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수기
아침 5시가 되면 밖에서 간호사가 왔다 갔다 하는 자취 소리에 눈은 뜨지 않아도 깨어난 상태이다. 반시간 후에는 어김없이 일어나야 한다. 잠자는 방에서 나오면 바로 병실이다. 505호 집중치료실, 바로 나와 아내가 간병하는 병실이다. 열한 명의 환자가 누워 있는데 자기 절로 걸을 수 있는 환자 한 명을 빼고는 모두 침대에 누워만 있는 환자들이고 그중 절반 이상은 인지도 없는 상태이다. 내가 나올 때는 아내가 환자들의 기저귀를 모두 바꿔주고 체위변경이 끝났다. 다음은 환자들을 세수시키고 피딩(환자에게 주는 경관식 식사) 주는 일이다. 그 일이 끝나고 나면 나는 남자 환자들을 면도해 주고 병실 바닥을 닦는다. 이러면 여섯 시 30분 즈음되는데 약 반시간 동안 아침 운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겨울이라 밖은 아직도 캄캄하였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병원 문 앞에서부터 약 십 분간 달려 타임스퀘어에 도착한다. 거기서 한참 팔다리를 움직이기도 하고 허리도 돌리고 줄 넘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리기와 줄넘기는 할 수 없었다. 금년에 나이가 60에 들어서더니 마치도 기다렸다는 듯이 신정이 금방 지나자 몸에 이상이 생겼다. 허리가 아프더니 오른쪽 다리까지 아프면서 힘이 없어졌다. 달리기도 할 수 없고 줄넘기도 안되었다. 겨우 천천히 걸음 걷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이전처럼 며칠 지나면 나으려니 생각하였는데 한 달 이상 치료 하였지만 시원치 않았다. 밖에서 돌아올 때는 일곱 시가 된다. 걸어 다닐 수 있는 환자가 며칠은 일어나기 싫어해서 몇 번이나 재촉해야 일어난다. 다음은 아침 식사가 올라오고 식사가 끝나면 수간호사가 간호사들을 거느리고 환자들을 한번 둘러본다. 이 병원에서 간병한 지 어느덧 이년이 넘었다. 자그마한 요양병원이지만 그래도 간호사 선생님들이 친절하고 수간호사 선생님도 사리가 명백하여 별로 스트레스도 없이 편안하게 일하는 편이었다. 여기를 오기 전에 조금 큰 요양병원에서 삼 년을 간병하였는데 엄청 힘들었다. 간병하는 일 보다 간호사들과 어울리기 너무 힘들었다. 수간호사와 간병인 사이는 그야말로 일당 하는 노동자와 고용주간의 관계였다. 한 번은 수간호사가 회진할 때 창문을 열지 말라고 했는데 왜 열였는가고 그것도 몇 번 반복해서 꾸짖느니 내가 <<한번 말하면 알아 들었습니다>>하고 대꾸하니 그 한마디에 잘리고 말았다. 오전에는 내가 병실을 보고 아내가 들어가서 두 시간 정도 낮잠 잘 수 있었다. 오늘따라 엑스레이 찍어야 하는 환자가 많았다. 한 달 전까지도 환자들을 어려움 없이 안아서 움직였는데 요즘은 환자를 움직이는데 힘들고 일할 때도 무척 조심하여야 하니 일하는 것이 느리고 시간이 오래 걸리니 기분도 그리 좋지 않았다. 점심때가 다가오기 직전에 암 말기 할머니가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하니 수선생님은 환자를 영안실로 옮기라고 하였다. 바로 우리가 자는 방이었다. 영안실로 쓰지 않는 평시에는 우리가 자는 방이다. 점심 후에는 내가 좀 자는 시간인데 환자가 방을 차지하고 있으니 휴식할 수가 없었다. 작년까지만 하여도 낮잠은 안 자도 별로 피곤한 줄을 몰랐는데 금년부터는 몸이 달라진 감을 절실히 느꼈다. 한두 시간 되는 낮 잠을 놓쳐버려도 무척 피곤한 감을 느꼈다. 오후 여섯 시가 되면 환자들의 저녁 피딩이 끝나고 우리도 저녁식사가 끝난다. 아내와 함께 다시 한번 환자들의 기저귀 갈아주고 체위변경 시키고는 한 시간 정도밖에 나가 바람 씌우고 돌아올 수 있다. 나에게는 이 한 시간이 엄청 소중하였다. 하루에 이 한 시간이 바깥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그렇게 자유스럽고 기분이 좋은 시간으로 느껴진다. 길옆에서 한 사람이 차에서 내리는 몇 사람에게 돈 십삼만 원씩 건네주는 것을 목격하였다. 인력부 사장님이 일을 마치고 돌아온 일당 고용자들에게 하루 로임을 주는 것이다. 돈을 받아 주머니에 넣고는 지친 발걸음으로 돌아 가지만 얼굴에는 그래도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병실로 돌아오니 영안실로 들어간 할머니가 상태가 나빠지는 것 같았다. 자식들과 친가들이 들락날락 분주하였다. 열두 시까지는 내가 당직이다. 저녁 후에는 조금 한가한 시간이다. 가끔 가래가 끓는 환자를 가래 뽑아 주고는 간이침대에 누워 있을 수 있었다. 