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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즈 Mar 20. 2023

내 삶을 다시 쓰게 된, 나의 자전적 이야기

나의 '행복해지려는 관성'에 대하여


딱 그만큼의 긍정과
그만큼의 용기면 충분 한 것


 오늘은 책서평이 아닌, 책 내용과는 무관하게 제목만 빌어 오랫동안 치열하게 해 오던 일을 조금 내려놓고 나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관성의 법칙을 따른 자전적 이야기를 하려 한다


 딜 가든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고,

'너만 한 사람'없다는 인정을 받고 싶었다. '내가 맡은 일에는 적어도 다른 사람의 손이 또 가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잘한 건 당연시되었고 못한 건 필요이상의 자책이 되었다. 즉각적인 생산성만이 우선시 되는 삶이 내 지향점은 아니었지만, 내 삶에 중요한 키워드는 의미와 효율이었다.

 어린 나이에 사회생활을 하고 책임을 맡는 자리와 또 본의 아니게 나보다 더 배우고 똑똑 사람들을 이끌어야 했다 보니 실질적 경험이 부족했던 나는 그들과 대화를 하고 신의를 주기 위해 책을 통한 습득밖에 없다 생각했다. 그래서 분야 가리지 않고 책을 읽었고, 모든 행위는 어떠한 메시지와 교훈이 반드시 있어야  내가 느끼고 배우는 것이 있어야 했다. 그렇지 못하면 괜스레 시간이 아깝고 내 하루를 낭비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이 모든 노력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람에 대한 폭넓은 포용력과 이해력이 생기기는커녕  다양한 전문가들의 소견과 더불어 여러 통로로 찾아보고 얻 결론이 정답화 되어 오히려 주관이 더 강해지고 가끔은 독단적이고 편견으로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마치 "책으로 연애를 배웠어요"라는 말처럼.. 러나 나도 이제 서른 중반이 되어가면서, 그리고 한 아이를 키우면서, 상황과 배경, 나이가 천차만별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하면서 머리만으로는 절대 보지 못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사실 예전 같았으면, '다 똑같은 좋은 이야기야 내가 나약해졌을 때 찾는 책이야' 하며 치부해 버렸을 텐데 지금은 내 마음을 따뜻하게 만져주고 나의 감성을 자극하는 좋은 자기 계발서에세이를 찾아 읽고 있다. 지식의 깊이보단 마음의 깊이를 키워나가려고 하면서 심지어 이제는 따뜻한 에세이스트를 꿈꾸고 있다. 참 인생은 모를 일이다.


 이성과 논리 객관만이 아닌 감성과 감정적 이해로 먼저 다가가는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넓은 품으로 '사람' '상황'에서도, '사물'과'현상'에도 긍정적인 측면을 우선으로, 비판적인 시각은 토론의 여지로, 비난과 부정보단 해결책과 더 나은 방향성을 위한 사색과 사유로, 그렇게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정답만 찾고 나머지는 쓸모없단 이유를 붙여 최대한 빨리 제거해 나가며 지름길 만이 우선이 아닌 삶.


  면접스피치학원을 하면서 예민하고 화가 나 있었던 나였다. 오랜 경력의 승무원생활과 경험이 언변과 실력의 직접적인 씨앗이 되어주었다. 승무원을 그만두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확신해서 시작했다. 나의 직업과 직책을 사랑했고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기에 후회도 없고 배움도 많았다. 가장 치열한 입시현장에서 또 취업의 관문에서 다른 학원들과 다른 경쟁력을 갖추려 늘 전투태세였고, 입시와 취업이라는 전쟁 속 학부모들과 아이들을 대면하면서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 채 악착같이 지지 않으려 애썼.

