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1n 년 간 PB MD (Private brand merchandiser)로 일하며 200여 가지가 넘는 상품의 여정을 함께 해왔다. MD면 MD 지, PB MD는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일반 MD는 제조사/벤더에서 완성된 상품을 선정하여 시장에서 육성하는 업무가 중심이라면, PB MD는 자체 브랜드 상품을 무형에서 유형으로 개발하고, 판매, 육성하는 역할을 한다. PB MD를 구분하여 지칭하는 회사는 아직 없지만, 나는 완전히 다른 직무라고 생각한다. PB MD는제조업체에서 하는 류의 카테고리 전략, 상품 NPD 전략 수립은 물론이고,신상품/리뉴얼/기획/시즌 상품의 개발, 출시하여 프로모션을 통해 육성하며, 상품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책임진다. 법적 책임조차 완벽히 다르다. MD가 뭐든지 다 한다면, PB MD는 MD계의 난이도 끝판왕이다.
그럼에도 업계 1등 기업에서 이 직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겐 엄청난 행운이다. 초기에는 맨땅에 헤딩하듯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여러 지원부서의 탄탄한 인프라를 누릴 수 있었고, 늘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는 파트너사들이 있었다. 분야별 실력 좋은 전문가들도 각자의 영역에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그렇게 누적 200개가 넘는 상품을 고객에게 선보일 수 있었고 많은 실패와 드문 성공을 거두었다. 셀 수 없이 많은 고객들이 내가 만든 상품을 경험하고 평가했다. 고객은 '재구매'로 상품을 칭찬하고, '외면'으로 혹은 '혹독한 상품평'으로비판했다. 고객은 늘날카롭고 정확했으며,그 냉정한 성적표를 매일같이 받아보면서 나는단 한순간도 평가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없다.
"고객은 어떤 상품을 재구매하고, 어떤 상품을 외면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상당 부분이 될 것 같다.왜냐하면, 내가 이 일을 하면서 늘 하던 고민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성공의 기록은 많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셀 수 없이 많은 상품들이 세상 빛을 보기도 전에 사라진다. 누구도 실패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잘된 것만 기억한다. 그러나 상품 개발자는 실패를 할 때마다 왜 실패했는지 복기하는 과정을 통해 발전할 수 있다.
나는 수많은 상품을 내 책임과 주도 하에 개발해 보았기에 이 바닥에는 나만큼 실패를 많이 한 사람이 드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내가 온실 속직장인의 신분으로 일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실패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상품이 사라지는 것을 넘어 투자 비용, 재고 및 각종 제반 사항들을 정리하는 값비싼 경험이다. 작은 회사일수록, 개인일수록 실패를 통해 잃는 것이 많다. 그렇기에 실패를 최소화해야 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로 했다.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돌이켜 보면, 주니어 시절의 나는 고객을 너무 몰랐고 확신과 호기가 넘쳤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훨씬 고민과 겁이 많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많아진 데다가 고객은 여전히 가장 예리하고 두려운 평가자다. 그럼에도 여러 경험과 노하우가 쌓이면서 내 상품의 성공 확률은 점차 올라갔고, 고객이 원하는 것에 한 발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 분야에서 상품을 오랫동안 많이 다룬 사람들은 상품을 보면 대에충 될 놈 or 망할 놈이 보인다. 엠씨 유재석의 '탑백귀'(음악을 듣고 Top 100에 들어갈지 귀신같이 아는 귀)처럼 말이다.우리는 이것을 '직관'이라고 한다. 직관은 이론과 데이터 같은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축적되고 강화되는 영역이다. 식품은 본능의 영역이기에 특히 직관이 힘을 발휘하곤 한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데) 이거 됐다! 됐어!" 같은 거 말이다.
그래서 이 글은 '직관의 기록'이다. 치열했던 1n 년 간의 경험과 고민을 통해 머리와 마음에 새겨져 설명하기 힘든 직관의 영역을 글로 기록하는 여정이다. 다소 쉽지 않은 새로운 도전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