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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사리 Dec 12. 2023

그 애가 자랄 때 나도 같이

올해의 화두 1


<메리크리스마스> 즐거운 연말 보내세요!



나에게 있어서 연말의 이미지는 이런 것들이다. 배경은 깜깜할 정도로 어두워야 하고, 불을 밝힌 전구는 밝으면 밝을수록,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청계천 어디쯤을 걸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치고, 바람은 너무나 차가워서 코 끝에 감각이 없을 정도여야 한다. 서울 시청 앞 크리스마스트리의 휘황찬란함은 말할 것도 없고, 축제의 날을 위해 누구보다 화려하게 장식한 (자본의) 신전은 주변 모든 것을 압도하듯 빛을 쏟아낸다. 이상의 《날개》가 막을 내린 그곳은 한 때 미쓰코시 백화점이라고 불렸었다. 그 앞을 지나치는 수많은 차들의 불빛, 그들이 이루는 물결, 세상의 모든 밝은 것들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듯 나를 집어삼키면 그제서야 한 해가 지나갔다는 것,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방법은 없다는 걸 찬바람에 진저리 치듯 깨달았다. 그 마음은 어딘지 작고 서글픈 것이었다.


연말이다. 깜깜한 하늘을 배경으로 화려하게 불을 밝힌 크리스마스 장식은…… 없다. 서글픈 마음도 이미 오래전의 일이 되었다. 지금 살고 있는 뉴질랜드는 연말도, 크리스마스도, 새해도 모두 여름이다. 가뜩이나 여름이라 해도 늦게 떨어지는데, 이맘때에는 일광 절약 시간제를 사용해서  시간을 앞당겨 쓰는 바람에 아홉 시가 넘어도 여전히 밖이 환하다. 그러니     크리스마스 장식을 해놓았다고 해도 워낙 사위가 밝은 탓에 이미 겨울의 크리스마스가 기본값으로 설정되어 버린 나로서는 연말 기분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는 연말 같은 기분이 나지 않는대도 더 이상 넘길 페이지가 없는 달력을 마주하게 되면 지난 한 해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으레 삶에 대한 생각으로 흘러가고 마는데, 그건 한 해가 모인 것이 삶이 되고, 매일이 모인 것이 한 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일을 사는 태도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결정할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나는 삶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절대적인 진리로서의 삶의 의미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삶의 의미는 지극히 개인적인 범위에서의 삶의 의미, 쉽게 말해서 왜 태어났니, 라는 질문에 대한 나만의 대답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왜 태어났는가. 왜 나로 태어났는가. 왜 세상 수많은 곳 중 한국이었는가. 왜 수많은 사람들 중 이 가족이었는가.


쏟아내기 시작한 질문은 이어지고 이어졌다. 내 안에 그렇게나 많은 질문이 담겨 있는 줄은 나도 알지 못했다. 몇 년이 흘렀을까. 뒤를 돌아봤을 때 더 이상 떠나온 곳이 보이지 않았다. 조약돌에 질문을 담아 하나씩 떨어뜨리며 어디로 향하는지 아무도 모르는 길을 걷는 동안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때로는 스스로 답을 찾았고, 가끔은 답을 얻기도 했다. 답을 내지 못한 질문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상관없다. 질문을 하면서 나는 자랐으니까. 더 이상 더 많은 불빛을 수집하려고 도시의 어둠 속을 걸어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다가 불어오는 찬 바람에 문득 막차 시간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지 않아도 되었다. 오래 전의 나는 과거 속에만 존재했다. 이젠 그걸 ‘나’라고 부르는 것보다 ‘그 애’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말하면 과거의 내가 이제 그 애로 느껴진다는 건 나이 먹었기 때문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것도 재미있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나이를 먹는다는 건 뭘까? 자라는 것. 자라서 어른이 되는 것. 그럼 어른이 된다는 건 또 뭘까? 무엇이 우리를 어른으로 만드는 걸까? 아마도 누군가를 어른이라고 부른다면, 그건 그 스스로 내면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또 질문. 내면 아이를 돌본다는 건 무엇일까. 아이가 어른답게 똑바로 행동하도록 통제하는 것? 아이가 도태되지 않도록 노력하라고 다그치는 것?


한 어른으로서 내면 아이를 돌보는 일은 아이처럼 구는 이 어린아이를 그저 받아주는 일이다. 평소에는 혼자 잘 놀고 지내는 내면 아이가 때마다 찾아와 투정을 부리는 이유는 그저 심심하기 때문이다. 외롭고 두렵고 불안하니까. 그런 마음들을 혼자서는 어쩔 줄 몰라 다 큰 나에게 와서 의지하는 것이다. 그냥 괜찮다고 말하면 된다. 아이니까 그럴 수도 있는 거라고 받아주면 된다. 나처럼 어른이 되면 더 이상 무섭지 않을 거라고 말해주면 된다. 내면 아이에게 안전한 어른이 되어줄 수 있다면 우리는 다 큰 것이다.


그렇다면 돌고 돌아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나는 왜 태어났을까. 조약돌 몇 개를 떨어뜨리며 길을 걷는데 어느 날 땅바닥에 이런 문장이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영적인 경험을 하는 인간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적 경험을 하는 영적 존재다.”* 그 말에 의하면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돌고 도는 거대한 에너지 속에 우리가 들어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영혼이. 거대한 전체로서 존재하던 우리는 저마다 영혼의 성장이라는 재미있는 목표를 가지고 인간 세상에 내려와 ‘삶’이라는 이름의 게임을 시작한다. 특별히 이 게임을 통해 배우고 싶은 점이나 성장하고 싶은 부분에 따라 삶을 플레이할 캐릭터를 결정한다. 이 게임이 흥미로운 이유는, 인간의 캐릭터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원래의 자신에 대해 하나씩 잊게 된다는 점. 그래서 모두가 자기가 얼마나 밝게 빛나는 영혼이었는지, 이 캐릭터의 뒤편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진짜 자신을 잊은 채 인간으로서 게임에 몰입하는 것이다.


내 상상일 뿐이지만, 이 상상에 따르면 내가 겪는 모든 일들은 전부 영혼이 성장하기 위해 플레이해야 하는 게임의 일부일 뿐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내가 과거에 어떤 일을 겪었는가가 아니라 그 일을 겪은 뒤에 성장했는가, 라는 질문이겠다. 우리가 그 일을 다 겪어낸 내면 아이를 마주했을 때 해줄 수 있는 말은 불쌍해라, 참 안 됐구나, 이제 앞으로 어쩔 거니, 가 아닌, 잘했다, 장하다, 이제 괜찮아, 그런 것들이다. 한 번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아이는 전보다 조금 더 강하고 편안한 얼굴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자세히 봐야만 알 수 있는 속도로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




* "We are not human beings having a spiritual experience; we are spiritual beings having a human experiences."

                                                                             - Pierre Teilhard de Chardin




크리스마스 카드 그림은 유튜브 채널 “Calvin at DrifterStudio” 수업을 참고해 완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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