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교향악단, 약칭 서울시향의 영문 표기는 Seoul Philharmonic Orchestra이다. 대부분의 교향악단이 Philharmonic Orchestra라는 표현을 쓴다. Philharmonic이라는 단어는 사랑을 뜻하는 Phile이라는 어근에 화합이라는 harmony라는 말이 붙어서 만들어진 말이다. 이 말처럼 서울시향은 하모니가 아름답게 어우러진 연주를 했다.
연말이 다가온 12월 21일에 서울시향의 연주회를 찾았다. 얍 판 츠베덴의 지휘로 하이든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와 베토벤의 ‘합창’을 연주했다. 하이든의 신포니아에서는 천상의 음악 같은 아름다움이, 베토벤의 합창에서는 웅장하고 서사적인 장엄함이 느껴졌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가장 유명하고 사랑받는 화가라고 하면 빈센트 반 고흐를, 음악가라면 루드비히 반 베토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베토벤의 최고 작품이라면 피아노 협주곡 황제와 교향곡 운명, 합창 등이 대표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합창의 진수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는 서울시향의 연주였다.
네덜란드 출신의 음악감독 얍 판 츠베덴의 지휘는 악기 하나하나를 화합 속에 뭉치고 풀어주는 마술 같았으며 지휘의 동작은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가운데 대가의 풍모를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솔리스트들과 100여 명에 이르는 합창단의 노래도 아름다웠다. 특히 소프라노 솔로인 황수미 성악가는 오페라 라보엠에서 보고 또 만나 반가웠고, 그녀의 솔로 부분에선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서울시향 연주회 커튼콜 장면] (이미지 출처 : 직접 촬영)
반면 몇 달 전에 같은 장소에서 관람했던 다른 교향악단의 연주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베토벤의 교향곡 운명과 피아노 협주곡 황제를 연주했는데, 연주 내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이상한 부분이 많았다. 특히 고음부 관악기에서 하모니와 흐름을 흐트러트리는 듯한 인상을 받았는데, 그 악단의 영문 명칭에도 Philharmonic이라는 단어가 이었지만, 전혀 악기들이 화합을 이루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그 와중에 연주 후에는 지휘자가 마이크를 잡고 지역 정치인들을 소개하며 박수를 달라고 요청했는데, ‘도대체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정치인들에게 박수를 쳐야 하나’하는 불쾌함까지 있었다.
그 실망스러움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서울시향의 아름다운 하모니를 들었더니 그 아름다움과 감동이 배가되어 더 가슴에 와닿는 것 같았다.
II.
생활의 모든 곳에서 나와 하모니가 잘 맞는 사람을 만날 수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특히 오랜 시간 같이 일하는 직장에서는 특히 그렇다.
젊은 시절 함께 일하며 평생 좋은 선후배, 형제, 친구처럼 지내온 후배 J는 나와 하모니가 정말 잘 맞는, 브로맨스가 아주 좋은 사이였다. J는 후배지만 선배처럼 내게 늘 Cheer up을 해줬으며 어려울 때, 힘들 때 의지가 돼 주었다.
내가 입사한 지 2년 정도 되었을 때의 겨울에 회사의 자매결연부대인 육군 모 사단을 위문 간 적이 있었다. 그때 난 함께 간 남녀직원들에게 크리스마스 캐럴 돌림 노래를 알려준 후, 사단장을 비롯한 장병들 앞에서 기타 치며 율동과 함께 즐겁게 노래를 불렀다. 사단장은 물론 부대원 모두가 박수를 치며 너무 기뻐했음은 당연하다.
(이미지 출처 : Pinterest_redbubble.com)
그런데 우리의 노래가 끝났을 때 현역 장교 한 명이 자신이 부대를 대표해 답가를 부르겠다고 나섰다. 뜻밖이었지만 반가웠고, 노래를 잘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그 패기가 인상적이었다.
