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 생각의 낙수 - 비엔나 1900 전시 관람기 포함)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마태복음 3:14)
I.
코로나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주식이 폭락했다가 큰 폭으로 뛰어오르자 전국적으로 투자열풍이 불었다. 나도 부화뇌동해서 주식투자의 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책들을 몇 권 읽으면서 머리가 아파 고전했던 경험이 있다. 그때 투자의 살아있는 전설로 일컬어지는 워런버핏이 배웠다는 벤저민 그레이엄의 책 <현명한 투자자>와 필립 피셔의 <위대한 기업에 투자하라>도 읽었다. 필립 피셔의 책 서문은 그의 아들이 썼는데, 이런 이야기가 실렸다.
기자가 그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경쟁업체에서는 하지 않는데, 당신 업체에서 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대답은 이랬다고 한다. “그분(필립 피셔를 말하는 듯함)이 쓴 책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그 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아마도 워런버핏은 이 이야기를 충실히 이행했기에 자신이 스승으로 여겼던 구루들보다도 위대한 투자자로 인정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처럼 스승이나 선배로부터 처음에는 배우거나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을 넘어섰던 영웅들에 대해 ‘청출어람 청어람’이라는 표현을 쓴다.
II.
1900년경 오스트리아 빈의 미술 사조를 대표했던 위대한 두 화가 클림트와 에곤 실레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클림트는 당시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화가로 인정받고 있었으면서도, 혁신적인 개혁을 부르짖는 화가들의 모임인 제체시온을 이끌고 있었다. 클림트를 처음 만난 에곤 실레는 클림트에게 자신을 제자로 받아줄 것을 부탁했다. 그때 에곤 실레의 그림을 본 클림트는 28살 어린 실레에게 그의 그림이 훨씬 훌륭하기 때문에 자신은 스승이 될 수 없다며 친구(또는 동료)로 지내자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실레는 나중에 클림트의 말이 옳았음을 증명하게 된다. 물론 초창기의 실레는 클림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점차 자신만의 화풍을 찾아가면서 클림트와 그의 그림을 같이 보았다면 확연하게 실레의 그림이 뇌리에 남을 수밖에 없는 강렬하고 훌륭한 그림을 그리게 된다.
내가 전에 게시한 <불편한 그림 보기>에서 쓴 바도 있지만, 나는 빈을 방문했을 때 5박 6일이나 머물렀고, 여러 미술관을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에곤 실레의 그림이 가장 많이 소장되어 있는 레오폴드 미술관은 일부러 가지 않았다. 에곤 실레의 그림을 보는 일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에서 열린 뭉크의 전시회를 보면서 불편한 그림을 보는 것은 불편한 우리 인생의 진실과 대면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빈을 다시 가게 된다면 꼭 레오폴드 미술관을 찾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운 좋게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레오폴드 미술관 소장의 클림트와 에곤 실레 그림들 전시회를 열었고, 나는 당연히 이 전시회를 찾았다. 기대만큼 많은 작품이 전시되진 않았지만, 두 천재의 감동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III.
국립중앙박물관은 역시 국내 최고의 전시 시설이라 할만했다. 상설전 공간과 기획전의 장소가 분리되어 있고 면적 자체가 넓어 많은 관람객을 충분히 소화할만하다. 그럼에도 이번 <비엔나 1900> 전시회에는 정말 많은 관객들이 몰렸다. 그나마 예약을 30분 단위로 끊어 받았기 때문에 관객들을 소화할 수 있었지, 그렇지 않으면 대단히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1900년 전후에 비엔나에서 활약했던 미술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었기에 당연히 관심은 클림트에게 쏠렸고, 나 같은 사람은 에곤 실레에게 관심이 많았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끝부분에 다스려지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는 정치적으로나 예술에 있어서나 보수의 끝판 왕이었다. 그러나 이미 시대는 변하고 있었고 그것은 예술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 스타트를 끊은 사람이 구스타프 클림트였다.
클림트 역시 화가로서의 첫 시작 때는 기존 유럽의 르네상스적 전통에 충실한 그림을 그렸다. 빈 미술사박물관 입구의 천정화를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이번에 전시된 디오니소스 제단 (국립극장 계단벽화를 위한 습작) 역시 마찬가지다. 화가로서 돈과 명성을 얻어갔지만, 곧 그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며 새로운 미술 세계를 열어가기 시작한다. 그의 대표작 ‘키스’로 새로운 미술을 알리며 크게 성공한 클림트는 젊고 혁신적인 후배 화가들과 함께 제체시온, 즉 분리파를 형성해 새 미술사조를 이끌게 된다.
