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꿀 May 29. 2023

마드리드 #4 - 레티로 공원을 도망쳐 나온 이유

제 취향은 뉴욕의 센트럴파크 말고 마드리드의 레티로 공원입니다만

레티로 공원 (Paraque del Retiro / Buen Retiro Park)
마드리드의 허파, 마드리드의 센트럴파크로 불리는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예술활동의 터전
- 주소: Plaza de la Independencia, 7, 28001, Madrid (프라도 미술관 근처)
- 운영시간: 봄여름(4월-9월) 0600-0000 / 가을겨울(10월-3월) 0600-2200
- 입장료: 없음
- 넓이: 125헥타르  (축구장 17.5개 크기), 중앙에 인공호수가 있고 3개의 갤러리 및 전시관이 있음


더 깊은 곳으로 ‘No.2’를 밀어 넣을 때마다 주변은 희뿌옇게 변해간다. 임신한 어미들이 느끼는 아이의 태동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그것’의 태동은 온몸의 신경을 한꺼번에 곤두세워 정신을 쏙 빼고 땀이 잘 나지 않는 내 이마에도 송골송골 이슬땀을 빚어낸다. 친구에게는 아직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은 채로 - 오히려 더 밝은 표정과 명랑한 목소리와 함께 - 나는 그곳을 마주했다.


레티로 공원이다.


“뉴욕에 센트럴 파크가 있다면, 마드리드에는 레티로 공원이 있지.”


“오호 햇살 좋고 하늘 좋고. 와… 실화냐 “


혼미한 정신에 아무렇게나 말하고 바라보니 정말 눈 부신 천국이 펼쳐져 있다. 알록달록 오색 운동복을 입고 조깅 하는 사람들의 땀방울이 빛을 머금어 반짝이고 유모차에 앉아 쪽쪽이를 빨고 있는 아이들의 커다란 눈망울에는 어린 천사가 보인다. 주황마차 안의 관광객들은 과하지 않게 딱 적당할 정도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핸드폰으로 여기저기 정신없이 찍고 SNS에 실시간 보고하는 자발적 노예생활과는 극명히 다른, 찐 여행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미러링 효과인가. 괜히 내 마음에도 여유가 생긴다.


100미터즘 앞에서는 누군가 묘기를 부리고 있다. 쥐색 슈트에 운동화인지 구두인지 모를 이상한 컬러조합의 신발을 신고 있는 세뇰이 자전거 뼈다귀를 앞에 두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묶어둔다. 가까이 다가가 근처 벤치에 자리를 잡고 친구에게 손짓했다.


"여기 앉자"


"으어 노땡큐" (절레절레)


깜빡했다.

Y는 내가 아는 위생관념이 가장 투철한 사람 중 한 명이다. 다른 사람의 몸이 닿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서 대중교통도 싫다고 알려줬을 때가 약 20년 전이었다. 까탈스럽기도 참 어나더레벨이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친구는 한국인스럽지 않게(?) 온갖 꽃가루 알레르기에 비염까지 심해서 365일 언제 어디서나 고통받는 몸이었다. 그래서 온몸이 이물질에 반응하는 속도와 그 정도가 평균을 벗어날 수밖에 없고 투철한 위생관념은 사실상 생존본능에 가까워서 친구로서 매우 안쓰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도대체 알레르기 반응은 왜 못 고치냐고!!!!!


‘그나저나 이게 뭐지.....?’


‘저 걸로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



똥그래진 눈으로 목이 빠지게 기다리기를 5분. 사람들이 모이면 모일수록 쎄뇰은 이상하게 더 욕심을 내어 더 많은 관객들을 모으고자 했다. 뒤에 사람들이 더 둘러싸고 볼 수 있도록 줄 맞추고 조율하는데만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곧 시작하는 것 같이 소품을 만지다가 이내 다시 줄을 맞추는 게 서 너번 반복되자 옆에서 팔짱을 끼고 서있던 친구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자연스럽게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 쎄뇰은 도대체 무슨 묘기를 보여주려고 했던 것일까. 글을 적는 이제야 다시 궁금해진다. 인내심 테스트는 아니었을 테고…


레티로 공원 중앙 호수



"와아... 진짜 신화 속에 한 장면인데?!"


