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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남 Apr 26. 2023

11. 롤링스톤스

삼십 년 만에 다시 음악을

택시를  시작한 지 겨우 한 달쯤 되었을 때로 야간근무를 막 시작한 초저녁이었다.

롯데백화점 앞에 손님이 내렸는데 쇼핑백 여러 개를 손에 든 멋진 중년부인이 차에 올랐다.

'기사님, 삼청동으로 가 주세요.'

나는 차가 남대문 방향인데 삼청동은 반대방향이 아닌가 생각했다.

'손님, 삼청동은 반대 방향이 아닌가요?' 하고 묻자,

'네, 곧바로 조선호텔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무교동길로 계속 직진하세요.' 하였다.

'아! 그렇게 하면 되는군요. 제가 택시 초보라 길 안내를 부탁드리겠습니다.'라고 하자,

'네, 그러시군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하였다.

나는 부인의 안내에 따라 삼청동 감사원 앞에 도착하였다.

손님이 하차 후 가회동길을 내려가는데 어린 시절 십 년 이상을 살았던 계동이 궁금해지며 한번 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화신 재벌 박흥식 씨가 살았던 좌측의 골목의 언덕길로 들어섰다.

골목의 언덕을 내려가자 우리가 살았던 집이 나타났다.

집은 우리가 살던 그 모습이었는데 보수만 약간 하고 그대로 인 것 같았다.

어린 시절에는 넓어 보였던 계동 길은 이제는 좁아서 일방통행이 되어 있었다.

나는 현대사옥방향으로 내려오다가 친한 친구가 살았던 원서동이 궁금해졌다.

다시 골목길로 좌회전하여 막다른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어두워지기 시작한 비원 담길을 따라 올라갔다.

그리고 친구집 근처의 비원 담 옆에 차를 정차하자 옛일이 떠 올랐다.


1968년경 고교 일 학년 때였다.

하교 후 집에 있던 나에게 원서동에 사는 친구인 승규에게서 전화가 왔다.

'창남아! 나 음반 샀다!'

'누구인데?'

'롤링스톤스'

'한번 틀어봐, 전화기로 일단 들어 보자'

강렬한 엘렉기타 전주가 울리고 탁한 목소리의 노래가 시작되는데 진한 감동이 왔다.

'노래 제목이 뭐니?'

'AS TEARS GO BY'

승규와 나는 초등학교 동창으로 6학년때는 과외공부를 같이 한 사이였다.

그런데 승규는 휘문중학교에, 나는 중앙중학교에 입학해 한동안 얼굴을 못 보았었다.

그러다 고교시절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며 친하게 지냈다.

우리는 팝 음악에 열광해 같이 학원에 가서 기타를 배웠다.

승규는 얼마 못 가 다른 것에 관심을 보이며 학원을 안 나왔고, 나 혼자 열심히 다녔다.

학원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 보여 연주곡집 악보를 사서 혼자 집에서 연습했다.


어느 날 밤, 나는 열한 살 위인 형에게 '기타 좀 그만치고 공부 좀 해라!'며 두들겨 맞고는 집을 뛰쳐나왔다.

원서동에 갔더니 승규는 외출 중이어서 골목길을 다시 나오는데 그만 불량배들에게 잡혔다.

그들은 나이가 나보다 두 살 정도 위로 낙원동의 유명한 쌍둥이 형제였다.

그들은 나에게 주머니의 돈을 다 꺼내라고 했다.

내가 거부하자 왼쪽에서 주먹이 날아왔다.

태권도를 연마한 나는 싸움이 빈번한 우리 학교에서도 주먹싸움에서 져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 녀석의 목을 팔로 감아 누르며 벽에 머리를 부딪히자 '윽!' 하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돌려차기로 다른 녀석의 턱을 노렸는데 이 녀석이 잽싸게 뒤로 살짝 물러서더니 공중으로 뛰어오르며 내 가슴을  두 발로 찼다.

는 뒤로 쓰러졌고 두 녀석이 나의 얼굴을 마구 때렸다.

그때 가까이에서 어린 소녀의 비명이 울렸다.

'어마! 승규 오빠 친구 아냐? 왜 때려요?' 하더니 집 앞으로 뛰어가 '아버지! 깡패들이 승규 오빠 친구를 마구 때려요!' 하며 외쳤다.

승규 여동생 정란이는 초교 6학년으로 과외공부를 마치고 집에 오던 이었던 것 같았다.

그러자 한옥 대문이 확 열리며 빨래방망이를 든 승규 아버님이 '어떤 놈들 이야!' 하며 뛰어나오셨다.

