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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um Jul 15. 2023

A-7. 식품의 혁신이란

식품은 본능이기에

 상품 개발을 시작한 초창기 시절의 나를 떠올려 보면 상당히 용감했다. 시장의 무서움과 고객의 냉정함을 경험해보지 못한 무지에서 오는 순수와 순진함이 있었던 시절.

 그때의 내게 만능열쇠라고 믿은 키워드는 '새로움'. 기존의 시장에서는 없었던 새로움을 통해 우리 브랜드만의 색깔을 내는 것이 혁신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고객들도 기존의 똑같은 상품들로 인한 피로감을 새로운 상품을 통해 리프레시하고 열광할 것이라 믿었다.  

 세상에 없는 새로운 상품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상품을 만들었다. 그 일념에는 고객들에게 내 상품을 통해 새로운 라이프 패턴을 제안하기존의 패턴을 바꾸게 만다는 생각이 있었다. 예를 들어, 이 상품을 출시함으로써 고객들이 치즈를 떠먹도록 만들겠다, 원래는 잘라서 먹는 것이지만 통으로 구워서 먹도록 하겠다 와 같은 것들이다. 감히 고객을 길들이려 하다니, 지금 생각하면 매우 오만하고 도전적었다. 물론 결과도 좋지 않았다.


 우리는 고객을 원하는 방향으로 길들이는 게 매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조리방법같이 새로운 기술의 혁신을 통해 편리함을 주는 것(예, 에어프라이어)은 비교적 쉽다. 그러나 길들여진 입맛, 식습관을 바꾸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식습관은 본능과 매우 밀접한 영역이고, 인간의 생애주기에 걸쳐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콩국수 소금파와 설탕파가 끝내 서로의 취향을 이해할 수 없듯이 말이다.

 

 성공의 예도 분명 있다. CJ의 햇반은 상온즉석밥이라는 엄청난 혁신을 만들어 냈지만, 자리를 잡기까지 10년 이상 걸렸다. 실제로 이 상품을 개발하기 위해 헌신했던 이들은 그 덕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슬픈 이야기가 있다.

 만약 그 오랜 기간 동안 회사의 확신과 꾸준한 투자가 없었다면, 지금의 즉석밥 시대는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믿고 기다린 것은 결국 고객의 라이프스타일이 변화하는 거시적 흐름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객들이 밥을 안 하고 즉석밥을 먹게 되기까지 무려 10년 이상의 세월이 소요될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햇반의 초창기 마케팅 사례는 흥미롭다. '밥을 하지 않아도 되는 대용식'으로 마케팅을 했었으나, 이는 주부들이 밥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들게 했다고 한다.(당시의 정서상 그랬을 법하다) 그러다가 '밥이 없을 때를 대비한 비상식'으로 포지셔닝하면서 판매가 잘 되기 시작했다고.

 이처럼 햇반은 미래 고객 라이프 패턴에 대한 회사확신, 독보적인 기술력, 고객에 대한 높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마케팅, 세 가지가 잘 결합하여 만들어 낸 흔치 않은 성공케이스다. 국내 1위 식품업체니까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퍼스트무버(first mover)의 외로운 길을 걸어온 만큼 오랜 기간 동안 라이언즈 셰어(lion's share)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그러나 ROI를 따져본다면 진짜 이득을 본 것은 햇반이 힘들게 잘 닦아놓고 열어놓은 길을 보고 진입한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쨌든 우리 모두는 1등 식품 대기업이 아니기에, 대단한 혁신 사례를 만들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그럼 이 치열한 경쟁환경에서 어떤 혁신을 만들어야 생존할 것인가.

 식품에서의 혁신은 이런 것 같다. 일단은 고객을 길들일 호기로운 생각을 버리고, 고객 입맛에 익숙하고 길들여진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고객이 아는 맛, 좋아하는 맛이 무엇이고, 어떤 조합이 잘 어울리고 선호되는지, 얼마나 자주 먹는지 등 바운더리 내에서 고민하고, 그 안에서 나만의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어 비교 우위를 만드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고객이 현재 잘 소비하고 있는 경쟁상품의 Pain point가 무엇인지 관찰하고 해결 방법을 찾아 셀링 하는 것이다. 그로부터 출발한다면 조금은 더 수월한 길로 갈 수 있다.

 식품 시장은 한 발 빠르면 망하고, 반 발 빠르면 성공한다. 다가오는 미래 시장을 준비하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지만 너무 이르면 고객의 변화를 기다리다 지칠 수 있다. 혁신은 그리 거창하지 않다. 시장에서 성공하는 상품들은 늘 누구나 알법한 익숙한 것 같지만 뭔가 한 포인트가 다르다. 한창 인기 있던 크림이 빵빵한 크림빵처럼, 그 한 가지 포인트를 찾아내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하여 기존 상품보다 더 나은 가치를 제공했다면 그것은 충분한 혁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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