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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사리 Nov 17. 2023

고요하고 푸른 동심원에 대하여


<고요하고 푸른 동심원에 대하여>


요즘 같은 세상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간 난감한 눈총을 받을 것 같긴 하지만, 한 번 상상해 보자.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어도 곤경에 처할 일이 절대로 없다고 가정했을 때,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

누군가 묻는다. 당신의 대답은?


1959년 BBC에서 방송된 한 인터뷰에서 똑같은 질문*을 받은 칼 융은 답한다.

“나는 신을 압니다. 믿을 필요 없습니다. 알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할 때 칼 융의 얼굴에 순간 미소가 스치는데, 그걸 보면 융은 정말로 신을 알았던 것이 분명하다. 내가 아는 한에서 그건 신의 존재를 경험한 사람만이 내비칠 수 있는 표정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와 서로의 이론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주고받았던 심리학자 칼 융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심리학자로서 알려진 것 말고도 심상치 않은 예술가이기도 했다.


<<레드 북>>은 칼 융이 스스로의 심리치료(therapy)를 위해 착수했던 일종의 개인적 작업의 결과물이다. 중년에 접어들 무렵부터 그의 무의식 세계와 어린 시절의 상상 속 세계, 그 속에서 만난 존재들에 대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 작업은 무려 16년 동안 이어진다.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융은 완성된 <<레드 북>>을 출간하지 않았다. 출판할까 하다가 학술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마음을 바꿨다는 걸 보면 융은 자신을 예술가가 아닌 학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했든, <<레드 북>>은 예술임이 분명했다. 적어도 세상에 공개된 적 없는 이 책을 출판하기로 결정했던 그의 후손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던 게 틀림없다. 20세기 최고의 사상가들 중 한 명의 내면세계가 그렇게 한 권의 책으로 묶이게 된다. 2009년의 일이다.


몇 년 전에 미대에 다니는 한 친구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쉬는 날이면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 싶을 법도 한데, 꼬박꼬박 작업실에 나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나로서는 신비로웠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꾸준히 그리러 갈 수 있느냐는 질문에 친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나는 그냥 재미있어서 가는 거야.”


이렇게 써놓고 보니 꼭 ‘신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융의 답변 같다. 신을 아는 사람은 신의 존재를 믿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재미있어서 매일같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꾸준히 그릴 수 있는지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친구는 그저 작업실에 가서 그림과 시간을 보내는 일이 좋다고 했다. 음악도 틀지 않은 조용한 공간에서 캔버스 위에 유화 물감을 덮어 올리는 일, 그 일의 반복. 고요한 몰입의 시간. 그것은 내면 깊은 곳의 자신을 마주하는 시간과 같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한 번 다시 그려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나와 마주하는 일이다. 오래 전의 나는 작은 방바닥에 붙어 땅속으로 땅속으로 깊은 개미굴을 파내려갔다. 그럴 때면 엄지손톱을 세워 노란 장판을 꾹꾹 눌러가며 자국을 새기곤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땅속 세계는 금방 거대해졌다. 거대한 세계는 내가 채운 것들로 생생하게 살아났다. 그 속에 얼마나 이상한 것들이 많은지, 다섯 살 무렵의 내가 방바닥 아래에 숨겨놓았던 놀랍고 신비롭고 광기 어린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보기로 했다.


아마도 융의 <<레드 북>>은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없이 완성되었을지도 모른다. 융은 믿어야 해서 신을 믿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매일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 그 속에서 발견한 어둠마저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일, 그러는 동안 채워진 페이지가 하나씩 모였을 것이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16년의 시간. 그렇게 만들어진 두꺼운 원고 뭉치는 ‘치유’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부른 대도 어색하지 않다.


융이 자주 사용했던 과슈 물감의 푸른빛을 흉내 내 여백을 채웠다. 고요하고 신비로운 푸른색이다. 빛을 둘러싼 형태를 점점 크게 반복하고 그 안을 명도가 다른 색으로 채워 넣는 방식은 빛이 퍼져나가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융이 자주 사용한 기법이다. 원의 가장 작은 부분에 태양의 얼굴을 그려 넣어 중심으로부터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걸 표현해 보았다.


방바닥 아래의 세계를 구축하는 동안 다 알고 있었던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날로부터 삼십 년이 흐른 뒤에 서른다섯이 된 내가 다시 찾아올 거라는 걸. 미래의 내가 그 방에 돌아왔을 때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다시 만난 우리가 안도할 거라는 것도, 그게 치유라는 것도 다 알고 있었다. 너와 내가 그렇게 이어져 있다.


뭔가를 그려야 해서 그리는 그림이 아닌, 방바닥 아래 숨겨둔 것들을 하나씩 꺼내 늘어놓는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오래된 나를 찾아가는 시간이다.




* “Do you believe in God?”

** “I know…… I don’t need to believe…… I k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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