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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와 호두까기인형

(일상의 기록, 생각의 낙수 - 발레 호두까기 인형 관람기)

by 들꽃연인

I.

난 어릴 때부터 유별나게 크리스마스를 좋아했다. 크리스마스에 대단한 선물을 받거나 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막내에게 선물할 돈조차 마땅치 않으셨던 우리 아빠 산타, 엄마 산타께서는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것에 무심하셨다. 그 덕에 난 산타할아버지가 없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아버렸던 듯싶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그래도 난 크리스마스가 좋았다. 이브에 교회에서 진행되는 재롱잔치에서는 노래든, 연극이든, 사회든 하여간 중요한 역할들을 맡았었다. 초등학교 고학년과 중학생 때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직접 만들어 친구들에게 보냈다. 이미 그때부터 FM을 듣기 시작했는데, 성탄 시즌에 FM에서 캐럴이 아닌 다른 노래를 틀어주면 화가 났다. 방송을 한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분위기를 못 맞춰 주나… 이제는 좀 이해가 간다. 캐럴이라는 게 워낙 제한된 곡들이다 보니, 똑같은 곡들을 반복해서 틀기가 어려웠던 것 아닐까 싶다. 대학 때는 교사로 재롱잔치를 준비하기도 하고 새벽송을 돌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사람들이 너그러워 새벽송을 돌며 캐럴을 불러도 이웃들이 다 같이 즐거워해주거나 최소한 화를 내지는 않았던 시절이었다. 또 막내고모가 하시는 유치원에서 산타 역할 알바도 했었는데, 아이들을 안아주면 산타가 무서운지 바들바들 떨곤 했다. 그 이후에는 주로 성가대 칸타타로 참여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TV에서는 빙 크로스비 주연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나 성경 스토리를 주제로 한 영화들을 방송하곤 했다. 그 시절 TV에서 또 하나 자주 방송해 줬던 게 발레 <호두까기 인형>이다. 그런데 난 그 발레를 본 적이 없었다. 크리스마스를 그렇게 좋아했으면서도 크리스마스가 무대이기도 하고, 자주 방송되기도 했던 <호두까기 인형>을 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을까?


아마도 발레라는 장르 자체가 나하고는 너무 거리가 먼 다른 나라 얘기 같았고, 그래서 자연 무심해졌지 않았을까? 어쨌든 성인이 되어서도 호두까기 인형은 물론 발레 자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50대가 되어서야 겨우 회사에서 협찬한 대가로 받은 초대권을 얻어 <발레 춘향>이라는 한국적 발레 한 편을 봤을 뿐이었다.


한 친구는 ‘발레는 지구 중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인간의 몸짓’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은퇴 후에야 발레를 처음 보게 됐으니 발레 감상은 나 스스로의 중력에서 벗어나는 몸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II.

발레 입문자이기 때문에 첫 번째 공연은 가장 이름이 친숙한 호두까기 인형을 골랐다. 그리고 평소에 즐겨 듣는 FM 클래식 프로그램에서, 호두까기 인형에 나오는 음악들을 자주 틀어줘서 여러 곡들이 귀에 익숙하기도 했다.


그래도 초심자이고, 내 평소 스타일대로 예습을 열심히 했다. 마린스키 무용단의 공연, 광주시립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 공연 전체가 유튜브에 올라와있어 잘 볼 수 있었다.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 발레단의 공연 실황은 일부분 밖에 볼 수 없었다.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은 매년 비슷한 시기에 호두까기 인형 발레를 공연하는데, 국립발레단은 예술의 전당에서, 유니버설발레단은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한다. 세종문화회관이 가깝기도 하고, 유니버설발레단은 내가 예습을 한 마린스키무용단 버전으로 공연을 하기에 이 공연으로 예약했다.

[호두까기인형] (이미지 출처 : Pinterest_whiteblaze. net)

외국인을 포함하여 클라라 역과 호두까기 왕자 역에 각각 7명의 무용수가 17회의 공연에 교대로 출연하는데 내가 관람한 공연에는 이유림과 임선우가 공연했다. 아름다운 음악과 춤이 어우러져 펼쳐지는 환상적인 무대였으며, 이유림과 임선우는 본인들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듯했다.

(이미지 줄처 : 세종문화회관 로비의 판넬을 직접 촬영)


발레 공연을 보며 참 궁금했던 것이, 토슈즈 하나만 신었을 뿐인데, 맨 플로어에서 어쩜 그리 자연스러운 회전이 그것도 여러 번씩 가능할까 하는 것이었다. 피겨스케이팅이야 얼음 위에서 이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발레의 경우는 참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 신문에 소개되었던 강수진 발레리나의 발 사진도 생각이 났다. 강수진 발레리나는 지금 국립발레단의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피나는 연습들이 저런 우아한 동작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고, 쉬워 보이는 동작일수록 발레리나들은 어렵게 연습했을 것이리라.

[언론에 소개된 강수진 발레리나의 발] (이미지 출처 : 조선일보 2017.9.20)

또 하나 감탄했던 것은 어린이 출연진들이었다. 불과 열 살을 넘었을까 말까 싶은 어린이들이 어쩜 그렇게 발레를 잘하고 연기가 좋은지 정말 놀랠만했다. 그래서인지 객석에 엄마 아빠와 함께 앉은 수많은 어린이 관객들도 칭얼거리지 않고 열심히 관람에 몰입하는 모습들이었다. 내 옆 자리에는 열 살도 안돼 보이는 서양인 꼬마 아가씨 둘이 엄마 아빠와 함께 왔는데, 너무 예쁘고 귀엽게 발레 공연을 보고 있어서, 꼭 아기천사 같았다.

[어린이 출연진들의 커튼콜] (이미지 출처 : 직접 촬영)

크리스마스이브의 공연이어서 마지막 커튼콜 시간에는 캐럴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 음악을 반주로 출연진들이 흥겨운 앙코르 발레를 해주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캐럴에 맞춘 발레로 커튼콜 앙코르 공연을 하는 출연진] (이미지 출처 : 직접 촬영)

따뜻해진 마음과 크리스마스의 즐거운 마음을 안고 세종문화회관에서 나왔으나, 가까운 두 곳에서는 ‘계엄, 탄핵, 체포, 사살’ 등 살벌한 단어가 들리는 시위가 정반대의 목소리로 외쳐지고 있었다. 가슴 아픈 현대사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지만, 그래도 모두의 마음에 평화가 가득해지길 기도해 본다.


독자님들 모두 모두 기쁜 성탄과 복된 새해 맞으시기 바랍니다.

Merry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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