내가 회사에서 연수 업무를 담당하다가 떠난 지 반년쯤 후에 J가 연수 업무 담당자 중 한 명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업무 담당 선후배로 가끔 만나게 되었다. 그러던 중 J와 이야기를 나누다 그때 답가를 했던 장교가 당시 사단장의 부관이었던 J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묘한 인연에 대한 반가움은 J와 평생 이어지는 하모니의 시작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과장 때 J와 나는 회사 CEO의 Speech write 업무를 같이 수행하게 되었다.
잠깐 말머리를 돌려서, 화가 고흐가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또 가장 사랑받는 화가의 한 사람이 된 데에는 물론 화상(畵商)인 동생 테오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고흐가 사망하고 불과 6개월 후에 테오마저 세상을 떠났을 때, 고흐의 작품을 세상에 알린 사람은 테오의 부인, 즉 고흐의 제수인 요한나였다.
한 회사의 발전에는 CEO의 철학이나 전략, 경영방침 등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또 그 여러 생각들이 전 직원에게 잘 전파될 때 회사의 성공과 번창의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그런 메신저 역할을 하는 업무가 바로 Speech writer이라고 생각한다. 외국어를 전공했고 사내방송 경험이 있던 나와 국문학과를 나온 J가 이 업무를 같이 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각자 초안 작업을 하다가 어느 정도 진행이 되면 내용을 합친 후 둘 사이에 PC 모니터 하나를 놓고 같이 내용을 보면서 글을 진행시켰다. 내가 내용을 입력할 때 J는 가끔 진한 경상도 억양으로 “형님, 최고의 명문장입니다. 정말 멋진 표현입니다.” 이런 감탄사를 외치곤 했다. 후배로부터 듣는 이런 추임새는 내게 기운을 불어넣어 줬고, 밤늦은 시간까지의 야근도 힘들지 않게 하는 영양제가 되었다.
III.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요즘 가장 사랑받는 화가라고 하면 단연 고흐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불멸의 화가 반 고흐 전시회’ (’ 24. 11. 29 ~ ’ 25. 3. 16)에는 수많은 사람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은 방문객이 좀 적지 않을까 하고 갔지만, 오산이었다. 예약을 하고 갔음에도 종이 티켓으로 교환해야 해서 긴 줄에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그 이후에도 입장을 위해서 대기 등록을 하고 약 40분을 기다렸다. 오디오가이드를 휴대폰에 다운로드할 수 있어, 이것을 들으면서 기다려 지루함을 좀 덜 수 있었으나, 국립중앙박물관의 ‘비엔나 1900’ 전시회처럼, 예약 자체를 30분 단위로 나누어서 받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전시장 내에서는 앞 뒤로 다른 관람객들과 끼어서 종종걸음으로 이동해야 했다. 정체를 막기 위해서인지 사진 촬영은 금지되었으나, 오디오가이드 설명이 있는 그림 앞에서는 확연히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의 ‘크뢸러 뮐러’ 미술관의 주요 작품들이 전시되어 좋은 원화들을 감상할 수 있었고, 고흐의 작품 시기를 다섯 개의 챕터로 나누어 소개한 전시 콘셉트도 좋았다.
들라크루아를 오마주한 <착한 사마리아인>이나 <씨 뿌리는 사람>, 파리에 머물 당시 점묘법 화가들의 영향을 보여주는 <식당 내부> 등 유명한 작품들이 당연히 눈길을 끌었다. 그 외에도 <꽃이 핀 밤나무>나 <파란 꽃병에 담긴 꽃들> 같은 작품은 이번 전시회에서 처음 접했지만, 매우 매력 있는 그림들이었다.
[고흐_착한 사마리아인] (이미지 출처 : 예술의 전당 홈페이지)
[고흐_씨 뿌리는 사람} (이미지 출처 : 예술의 전당 홈페이지)
[고흐 : 식당 내부] (이미지 출처 : 예술의 전당 홈페이지)
[고흐_ 꽃이 핀 밤나무 / 파란 꽃병에 꽂힌 꽃들] (이미지 출처 : 예술의 전당 홈페이지)
고흐가 네덜란드에서 처음 화가로서의 첫걸음을 뗄 때 그렸던 역작 <감자 먹는 사람들>은 채색된 유화가 아니라 스케치 상태의 작은 그림이었다. 그래도 유화의 표현과 느낌은 그대로 살아있었다.
