신의 삶이 별거 없이 느껴지는 때가 있다. 이러한 비교는 무의식적으로도 중독이 되고, 때로는 집단적 불안 중독 증세가 일어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삶의 '진짜' 하이라이트
내가 SNS 활동을 서서히 멈추게 된 계기는 장기간의 여행이었다. 기차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 힘들게 찾아간 유명 건축가의 건물에서 연신 인스타그래머블한 사진을 찍다가 갑자기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위한 여행에서 정작 본인은 이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사진만 찍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화면에 담기는 그 일부는 결코 직접 경험하는 것을 결코 대체할 수 없다. 표현도 제대로 안 될뿐더러, 게다가 그것이 포스팅 따위를 위한 기록이라면 충분한 감상이 스며들지 못한다. 이 명확하고 단순한 진리를 생각조차 못한 채, 작고 작은 화면 속 세상에 내 경험을 가두던 것이 조금 억울했다.
그 얼마 후 내 페이스북이 해킹을 당해 거의 반 강제로 연동된 모든 계정을 삭제했는데, SNS의 중독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그때 깨달았다. 거의 금단현상처럼 습관적으로 폰을 보고, 올릴 공간이 없는데도 계속 사진을 찍었다. 그것도 매우 인스타그래머블하게. 일종의 강박이었다.
어느 정도 SNS에서 멀어지는 것이 적응되자 상대적으로 마음이 편해졌다. 기념용 이외에는 셀카를 거의 찍지 않게 되었고, 사진을 찍더라도 피사체가 달라졌다. 이러한 사실은 그 이면에 자리한 또 다른 사실을 알려준다. 경쟁이라도 하듯 멋진 사진을 올리고, 마치 그것이 진짜 나인 양 하나둘씩 페이지를 늘려 나갈수록 '진짜 나'와 'SNS 속 나'의 간극이 현저히 벌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소설 얘기로 돌아와서, 키와는 남편과는 말이 통하지 않고 점점 자라나는 아들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다. 관계된 모든 이와 동떨어진 느낌이 들고, 진짜 자신의 감정을 말로 뱉어낼 수가 없다. 가족 내에서도, 그 어느 그룹에 소속되어도 자신의 언어를 잃고 적당히 대세에 맞추어가며 살아간다. 그녀는 '가나토'집안의 조금은 이상한 둘째 아들이 운영하는 방과 후 돌봄 교실인 '애프터스쿨 가네'에서 일하게 되면서 점점 내면에 파편화되어 있던 자신의 언어들을 찾아내기 시작한다.
소설의 말미에서, 키와는 자신의 SNS 계정을 오랜만에 살펴본다. 정갈하고 예쁜 사진들이 모인 '삶 즐기기'는 더 이상 키와에게 위로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의 내면과 욕구, 불안을 그대로 수용하며 그녀는 진짜 삶을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아들과 함께 껑충껑충 뛰기 시합을 하며 달려가는 주인공의 마지막 모습에서 그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긴 여운을 느끼며 책장을 덮었다.
아마 키와는 더 이상 꾸며진 생활의 가짜 파편을 SNS에 올리는 것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진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겠지. 내면의 목소리를 언어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워나가며. 그리고 커가는 아들을 뒤에서 응원하고 남편에게 자신의 의견을 내며, '애프터스쿨 가네'에서 여전히 아이들을 돌볼 것이다. 인생의 진짜 하이라이트를 온 마음으로 겪어내며 말이다.
전환
내 개인 계정을 닫은 지 거의 10년이 되어간다. 몇 달 전에 아이의 성장기록 용도로 SNS 계정을 새로 만들었는데, 별생각 없이 공개를 해놨더니 순식간에 광고성 팔로워들이 늘어나기도 했고, 혹여 그와 그의 가족이 아이사진을 염탐이라도 할까 봐 현재는 철저하게 폐쇄적인 비공개로 돌렸다. 물론 그들은 이 계정을 모르지만 온라인의 세계란 무서운 것이니 미리 닫아두는 것이 낫다.
가족과 친한 친구 몇 명만 이 계정을 안다. 연락처를 연동하지 않아 누군가에게 '추천' 따위로 뜰 일도 없다. 스크롤을 올리면서 아이와 함께한 매일을 달력처럼 볼 수 있는 것이 마음에 든다. 이런 점에서 개인적인 하루하루를 기록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편리한 툴임은 사실이다.
얼마 전 우연히 누군가의 피드를 보게 되었는데, 인플루언서로 보이는 아이엄마가 자신의 이혼사실과 남편이었던 사람의 잘못을 상세하게 공개해 두었더라. 오지랖일진 모르지만 나는 그걸 보면서 그 아이들이 조금 걱정이 되었다.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으로서 그 분노와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야 백번 천 번 이해하지만, 이미 그 계정 속 수천 장의 사진 속에 얼굴과 이름이 공개된 그 아이들에게는 일종의 폭력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생판 모르는 남인 나조차 몇 초만에 그 아이들의 얼굴과 대체적인 신상정보를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피드의 달린 수백 개의 댓글 중 맨 위의 몇 개를 읽다 그만두었다. 대부분 아이들의 아버지에 대한 비난과 대체로 남겨진 엄마와 아이들에 대한 위로였다. 과연 그중 몇 명의 사람이 그 가족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
온라인에 올라가면 영원히 삭제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은 끔찍하다. 알려지지 않을 권리가 있음에도 반 강제적으로 자신의 인생 전부가 공개되어 버리고, 무작위의 랜선 사람들에게 위로와 공감을 받는 것이 진짜 위로가 될는지, 사실 나는 잘 모르겠다.
여전히 몇몇 친구들의 SNS에는 예전의 내 사진이 스크랩되어 있다. 그러나 그 속에 있는 고고한 취미와 감상적인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내 개인사가 하나의 콘텐츠로 소비되는 것을 중단한 이후부터 나는 확실히 소셜미디어라는 툴에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저 소설 속 키와처럼, 나도 내 방식대로 삶을 겪어나가며 '진짜 삶 즐기기'를 하고 있다고 되뇌어본다. 손바닥만 한 휴대폰 속에 꾸려나가던 삶에서 훨씬 더 복잡하고, 때론 혼란스러운 삶으로 중심을 전환함으로써 다른 이들의 하이라이트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관망하는 것이다.
아이가 흘린 밥풀이 덕지덕지 붙은 옷을 입고, 머리를 대충 올린 채 오늘도 글을 통해 내 목소리를 찾고 있다. 일련의 경험들은 내게 삶을 가르쳐 준다. 이것은 단 한 번도 예외가 없다. 그것이 비록 비하인드 중 비하인드인 상황일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