  

 학원 운영은 '그냥 선생님'과는 분명 입장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입장이, 관련된 숱한 일이 힘들게 느껴지며 괴리감이 자주 찾아왔었다. 나의 인생도 아직 갈 길이 먼데 누군가의 인생의 중요한 시점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일과 솔직한 심정으로 그들의 삶을 위해 진정으로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지속해서 남았다. 학부모와 학생의 만족이 나의 목표이고 가치관이었기에 합격으로 결과로 부응은 했으나 항상 뒤에는 뭔지 모를 씁쓸함이 남았다. 나는 그랬다. 늘 이런 압박감과 부담감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는지 무기력증과 우울이 주기적으로 찾아왔던 것 같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생각이 들 때면 더 뭔가에 매달리곤 했지만.

 여전히 '선생'으로써 인정을 받고 있고 보람도 느끼고 있다. 무엇보다 계속 배우고 말하는 일이 적성에도 맞기에 여전히 가끔 강의를 나가고 '그냥 선생'으로써 학생들과 취업준비생들을 만나곤 한다. 그리고 즐겁게 강의를 하고 있다.


 이제는 조금 편안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군가를 위하고 대변하는, 목적을 위한 진정성이 아닌 나를 위해 진솔 삶을 살고 싶다. 편안하게 사람들을 만나면서 욕구를 파악하려 노력하지 않고, 결과를 정하고 과정을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과정으로 생각지도 못한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내고 싶다. 그것이 비록 인생의 전환점이라 불리는 큰일이 아닐지라도. 어떠한 것도 재단하지 않고 평가하지 않고, 온전히 다름을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그릇. 경쟁이 아닌 함께 곳곳의 인생을 충만하게 향유하며 비로소 나도 기댈 수 있고, 기꺼이 내 어깨를 빌려 줄 수 있는 진정한 여유와 넓고 따뜻한 품을 가진 어른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생각을 멈추지 않고 행복해지려는 관성에 따라 도전하고 글을 쓴다.



Ps. 김지영작가님의 <행복해지려는 관성>도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보고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었던 좋았던 에세이다.

해를 거듭하면서 종종 감당하기 힘든 슬픔을 맞닥뜨린다. 아무리 기를 쓰고 털어내려고 해도 도저히 가시지 않는 불안과 우울. 그럴 때 결국 위로가 되는 것은 여행도 잠도 다이어리도 아닌 사람. 나의 슬픔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이다. 그로 인해 깨닫는 것은 개인이 극복할 수 있는 슬픔의 총량에는 제한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 나의 총량이 다한 날에는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총량에서 빌려올 수밖에. 역으로 오늘 나의 총량이 여유 있는 날이라면 타인의 슬픔을 기꺼이 들어주려 한다. 슬픔의 연대. 어쩌다 감사히 오늘은 덜 슬픈 마음이, 더 슬픈 마음을 위로해 주는 메커니즘으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중략) 다행히 오늘은 나의 총량에 여유가 있다. 기꺼이 듣고 그 어느 날 기꺼이 기대겠다.

수다가, 위로가 되더라. 한동안 간과했던 수다의 힘. 나를 평가하지 않을 다정한 타인과의 대화는 얼마나 따뜻한가. '괜찮다'는 뻔하지만 진실한 위로가 주는 울림은 얼마나 뻔하지 않는가. 친구도 덩달아 경이로워하며 맞장구를 쳤다. "너랑 이렇게 수다 떨고 나니까 살 것 같아." 전화를 끊자 거짓말처럼 비도 그쳤다. 그밖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기분이 달라졌다. 그러니까 사실은, 모든 게 달라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타인에게 짐이 되지 않고자 스스로 강제했던 정서적 자립은 한편 고립이기도 했다는 것을. 나의 불행이 흘러넘치지 못하게 세워두었던 벽은 한편 나를 향해 흘러오는 마음들에게 벽이기도 했다는 것을. 내가 힘들다 말하는 대신 괜찮다 말하기를 택했기 대문에 상대 또한 괜찮아야만 했고, 내가 기대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도 내게 기댈 수 없었다. 기꺼이 먼저 짐이 됨으로써, 상대 또한 내게 기대로 좋음을 서로에게 주지 시킨다. 어쩌면 진짜 배려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너무 늦지 않게 깨달아서 참 다행이다.   <행복해지려는 관성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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