고흐는 이 작품에 대해 대단히 자부심이 있었지만, 주위의 평판은 달랐다. 일반적으로는 너무 어둡고 인물들이 그로테스크하다는 평이 주였던 것 같다. 심지어 고흐의 물질적, 정신적 후원자가 된 동생 테오도 이 그림을 보고선 고흐에게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테오 자신이 활동하고 있었고, (19) 세기말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곳이자 미술의 중심도시이기도 했던 파리로 오라고 권유하게 된다.
[고흐_감자 먹는 사람들 드로잉] (이미지 출처 : 예술의 전당 홈페이지)
고흐는 이곳에서 네덜란드의 어려움을 벗어나 파리의 화려함을 접하게 되며, 수많은 자화상 중에서도 손꼽히는 역작을 그렸다. 또 고갱과 로트렉을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과의 교분을 갖게 된다. 다소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인 데다가 자신의 그림에 대한 사소한 비평에도 송곳처럼 날카롭게 반응하곤 했던 고흐는 결국 화가들의 사회에서 소외된 떠돌이로 추락해 갔다. 게다가 작은 집에서 같이 살던 동생 테오는 결혼을 희망하던 연인(나중에 아내가 되는 요한나)을 파리로 불러오기 위해 형이 떠났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고흐는 남쪽을 향한 기차에 올랐다.
V.
우리가 잘 알듯이 고흐는 파리에서의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프랑스 남부의 아를로 향하게 된다. 어릴 적부터 많이 들었던 비제 작곡의 플루트 연주곡 <아를르의 여인>의 그 아를르이다.
햇빛이 많이 들지 않고 기후가 좋지 않은 네덜란드 태생의 고흐는 남프랑스의 눈부신 햇살이 비치는 아를에 큰 매력을 느꼈다. 그림의 색채가 몰라보게 밝아졌을 뿐 아니라 동료 화가들과 함께 아를의 예술 공동체를 만드는 꿈을 꾸게 된다.
[고흐 아를 시절 대표작 중 하나인 아몬드 나무] (이미지 출처 : 예술의 전당 아트 샵 패널을 촬영)
그리곤 파리에서 만난 여러 화가들에게 아를에 와서 공동체에 참여하자는 제안을 했지만 모두 무시하거나 거절했다. 뜻밖의 엉뚱한 제안이기도 했고 당시 세계적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를 떠나 성격도 괴팍하고 과격한 고흐와 함께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 파리에서 만난 화가 중 하나였던 고갱이 초청에 응하고 아를에 도착한다. 고흐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고갱을 위한 해바라기 그림 등을 그리면서 그를 환대하지만, 사실 고갱은 화상인 테오의 부탁이 있었던 데다가 돈까지 받았으므로 아를로 향한 것이었다. (일설에는 테오가 고갱의 빚을 변제 또는 면제해 줬다는 말도 있다.)
[고흐_해바라기] (이미지 출처 : 예술의 전당 아트샵 패널을 촬영)
이렇게 엇갈리는 두 사람의 마음은 약간의 허니문 기간을 지나자 곧 갈등의 관계로 들어가게 된다. 고갱의 동기가 순수하지 못했고, 고흐는 자신의 그림에 대한 작은 조언도 견디지 못하고 폭발하는 성격이었던 탓이 크다. 그 어긋남이 커지다가 그 유명한 고흐의 ‘귀 절단’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 사건 이후 고갱은 뒤도 안 돌아보고 파리로 향했고, 고흐는 정신병이 발발했음을 자각하고 자기 발로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고흐_귀를 자른 자화상] (이미지 출처 : artandframe.com.au)
난 이 부분에서 고흐와 고갱의 어긋난 브로맨스처럼, Speech writer 당시 나와 정말 맞지 않았던 모(某) 상무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제 그는 오래전 퇴직해서 노년에 접어든 지 한참이 지났고 나도 퇴직을 한 마당이지만, 그때 받은 어긋남의 쓰린 기억은 잘 잊히질 않는다. 물론 그는 그대로의 방침과 생각이 있었고 그것이 나와 안 맞았다. 내 결재 라인의 임원이었던 그는, 평소 CEO의 이야기는 Dry 하고 논리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당연히 직원들의 감성에 호소하고 Speech를 통해 그들의 마음을 모아보려는 나의 의도를 좋게 보지 않았다.