무엇으로부터의 분리인가? 바로 완고하고 지나치게 보수적인 기존 예술의 굴레로부터의 분리이다. 그들은 건물의 모양부터 독특한 제체시온 전시관을 건립하고, 잡지를 발행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이 같이 기존의 틀을 벗고 새로운 미술을 과감히 모색하던 시기가 빈, 즉 비엔나의 1900년경이었다. 이 시대를 이끌었던 화가들의 작품들이 이번 미술전에 소개되었고, 이 작품들은 빈 레오폴드 미술관의 소장품들이다. 레오폴드 미술관에서는 관장이 직접 한국에 와서 국내 기획팀과 함께 전시 계획에 참여하는 등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일부 작품들은 여성 모델의 노출이 많고 표현 수위가 노골적이어서 어린이나 학생 관객들이 거의 없었음에도 수많은 관객이 몰려 나를 놀라게 했다. 아마 클림트의 이름에 끌려 온 관객들도 많았을 텐데, 그의 작품은 많지 않았고 에곤 실레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실망한 사람도 없진 않았을 것 같다. 나같이 에곤 실레 그림을 보길 원했던 사람에겐 딱 맞는 콘셉트였다.
클림트 하면 떠올리게 되는 금색 모티브의 <키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유디트 I> 같은 작품은 이번에 오지 않았다. 그래도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수풀 속 여인>을 비롯해 <큰 포퓰러나무 II(다가오는 폭풍)> 등의 그림을 볼 수 있다.
클림트나 에곤 실레처럼 이름이 유명하지는 않지만, 당시 새로운 미술의 세계를 여는데 일조한 화가들의 멋진 그림도 많았다. 클로만 모저의 <산맥>, 알빈 에거 리엔츠의 <노동자>, 막스 오펜하이머의 <자화상>, 리하르트 게르스틀의 <반신 누드의 자화상> 등을 들 수 있겠다.
특히 눈길을 끌었던 것은 혁신적인 작가들의 공방에서 만든 생활 용품들이었는데, 요제프 호프만의 찻잔과 꽃병 등은 매우 아름다웠다.
난 에곤 실레의 그림이 ‘불편한 그림’의 끝판 왕이라고 생각했으나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들은 한 수 더 뜨는 듯했다. <피에타 : 연극 살인자(여성들의 희망)를 위한 포스터> <’ 얼굴 인식’ 강연을 위한 포스터> 등의 작품이 전시되었는데, 참으로 보기에 불편함의 진수인 듯했다.
이번 전시의 주인공은 뭐니 뭐니 해도 에곤 실레일 것이다. 전시관 입구를 그의 <꽈리가 있는 자화상>을 활용한 대형 포스터가 장식했고, <어머니와 아이> <죽음과 인간> <가을 나무 또는 겨울나무> 등 그의 대표작이 상당히 많이 전시됐다. 아울러 드로잉 작품도 꽤 많은 수를 볼 수 있었다.
IV.
에곤 실레가 막 화가로서 발돋움을 하던 10대 후반의 소년 시절, 28살이 많은 클림트는 그야말로 오스트리아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고 있었다. 클림트를 찾아간 실레는 클림트에게 자신의 그림과 클림트의 것을 교환하자고 하며, 제자로 받아줄 것을 청한다. 그러자 클림트는 “왜 그림을 바꾸자고 하지? 자네 그림이 훨씬 좋은데?”라고 했다. 그리곤 실레의 능력이 더 뛰어나니, 제자는 어울리지 않고 친구(동료)로 지내자고 까지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 이후 클림트는 실레를 미술계 인사는 물론 모델들도 소개해주었고, 미술전에 출품할 수 있도록 해주는 등 물심양면의 지원을 했다. 특히 그의 모델이었던 발리 노이질에 실레가 관심을 보이자, 그녀를 모델로 양보했고, 노이질은 실레의 전속 모델이자 연인으로 동거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도 노이질의 모델료는 클림트가 지불했다고도 한다.
당시 클림트는 혁신 화가들의 모임인 <제체시온>을 만들어 초대 회장으로서 활동했고, 실레도 클림트의 후광으로 이곳에서 활동했다. 후일 실레가 제체시온의 회장을 맡게 되고, 클림트가 사망했을 때 실레가 그린 제체시온의 회의장 그림에서 클림트의 자리를 빈 의자로 남겨두어 그에 대한 경의와 존경을 표시했다. 그러나 실레도 클림트의 죽음 후 얼마 되지 않아 서른도 되기 전의 아까운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 당시 세계에 번졌던 스페인 독감이 원인이었다.
V.
후배 L(브로맨스 1편의 L이 아닌 다른 L입니다.)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신입사원으로 입사했을 때 연수 담당자로서 만났을 때이다. L의 동기들은 전원 장교 출신이었고 활달했는데, L은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친구였다. 영민하지만 서글서글하고 격의 없이 누구나 친밀하게 대하는 좋은 성품을 갖고 있었다. 내가 L에게 놀란 것도 있는데 그의 뛰어난 노래 실력이다. 물론 나보다 더 잘하는 것 같았다. 노래방에서 그와 내가 하모니를 맞추어 부르는 90년대 댄스 곡은 듣는 사람들마다 감탄해 마지않았다.
