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읍시다!
이제 사라진 관습이지만, 내가 초등학생일 때만 해도 모든 학생들이 일주일간 일기를 쓰고 담임선생님께 검사를 받아야 했다. 지금이야 글쓰기를 전공했으니 글을 읽고 쓰는 것은 나의 일상과도 같다지만, 나이가 두 자릿수가 채 되지도 않았을 때의 나에겐 일기 쓰기는 그저 숙제였다. 그때 내가 가장 많이 썼던 ‘일기 회피법’은 일기 대신 시를 쓰는 것이었다. 학교에 늘 일찍 가는 습관이 있었던 나는 아침에 내가 보는 것들을 시로 써서 일기를 대신했다.
형식은 ‘시’였으나, 사실 어린아이의 말장난에 가까운 글이었다. 하루는 창틀에 핀 나팔꽃을 보고 시를 썼었는데, 선생님께서 그걸 반 아이들에게 낭독해 주셨다. 부끄러웠지만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만약 그때의 내 습관이 일기를 쓰지 않고 티브이를 보는 것이었다면, 선생님께서 시를 쓰지 말고 일기를 써서 내라고 하셨더라면, 어쩌면 지금의 나는 글을 쓰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어린 시절 나에게 있어 글쓰기는 가장 쉽고 편안하게, 또 특별하게 다가온 소중한 감각이었다. 학년이 끝나면 어떤 선생님들은 일기장을 묶어 책으로 만들어주기도 했고, 그 책은 여전히 우리 집 책장에 꽂혀있다.
동물학자 최재천이 자신의 유튜브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한국은 시집과 수학책이 팔리는 이상한 나라다.” 그의 말처럼 한국은 전 세계에서 시인이 가장 많은 나라이기도하다. 모두가 책의 소멸을 이야기하지만, 글을 소비하고, 또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크나큰 세상의 위협(?)에도 기가 죽지 않는 것은 여전히 글이 우리 삶에 밀착되어 있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시를 읽어야 할까? (이 글에서는 '시'라는 장르의 우월성이 아닌 시의 특별함에 관한 개인적이고도 단순한 의견을 말하는 것임을 밝힌다.)
누군가 내게 '글'의 윤리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말할 것이다. 글의 윤리는 텍스트 너머에 있는 이를 사유하게 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유하게 하고 나아가 그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 생각과 행동의 범위를 뒤바뀌고 기존에 있던 계단을 뛰어넘어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시'는 그 윤리를 가장 잘 실천하는 장르다.
이렇게만 말하면 ‘시’라는 존재 자체가 거대하고 어려운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보자. 조금 과장하여 대한민국 국민의 80퍼센트 이상이 알고 있을 시의 한 구절이 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시인의 시에서 비롯된 이 말은 여전히 미디어를 타고, 사람들의 입을 타고 전해지고 있다. 사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 이것은 당연한 명제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 당연한 명제를 시인의 언어로 세상에 꺼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말을 통해 알게 된다.
“아,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구나. 그렇다면 나 또한 지금 흔들리는 것은 ‘꽃’을 피우기 위함이구나. 아름다운 것들은 처음부터 아름다워지지 않는구나. 모든 것들이 ‘흔들림’의 시간을 거치는구나.”
시의 짧은 한 구절을 읽는 동안 저러한 생각은 순식간에 날아와 마음에 박힌다. 그리고, 곧 우리를 위로한다. 누군가를 생각하게 하고 그들의 움직이게 하는 것. 그것이 글의 윤리이자 시이기도 하다.
주변에 시집을 추천하면, ‘어렵다’는 반응이 주를 이룰 때가 많다. 사실 나는 사람들이 무언갈 어려워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은 무언가를 ‘해석’하고 싶어 하는 욕망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시는 해석의 욕망을 지우고 읽어야 한다. 그래서 시는 여러 번 읽을수록 좋다. 이것에 대한 예시로 시를 하나 가져와 보았다. 임유영 시인의 시집『오믈렛』에 수록되어 있는 시「단단」이다.
이 시는 '깨어난 새끼 곰'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곰은 겨울잠을 잤는지 그가 자는 동안 정말 많은 것들이 변해있었다. 이빨이 빠져있었고, 엄마 곰은 없었다. 이 시에서 무엇이 보이는가?
나는 여기에서 인간 본연의 외로움을 본다. 인간이 홀로서기를 할 때 수반되는 필연적 외로움을 본다. 어머니와 헤어져, 밖으로 나가야 하는 '딸'의 모습을 본다. 세상에 태어나 무엇이든 해야만 하는 '인간'의 모습을 본다. 안락하고 편안했던 상상계에서 벗어나 상징계로 진입해야 하는 인간의 모습을 본다.
'곰'을 조명하던 시는 갑작스레 마지막 문장에서 방향을 틀어버린다.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갑작스레 좌회전하듯이, 그 밖의 잔인한 세계를 보여주듯이, '곰'을 타자화하며 시는 끝을 맺는다.
이 시를 읽고 누군가는 나와 비슷한 감상, 비슷한 감정을 공유했을 수도 있다. 혹은 나와 완전히 다른 의견을 가진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시의 재미있는 지점이다. 이처럼 시는 하나의 시로 존재하지만 여러 갈래로 읽힐 수 있는 지점이 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라는 하나의 장소 안에서 우리는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다.
사진과 관련된 용어 중에서 '푼크툼'이라는 단어가 있다. 푼크툼은 사진을 보았을 때 개인적으로 느껴지는 감상을 뜻한다. 자신의 역사와 생각, 가치관 등이 반영되어 나타나는 즉각적 반응인 것이다. 시도 이와 같다. 시에 정답이란 없다. 시인의 의도는 있겠지만, 우리가 퀴즈처럼 그걸 맞힐 필요는 없다. 시를 읽을 뿐이다.
시는 찰나의 문학이다. '시'라는 짧고 간결한 그 단어처럼, 순식간에 우리에게 다녀간다. 말과 단어를 시인의 멋대로 늘였다고 줄이고, 전혀 연관 없던 세계를 만나게 하고, 빈칸을 만들어 호흡하고, 때론 산문으로 다가와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시의 가능성은 너무나도 무한해서 때로는 그 광활한 자유로움이 두렵기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시는 아름다워서 단번에 나를 무너뜨리고,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였던 황현산은 말라르메의 시집을 번역하며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시는, 패배를 말하는 시까지도, 패배주의에 반대한다. 어떤 정황에서도 그 자리에 주저앉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시의 행복이며 윤리이다.
패배를 말하는 시까지도 패배주의에 반대하는 것. 그것이 시가 가진 가장 큰 힘이자 내가 믿는 시의 윤리다. 있는 말이든, 없는 말이든, 세상에 꺼내 사람을 사유하게 하는 것.
꽤 길었던 시의 찬양글(?) 아닌 찬양글을 마치며, 나는 불현듯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 생각을 한다. 어쩌면 '생각하는'은 수식어가 아니라 사람과 같은 말인 것 같다. 사람=생각인 것이다. 사람은 생각하고, 사람은 생각이고, 시는 우리를 생각하게 하고, 우리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를 읽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가장 재미있게 읽은 시집 세 권을 추천한다. 조용우 시인의 『세컨드 핸드』, 이자켓 시인의 『거침없이 내성적인』, 임유영 시인의 『오믈렛』이다. 세 시인 모두 젊은 시인들로, 각자의 언어로 일상의 모습을 사유하며 자신들만의 시속 세계를 구축한다. 각각의 시집 한 권을 읽는 동안 달라 보이는 일상의 풍경과 머릿속의 언어들에 집중해 보라. 이전과는 다른 풍경이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