중앙호수의 옆 태가 살짝 보이는 순간 입이 탁! 벌어졌다. 도심에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공원이 있는 것 만으로도 참 좋은데 여신들이 물장구치고 노는 곳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이 호수는 또 뭐란 말인가. 심지어 알폰소 12세 기마상 앞으로 직접 노를 저으며 보트를 탈 수도 있다. 후아.... 


솔직히 친구가 YESSS 해줬다면 보트를 한 번 타보고 싶었다. 하지만 운동신경이 월등이 좋은 Y는 분명히 본인이 노 저으면서 막노동 할 거라고 절대 안탄다 한다. 아니라고 내가 다 리드 해 줄게 라고 말 하고 싶었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긴 했으므로 머쓱한 마음에 알겠다고 입꾹했다. 다음에 남편이랑 오면 꼭 한 번 타 봐야겠다. 남편도 싫어 하려나.. -_- ㅋㅋㅋ


'쳇. 나도 운동 할 거야. 운동 할거라고!!!!'


레티로 공원에서 반드시 가봐야 할 곳

1. 레티로 호수 (Estanque Grande del Retiro)
레티로 공원의 중심으로 레티로 연못(Big Pond)으로도 불린다.
보트 1대당 평일에 6유로, 주말에 8유로 비용으로 50분 대여 가능하다.

2. 장미의 정원 (La Rosaleda)
장미가 아름다운 4-5월에 방문하면 좋다.
아름다운 장미와 신화 속 조각상까지 신비로운 분위기가 연출되어 포토존으로 많이 찾는다.

3. 기억의 숲 (Bosque del Recuerdo)
2004년 3월 11일 스페인 마드리드 cercanias 열차에서 발생한 테러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희생자 192명을 추모하기 위한 192그루의 나무가 있다.

4. 수정궁 (Palacio de Cristal)
유리궁전 또는 크리스털 궁전으로 불리는 곳으로 건물 전체가 통유리로 되어 있고
궁전 바로 앞에 호수가 있어 해가 질 무렵 방문하면 더욱 아름다운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


저 먼저 걸어가는 친구를 따라 잡으며 마음 속으로 외쳤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냥 이 모든 순간들이 다 소중했다. 공기 좋고, 물 좋고, 태양 볕 좋고, 오랜친구와 함께 투닥거리는 이 순간들이 다 감사했다.


!!!!!!


내면 깊숙이.. 명확한 청자 없이 그 어떤 신에게 그렇게 몇 번을 감사하다 외치니 응답이 왔다! ........ 더 이상은 기다려 줄 수 없다는 단호한 응답이었다. 맞다. 나는 행복이고 뭐고 감사함이고 뭐고 천국이든 지옥이든 일단!!! ‘그것’을 배출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더랬다.


알폰소 12세 기마상 앞 계단에 앉아 일광욕을 즐기거나 맛있는 음식을 직접 준비해서 피크닉을 즐기거나

레티로 공원 내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수정궁이나 벨라스케스 궁전에 가보거나 하는 일 등은 하등 중요치 않다.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

‘그것’의 배출!


상황을 알게 된 친구는 열 보 걸을 때마다 괜찮냐며 여기저기 화장실이 있는 곳을 찾아주려 애 써 주었지만 이미 이렇게 된 거 나는 ‘극강의 평온함’을 추구하기로 했다. 대중 화장실 말고, 레스토랑 화장실 말고 친구네 화장실. 그곳으로 가는 것이다.


그때까지 버텨 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아닌가.


작가의 이전글 마드리드 #3 - 믿을 건 엉덩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