깡패들은 후다닥 도망을 쳤고 나는 아버님의 부축을 받으며 승규집에 들어가 마루턱에  걸터앉았다.

정란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솜으로 코피를 막아주고 수건에 물을 적셔 피 묻은 내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아버님은 우리 집에 나를 데려다주셨다.

그 시절에는 이 정도 싸움은 흔한 일이라 경찰에 신고도 안 했다.

그 후로 승규집에 갔다가 정란이를 마주치게 되면 불량배들에게 매 맞던 이 생각나 약간 부끄러웠다.

하지만 정란이가 '창남이 오빠! 기타 한번 쳐 주세요.' 하고 조르면, 나는 ROLLING STONES의 AS TEARS GO BY를 연주했고, 아버님도 방문을 열고 감상하시며 잘한다고 칭찬을 해 주셨다.  


고교 2 학년 때, 건설업을 하시던 우리 아버님은 사업 실패로 채무가 생기자, 방이 아홉 개나 되던 이층 집을 팔았고, 우리는 당시 변두리인 은평구 갈현동의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동네길은 아직 포장도 되지 않아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되어,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 있는 동네였다.

나는 고교 졸업 직전에 대학을 포기하고 음악 하는 친구들과 4인조 밴드를 결성해, 주한 미 8군 오디션에 합격하여 문산 지역에 주둔한 미 2사단 영내 클럽의 전속밴드가 되었다.

그 당시 물가가 짜장면이 30원 정도였고, 경리사원으로 취업한 동창생들의 월급이 15,000원 정도였는데, 나는 25,000원을 받았으니 괜찮은 수입이었다.

어머니는 내 봉급날을 기다렸고, 대학을 졸업했지만 취업을 못한 형도 나에게 용돈을 탔다.

쉬는 날이면 종로의 음악다방에서 친구들이 나를 기다렸다.

나는  베이지색 버버리코트를 걸치고 뒷굽이 높은 황금색 부츠를 신고 긴 머리를 날리며 다방에 나타나서, 친구들을 이끌고 무교동 낙지볶음집에 가서 막걸리를 사 주곤 했었다.

승규는 대입에 실패하고 방황하더니 군에 지원 입대하여 동안 얼굴을 못 보았다.


어느 날  그가 제대했다는 연락을 받고 원서동에 갔는데 막 고교를 졸업하고 직장인이 된 정란이를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성숙하게 변한 모습에 깜짝 놀랐다.

첫눈이 내렸던 12월에, 자유극단의 연극배우인 넷째 누나가 준 초대권으로 승규와 그의 여자친구  그리고 정란이와 함께 명동의 창고극장에서 연극을 보았다.

제목이 '대머리 여가수' 였던 것 같다.

우리는 명동에서 누나가 사 준 유명한 스파게티를 먹은 후, 승규는 필동에 사는 여자친구를 바래다주고 오겠다고 해서 우리는  두 팀으로 헤어졌다.

정란이와 나는 눈이 쌓인 길을 걸었고 비원 입구에 있는 찻집에 들어갔다.

정란이는 나에게 '기회가 되면 오빠 공연하시는 것 꼭  한번 보고 싶어요.' 하였고, 아버지가 미국 이민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이제 겨우 직장에 자리를 잡았는데 새로운 세계에서 어떻게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이 돼요.'라며  이민을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녀를 집에 바래다주고 가는 길에  친구 여동생을 사귀는 것이 어쩐지 떳떳하지 못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차피 외국에 이민 갈 텐데 더 이상 정을 더 주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후로 일부러 원서동 가는 것을 자제했다.

약 일 년 후, 한 달 후면 미국에 간다는 승규의 연락을 받았다.

나는 승규의 부모님에게 작별인사를 하려고 원서동을 찾았다.

승규는 잠시 외출 중이었고, 나는 안방에 들어가 부모님께 큰절을 올렸다.

아버님은 이민 준비로 힘든 이야기를 하시더니 '정란이가 남자 친구가 생겨 약혼식을 하고 떠나고 싶어 하는데 아직 날자를 못 잡았어.'라고 하셨다.

거실에 나오니 외출준비를 한 정란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 그동안 고마웠어요.'라고 얼굴을 붉히며 인사했고, 나는 미소를 띠며 '행복하게 잘 살아!'라고 했다.


살아오며 가끔은 원서동이 생각날 때도 있었지만 일부러 찾아올 일은 없었다.

그런데 예상에 없던 택시기사가 되어 추억의 장소에 오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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