내가 L에게 처음 함께 일하자고 손을 내민 것은 연수 담당자 한 사람이 인사이동이 되어 충원이 필요할 때였다. 그러나 L은 본사보다는 현장에 있고 싶다며 내 제안을 거절했다.
두 번째는 Speech writer로 근무할 때 함께 일하던 J가 CEO의 수행비서로 발령이 났을 때였다. L은 그런 업무에는 솔직히 자신이 없지만 부딪혀 보겠다고 동의했다. 아마도 내 제안을 두 번이나 거절하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을 터이며, 현장 경험도 쌓여서 본사 근무의 필요성도 느낄 때이기도 했을 것이다. 내가 볼 때 L은 경영을 바라보는 안목이 뛰어나고 대학 때 영자신문 편집장을 해서 글에 대한 경험도 그만하면 충분했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모든 일의 처음은 다 힘든 법이다. 또 당시에는 부서장들이 새로 배치되어 온 직원들을 교육시킨다는 차원(?)에서 일부러 더 엄하고 냉정하게 업무를 평가하곤 했다. L도 의욕적으로 시작했으나, 곧 연달아 난관을 만나면서 곤욕을 겪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우리 부서의 부서장이 L에게 혼자서 업무를 해보라고 과제를 주었고, 나에게는 도와주지 말라는 지시를 했다. 부서장 회의에서의 CEO 훈시였는데, L은 야근을 거듭하면서 끙끙대며 원고를 작성해 월요일 회의의 바로 전 토요일 아침에 부서장에게 결재를 올렸다. 당시에는 토요일 오전까지 근무를 할 때였다.
그 부서장은 Speech 원고를 볼 때 맘에 들지 않으면 연필을 테이블 위에 또르르 또르르 굴리는 버릇이 있었다. 그날도 연달아 연필을 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부서장이 L을 찾았다. 그리곤 10여분 후, L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자리에 돌아오더니 원고를 책상 위에 놓고 바로 사무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원고를 살펴보니 오만 지적으로 원고는 유혈이 낭자하게 난도질되어 있었다.
30분 정도 후 사무실 문이 빼꼼 열리길래 쳐다봤더니, L이 문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던 내게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계단에 가더니 L은 담배 연기를 길게 뱉으며 (당시에는 실내 흡연을 하던 시절이었음), “형, 나 도저히 못하겠어. 내 딴에는 정말 졸라 열심히 쓴다고 썼거든? 너무 힘들어.”라고 장탄식을 토했다. 나는 ‘나도 처음에는 너보다 더 했다, 짬밥 쌓이면 다 해결된다’라고 위로하며, 우리 부서장은 모 상무와 달라 인격적으로 갈구는 것이 아니라 정말 교육하는 거다’라고 말해줬다. 하지만 L은 이미 영혼이 고갈되었다는 듯이 한숨만 쉴 뿐이었다.
난 할 수 없이 L에게 이대로 퇴근하라면서 나머지는 내가 다 수습하겠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곤 사무실로 돌아와 부서장에게 L이 연달아 거의 밤을 새우면서 몸이 너무 안 좋아 먼저 퇴근하라고 했다고 보고하고, 부리나케 speech 원고를 작성했다. 자판에서 불이 나듯 속사포로 작성해 부서장과, 상무 결재를 통과하고, CEO께서 퇴근하시기 전, 책상에 원고를 올려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진짜 반전은 그 이후에 일어났다. 그날의 경험이 정말 큰 보약이 되었는지 L의 글빨이 급속도로 좋아지기 시작했고, 오래 지나지 않아 역대 우리 회사 Speech writer 최고의 명문이라는 칭찬을 듣게 된 것이었다. 그 토요일의 아픔은 마지막 껍질을 벗는 탈각의 고통이었나 보다. 난 그때부터 L을 볼 때마다 청출어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내가 L에게 세 번째로 인사 제안을 한 것은 시간이 좀 흘러 내가 그룹 홍보부장에서 물러날 때였다. 후임자를 추천해 보라는 담당 임원에게 난 지체 없이 L을 추천했고, L에 대해 잘 모르던 그 임원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에 대해 이것저것을 질문했다. 나는 ‘틀림없는 적임자이며 나보다 몇 배 낫다’고 장담했다. L은 내 후임으로 인사이동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 내부에서는 물론 언론사들에게서도 최고의 홍보맨으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난 역시 ‘청출어람이 맞아’라는 흐뭇한 기분으로 L의 맹활약을 지켜볼 수 있었다.
이제 세월이 흘러 그룹사의 임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L과는 형제처럼, 친구처럼 좋은 브로맨스를 유지하며 만나고 있다. L을 볼 때마다 청출어람이라는 느낌으로 뿌듯이 그를 바라본다. 클림트가 에곤 실레를 볼 때 느꼈던 기분과 비슷하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