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한 평화
이상하고 아름다운 한 해의 마지막 날
하나의 해가 지난다. 많은 것이 바뀌었고, 그러나 많은 것이 그대로인 한 해가 간다.
작년 이 날에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아주 평범하고 다를 것 없는 그런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오늘처럼. 그리고 오늘, 작년 오늘과 다름없이 평범하고 소박한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냈다.
올해 나는 예상치 않게 이혼을 했고, 싱글 워킹맘이 되었다. 이 큰 일을 겪었음에도 우습게도 내 생활은 조금 더 평화롭고 조용하다. 아주 기이한 평화다.
흔히 말하는 평범함의 기준에서 약간은 벗어났을 법도 한데, 이상하리만큼 나의 일상은 여전히 흐르고, 예전과 같은 일상의 고민을 하고, 새로운 도전과 포기를 반복한다.
때론 힘에 부치지만 전반적으로 생활이 평화롭다는 것이 참 다행스럽다. 집안에는 큰 소리가 날 일이 없다. 경이로운 속도로 자라나는 아이 덕분에 매일이 새롭고, 때론 눈물이 날 정도로 웃는다. 감사할 일이다.
이전과 조금 달라진 점은 여가를 보내는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몇 달간 새 글 발행을 하지 않았는데, 꾸준히 책을 읽고 글을 쓰지만 별도로 게시하지 않을 개인적인 일기라 다듬을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
시골 생활을 마무리하고 서울로 돌아온 이후에는 일주일에 두 번씩 규칙적으로 운동을 한다. 비록 일주일에 단 두 번, 두 시간의 운동이지만 몸도 마음도 훨씬 나아지는 중이다. 얼마 전 재 등록을 할 때 아이를 데려가 운동 센터를 구경시켜 주었다. '엄마가 운동하는 곳'을 소개해주고, 엄마가 더 튼튼해지면 너를 더 높이 안아줄 수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아이는 처음 보는 공간이 신기한 지 여기저기 둘러보았고, 나는 아이가 모르던 내 생활을 보여줄 수 있어서 기뻤다.
여전히 자주 시골에 간다. 머릿속에 알 수 없는 걱정이나 가슴 저 끝부터 치밀어 오르는 답답함이 느껴지면 가족들과 시골로 간다. 주기적으로 방문해 주어야 마음에 힘이 생기는 기분이다.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오면 내비게이션 없이 동네를 찾아갈 만큼 길눈도 익숙해졌다. 고향집에 드나들 듯 스스럼없이 마을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함께 식사를 하고, 지난여름의 매일처럼 동네를 누빈다.
얼마 전 크리스마스이브에도 시골을 찾았다. 겨울 철 농촌은 세상 모든 평화가 깃든 듯 침묵 속에 고요하다. 마을 초입 김 씨 아저씨 집 앞 가로등은 고장이 났지만, 덕분에 새카만 어둠 속 내가 아는 이웃들의 창문들이 점점이 전구처럼 반짝였다. 마을 자체가 크리스마스트리 같았다.
까맣게 내려앉은, 우리가 늘 걷던 길을 잠시 혼자 걸었다. 하늘을 가득 메운 별 들, 새로운 탄생 바로 직전의 숨 막히는 까만 정적. 갑자기 매우 벅찬 기분이 들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마음의 힘이 다해가던 그때에 찾았던 이곳에서 나는 다시 태어난 것이 분명하다.
나는 여전히 회복하는 중이다. 우아한 복수에는 인내와 고독이 필요하다.
힘든 기억은 마법처럼 한 순간에 사라지진 않는다. 그러나 내가 힘겹게 진창 속을 딛고 일어서던 그 모든 순간에 함께 한 소중한 것들을 다시 생각해 본다. 나의 아이, 가족들, 친구들, 그리고 작은 동식물들 까지. 힘든 순간의 끝에 함께 머물며 나를 다독이던 그들과의 아름답던 시간들로 한 해의 막을 내린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한 해를 보내며 나는 조금은 더 성숙해졌을까. 여전히 나는 서툴고 무지하고 때론 화가나고 저주한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것에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때로 내게 해가 되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결국 그 끝에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섭리로 무언가가 준비되어 있을 것임을 믿는다. 죽음과 탄생은 서로 정반대에 축에 서있는 것이 아니다. 오랜 것이 저무는 그 지점에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허물이 벗겨지며 새로운 살이 돋아나듯 그 무엇도 의미 없는 소실은 없다.
나는 조금 더 나아졌고 더 자유롭다. 분명히 좋은 신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