인사이동으로 CEO의 수행비서 업무를 맡게 된 J가 하루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회사에 엄청나게 큰 이슈가 있었는데, 아주 늦게 퇴근하던 CEO가 엘리베이터에 있던 직원의 인사를 받았다. 그 직원은 그 후 피곤한 한숨을 조용히 내쉬며 눈을 감고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었다. 그 직원과 함께 1층에서 내리던 CEO는 직원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고생 많네”라고 했는데, 그때 CEO와 그 직원 모두의 눈에 눈물이 글썽했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들은 나는 직원들의 노고를 위로하며 감성적으로 공감하는 CEO의 메시지를 Speech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그 상무에게 결재를 받으러 갔을 때, 그는 이런 말로 나를 침몰시켰다. “CEO를 네 수준으로 끌어내리지 마!”.
때론 연필로 A4 한 장을 대각선으로 쫙 그으면서 “빼”라고 한마디만 하기도 했고, 다른 직원에겐 그보다 심한 인격 모독도 있었다. 세월이 흘렀어도 그때 받은 상처는 완전히 가시지 않는다. 한 가지 웃기는 일은 후배 J가 정말 멋진 표현이라고 감탄한 부분은 꼭 그 상무에게 질책을 받고 삭제해야 했었던 점이다. 우리의 감성과 그의 논리가 하모니를 이루지 못했던 탓이리라.
한 번은 나와 업무적 관계가 없는 H차장으로부터 그 상무가 나에 대해서 “그 친구는 아주 쎄게 튜닝이 필요해.”라는 말을 했다는 걸 전해 듣고는 어이가 없었다. 업무 연관도 없는 사람에게 한참 아래 직급에 있는 직원에 대한 뒷담화가 웬 말인가? 난 그의 업무적 지시를 따라야 했고 또 그래왔다. 그러나 마치 인간 개조를 해야 한다는 듯 ‘쎄게 튜닝이 필요하다’는 말에 대해서는 반감이 들었다.
그가 명예롭지 못한 사건으로 퇴직한 이후 난 그를 본 적이 없다. 아, 길 가다가 우연히 마주친 적이 한번 있었던가?
반면 현재 그룹 계열사의 사장을 맡아 직원들의 존경을 받으며 멋지게 근무하고 있는 J와는 지금까지도 형, 동생으로 친구로 하모니를 이루며 찰떡 브로맨스를 이어가고 있다.
사람이 서로 안 맞을 수도 있고, 기가 막히게 호흡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위 고하에 상관없이 서로에게 아픔을 주기보다는 이견을 조율하고 토론하는 것이 조직이나 개인의 발전에 이로움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이다. 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에서 만난 사람과 하모니가 어우러지며 서로 인간적인 친밀감을 느낀다면 개인적으로도 행복한 일이다.
요즘은 과거와 직장 문화가 많이 달라져, 대놓고 인격에 상처를 주거나 막말을 하는 경우가 많이 줄었다고 들었다. 반면에 굳이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과 인간적으로 가까워질 필요를 못 느끼는 직원들이 대부분이라는 반작용도 있다고 한다. 영민한 젊은 세대들이 잘 알아서 하리라 생각하지만, 동료들이 좋으면 나도 즐겁고 주변에 접하는 이들과 갈등이 있으면 피곤한 것이 인지상정이다. 모두가 좀 더 행복하고 좀 더 친밀한 세상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생각은 나만의 꿈이 아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