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는 빨간색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셨던 모양이다. 난 아버지의 오토바이를 그린다고 부엌에서 마루로 오는 벽 거의 전체에 빨간색 크레용을 잔뜩 칠해놓았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나무라지 않고 잘 그렸다고 칭찬하시면서 스케치북을 사주셨다. “벽에다 그리면 잘 그린 그림을 친구들에게 보여주기 어려우니, 앞으론 여기다 그려라.”라고 하셨다니 참 훌륭하신 분들이다. 어머니께서 여러 번 말씀하신 것도 있지만 나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그 벽화는 나의 첫 예술이었을까, 낙서였을까?
(이미지 출처 : Pixabay)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학교와 공공시설의 화장실에 낙서가 유난히 많았고 그 낙서들을 보노라면 얼굴이 붉어졌다. 조잡한 그림과 Y담이 대다수였는데, 가끔 ‘신은 죽었다 – 니체, 니체는 죽었다 – 신’과 같은 개똥철학의 낙서도 보였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한국의 공공시설, 특히 화장실에서 낙서를 볼 수 없어졌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어가면서 공공의식이 높아지고, 화장실 시설이 레벨 업 된 것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더 큰 이유는 휴대폰의 보급 때문일 것이다. 거의 모든 이들이 휴대폰을 소지하게 되면서 펜을 가지고 다니는 비율은 반비례해 급격히 줄었다. 또 화장실에서 낙서를 하거나 보지 않고 휴대폰을 보게 된 것도 큰 이유일 수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베를린에 갔을 때 눈에 띄었던 것 중 하나는 남아있는 베를린 장벽의 벽면들을 채우고 있는 그라피티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소련의 브레즈네프 서기장과 동독의 호네커 수상이 진하게 키스를 나누고 있는 <형제의 키스>는 가장 눈길을 끄는 그림이었다. 이 그라피티들은 이제 낙서가 아니라 기념물로, 심지어는 예술 작품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듯하다.
[베를린 장벽 그라피티 중 '형제의 키스'] (이미지 출처 : Pinterest_리얼트립베를린)
그라피티가 예술로 발돋움하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장 미셸 바스키아와 키스 헤링을 꼽는다. 특히 키스 헤링의 작품들은,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도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익숙하다.
[키스 헤링의 작품] (이미지 출처 : Pinterest_ALL ACES STYLE)
요즘 가장 핫한 그라피티 작가라면 뱅크시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는 익명의 작가이다. 뱅크시는 영국 브리스톨 출생으로 4~50대의 남성이라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심지어는 74년생으로 특정해서 이야기되기도 하며 영국에서는 이미 정체가 알려져 있다는 말도 있다고 한다.
[뱅크시의 2006년 작 '사랑은 공중에' - 화염병 대신 꽃다발을 던지려 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 직접 촬영)
그는 기본적으로 뛰어난 그림 실력에 날카로운 비판의식, 그리고 그 둘을 믹스해서 그라피티로 표현하는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그림은 어마어마한 가격에 거래되고 있어 뱅크시는 난민구호단체에 큰 배를 쉽게 기증할 정도로 많은 재산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뱅크시가 난민 구호 단체에 기증한 배 루이즈 미셸호] (이미지 출처 : 뉴시스)
2018년에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풍선을 든 소녀’ 중 한 장이 경매에서 낙찰되는 순간, 뱅크시의 원격 조종으로 절반이 파쇄되는 퍼포먼스가 있었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미술에 대한 풍자였다고 하는데, 역설적이게도 그 퍼포먼스로 인해 해당 작품은 천정부지로 가격이 뛰어올랐다.
[뱅크시의 2004년작 '풍선과 소녀'] (이미지 출처 : 직접 촬영)
[경매 낙찰 순간 파쇄되는 퍼포먼스 후 2021년 새로 명명한 '풍선 없는 소녀'] (이미지 출처 : 직접 촬영)
서울에서 열린 뱅크시의 작품전 감상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면서도 유쾌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화장실에서 사라진 낙서들이 예술의 옷을 입고 다시 태어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뱅크시 작품전을 보고 나온 서울의 가을 하늘은 구름이 그라피티처럼 감싸고 있어,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쓰고 싶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뱅크시 전시회가 열린 인사동 '그라운드 서울' 입구 모습] (이미지 출처 : 직접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