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행복해지려는 관성'에 대하여
딱 그만큼의 긍정과
그만큼의 용기면 충분 한 것
해를 거듭하면서 종종 감당하기 힘든 슬픔을 맞닥뜨린다. 아무리 기를 쓰고 털어내려고 해도 도저히 가시지 않는 불안과 우울. 그럴 때 결국 위로가 되는 것은 여행도 잠도 다이어리도 아닌 사람. 나의 슬픔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이다. 그로 인해 깨닫는 것은 개인이 극복할 수 있는 슬픔의 총량에는 제한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 나의 총량이 다한 날에는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총량에서 빌려올 수밖에. 역으로 오늘 나의 총량이 여유 있는 날이라면 타인의 슬픔을 기꺼이 들어주려 한다. 슬픔의 연대. 어쩌다 감사히 오늘은 덜 슬픈 마음이, 더 슬픈 마음을 위로해 주는 메커니즘으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중략) 다행히 오늘은 나의 총량에 여유가 있다. 기꺼이 듣고 그 어느 날 기꺼이 기대겠다.
수다가, 위로가 되더라. 한동안 간과했던 수다의 힘. 나를 평가하지 않을 다정한 타인과의 대화는 얼마나 따뜻한가. '괜찮다'는 뻔하지만 진실한 위로가 주는 울림은 얼마나 뻔하지 않는가. 친구도 덩달아 경이로워하며 맞장구를 쳤다. "너랑 이렇게 수다 떨고 나니까 살 것 같아." 전화를 끊자 거짓말처럼 비도 그쳤다. 그밖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기분이 달라졌다. 그러니까 사실은, 모든 게 달라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타인에게 짐이 되지 않고자 스스로 강제했던 정서적 자립은 한편 고립이기도 했다는 것을. 나의 불행이 흘러넘치지 못하게 세워두었던 벽은 한편 나를 향해 흘러오는 마음들에게 벽이기도 했다는 것을. 내가 힘들다 말하는 대신 괜찮다 말하기를 택했기 대문에 상대 또한 괜찮아야만 했고, 내가 기대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도 내게 기댈 수 없었다. 기꺼이 먼저 짐이 됨으로써, 상대 또한 내게 기대로 좋음을 서로에게 주지 시킨다. 어쩌면 진짜 배려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너무 늦지 않게 깨달아서 참 다행이다. <행복해지려는 관성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