이때는 고향의 친구들과 전화도 통하고 문자도 서로 주고받는다. 고향의 친구 형제들이 무척 그리워진다. 친구들과 술상에 앉아 호탈 하게 건배하고 웃고 덕담하던 일이 매우 오래전 추억으로만 남아 있었다. 열여덟 살에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농장에서 일 년 반 농사일을 하다가 순조롭게 취직하였다. 처음에는 몇 년간 차간에서 가벼운 체력노동을 하였고 몇 년 후에는 회사의 중요한 경영부문에 들어가 편안하게 사무실에서 근무하였다. 출장도 자주 다니고 세미나에도 자주 참석하면서 유람도 많이 다녔다. 여유롭고 근심 없는 직업으로 거의 20년을 보냈다. 그런데 딸과 아들이 커가면서 대학에 가려고 하니 그때의 수입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여 주저 없이 퇴직하였다. 그때 나이가 45세에 다시 취직이 그리 쉬운 나이는 아니었다. 취직을 위하여 회계자격증 공부를 하고 십여 년간 할만한 일이면 주저하지 않고 나섰다. 회계, 리모델링, 시공현장, 통역, 무역 심지어 한 번도 경험이 없는 기계정비 차간에서 온몸에 기름 먼지 투성으로 힘든 일도 하였었다. 그러다가 2001년에 한국으로 오게 되었고 그때 나이가 55세였는데 처음에는 비닐쓰레기 재가공공장에서 일하였다. 주숙은 컨테이너 방이었는데 겨울이라 밤에는 어찌 추운지 집안에 널어놓은 빨래가 꽁꽁 얼었다. 다른 일자리를 선택한 것이 바로 지금까지 오 년을 넘게 해온 간병이다. 처음에는 어쩐지 간병일이 체면이 서는 직업이라고 생각되지 않았고 친구들의 비웃음과 비난의 말도 들었다. 그러나 이 일로 하여 바꿔온 것은 아들과 딸에게는 부모로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있었다. 결혼도 시켜주고 아파트도 사주고 유학도 시켜 주었다. 창문 앞에 서서 차들이 쉴 새 없이 오가는 청과시장 사거리를 내다보면서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오전에 영안실에 들어간 할머니가 돌아간 것이다. 할머니는 어떤 인생을 살아왔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평온한 모습이었다. 나는 조심히 할머니에게 옷을 갈아입히고 이불을 얼굴까지 살며시 덮어 주고 나왔다. 조금 후에 환자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면 하루 일이 끝나는 것이다. 나는 저도 모르게 이일을 하려고 면접 볼 때 간병협회 팀장이 하던 말이 생각난다. 간병인은 환자들을 도모해 주는 일이니 매우 고상한 직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별로 내키지 않았다. 간병, 다만 내가 선택한 한 가지 생존의 방법과 수단일 뿐이다. 어쩌면 할 수 없이 선택한 직업 일수도 있다. 바로 방금 전에 길옆에서 하루의 힘든 체력노동으로 13만 원을 손에 받아 쥐고 집을 돌아가는 사람들과 마찬가지이다. 생존하려면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생존의 가장 기본적인 법칙이 아닐까? 텔레비전에서는 국회에서 테러방지법인지 하는 법안을 통과하는데 분쟁이 생겨서 야당이 필리버스터를 며칠째 이어가고 있었다. 한 여 국회원은 심지어 10시간도 넘는 발언을 하였다고 한다.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국회위원도 역시 직업의 고귀와 비천을 떠나서 먼저는 생계를 위한 직업일 것이다. 그도 자기의 최선을 다해 자기가 맡은 직업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느라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때 나는 이름은 기억 못 한 한 학자인지 직업에 대하여한 말이 생각난다. 원문 그대로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이런 의미로 생각된다. 기실은 우리 누구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무엇을 팔아가면서 생존하는 것이다. 선생님은 자기의 지식을 학생들에게 팔아서 생계를 하고 노동자는 자기의 체력을 팔아서 생존을 유지한다. 우리 모두 서로가 사고팔고 이렇게 생존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생각하면 지금 내 앞에 누워있는 열한 명의 환자가 바로 나의 사장님들이다. 저도 모르게 경건한 마음이 생기는 것 같다. 밤 부디 안녕히 지내고 내일 또 봅시다, 저는 자러 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