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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맨스를 아시나요? 2 - 나 자신과의 브로맨스

<일상의 기록, 생각의 낙수_카라바조 전시회 관람기>

by 들꽃연인

I.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주연한 영화 토털리콜(1990년 작품).


2012년에 다시 제작되기도 했는데, 스토리나 구조는 똑같다.


슈워제네거가 맡은 주인공 퀘이드는 공사장의 인부로 살아가는 평범한 사내다. 아름다운 아내(샤론 스톤)와 함께 사는 그는 잘 때마다 화성에 대한 꿈을 꾸며 화성 여행을 가고 싶어 하지만, 아내는 이에 반대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주여행을 다녀온 기억을 뇌에 이식해 실제 여행을 한 것처럼 느끼게 해 준다는 광고를 보고, ‘리콜사’를 찾아간다. 그는 여행을 하는 자신의 신분을 첩보원으로, 원하는 여성 파트너로는 꿈에서 자주 본 여성의 이미지를 신청한다. 그러나 뇌에 이식을 막 시작하려는 찰나 몸에서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그때부터 주변 사람들, 심지어 직장 동료나 아내마저도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이상한 상황에 맞닥트리게 된다. 여기서부터는 이게 현실인지, 아니면 리콜사에서 주입하는 가짜 기억인지가 헛갈리는 상황이 계속된다.

[영화 토털리콜 중 리콜사에서 기억을 이식하다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장면] (이미지 출처 : Bing검색_sisain.co.kr)

그는 우여곡절 끝에 과거의 자신이 남긴 영상물을 접하게 된다. 그 영상물에서 과거의 자신은 현재의 자신에게 자신이 화성 악당 독재자의 부하였지만, 개과천선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악당에게 반란을 일으키려다 체포되어 왜곡된 기억을 주입당한 뒤 지구에서 직장 동료 심지어는 가짜 아내의 감시를 받으며 살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독재자에게 대항하기 위해 변장을 하고 화성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독재자에게 대항하는 반군 세력의 주요 인물이자 과거 아내였던 꿈속의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 이후 영화는 다시 반전을 하며,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누가 선하며 누가 악인지 헛갈리게 만드는 상황을 한번 더 뒤집는다. 물론 결말은 선이 승리하는 해피엔딩인데, 한두 번만 봐서는 구조를 완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가벼운 액션 영화로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는데, 정체성에 대한 관점으로 파고들면 매우 복잡한 면이 있다.

[영화 토털리콜 중 과거의 주인공이 현재의 주인공에게 영상물로 메시지를 전하는 장면] (이미지 출처 : Bing검색_filecast.co.kr)

어쨌든 이 영화에서 내가 주목한 장면은 바로 과거의 ‘나’가 현재의 ‘나’에게 상황의 전개를 이야기하며 설득하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에는 보다 큰 음모가 숨겨져 있는 거짓이 들어있어 내가 나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생각해야 되는 상황이 생긴다.


나는 과거의 내가 늘 진실했고 옳았다고 믿을 수 있을까?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을 것인가? 나는 과거의 내가 원했던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사족) 35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인데, TV를 끄면 마치 TV가 창문이어서 창 밖의 호수 풍경을 보여주는 것 같은 스크린 세이버가 나오기도 하고, 인공지능 로보택시가 등장하기도 한다. 가짜 아내 역의 샤론 스톤은 슈퍼스타가 되기 전의 신인급이었는데, 그때도 정말 아름다웠다.

[영화 토털리콜에서 TV를 끄자 호숫가 창문처럼 보이는 스크린 세이버가 된다.] (이미지 출처 : Bing검색_sark.yes24.com)


II.

내가 바다를 처음 본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하계 해양훈련’이라는 군사문화 잔재가 붙은 이름의 단체 여행이었고, 바다의 첫 모습은 대천 바닷가 골목길의 블록 담장 사이에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강렬한 첫인상은 잊을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 못지않게 쇼킹했던 기억은 카라바조의 그림을 처음 본 때였다. 그것도 직접 본 것이 아닌, 책에 나온 사진이었는데도 그러했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라는 작품인데, 내 글에는 사진이라도 싣고 싶지 않을 정도로 강렬하다. 칼이 목의 절반쯤을 지나가고 있는 참혹 하면서도 사실적인 표현은 소름 끼치게 자극적이다. 유디트의 얼굴은 순진하리만큼 어리고 아리따우며 귀걸이는 페르메이르의 아름다운 그림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를 연상시킨다. 반면 옆에서 유디트를 부추기는듯한 노파는 마치 마귀할멈 같은 이미지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이미지 출처 : Pinterst_blog.artsper.com)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이미지 출처 : Pinterest_duga.tistory.com)

유디트의 이야기는 성경에는 없고 외경에 있다고 하는데, 우리에게 낯익은 스토리는 아니다. 그리나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를 미인계로 유혹해 술 취하게 하고 목을 베어 조국 유대를 지킨 유디트의 이야기는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 작품화되었다.


카라바조의 그림을 직접 본 것은 루브르에서의 <성모의 승천>, 우피치 미술관에서의 <메두사> 등부터였는데, 역시 충격적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된 카라바조의 '메두사'] (이미지 출처 : Pinterest_aramburu design)

우리나라에서는 카라바조가 그렇게까지 유명한 화가는 아니지만, 서구에서는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급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그는 어두운 바탕에 빛이 비치는 느낌으로 사실적이고도 강렬한 인상을 주는 그림들을 그렸다.


III.

서울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카라바조 전시회에서도 그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 전시회에서는 카라바조에게 영향을 주었거나 받은 화가들, 그리고 그와 경쟁했던 화가들의 그림도 볼 수 있다. 그 대부분이 어둠과 빛의 대비를 이용한 그림들을 그렸다.


이 전시회에서 볼 수 있었던 카라바조의 그림은 그의 대표작인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도마뱀에게 손가락을 물린 소년>, <도마의 의심>, <부르심을 받는 마태>, <엠마오에서의 저녁식사>등이었다. 특히 ‘도마뱀에게 손가락을 물린 소년’은 우피치 미술관에서 본 ‘메두사’의 표정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도마뱀에게 손가락을 물린 소년] (이미지 출처 : 직접 촬영)
[도마의 의심] (이미지 출처 : 직접 촬영)

그중에서도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은 그림과 상징성, 스토리 등으로 많은 생각과 느낌을 주었다. 카라바조는 다윗의 얼굴에는 자신의 젊은 시절 모습을, 골리앗의 모습에는 그림 그리던 당시 나이 든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마치 젊은 자신이 늙은 자신의 목을 잘라 들고 있는 형상이다. 늙었다고 해봐야 카라바조가 39세에 죽었으니까 30대 후반의 얼굴이겠지만.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이미지 출처 : 직접 촬영)

타임머신이 있어서 젊은 시절의 나를 만난다면 누가 누구에게 존댓말을 해야 할까? 젊은 나는 지금 나의 조상이므로 젊은 내가 위일까? 아니면 지금의 내가 나이도 많고 인생 경험도 많으니 젊은 나는 지금의 나에게 경어를 써야 할까?


어떤 설문에서 60대 이상에게 젊은 시절의 자신으로 돌아가길 원하느냐고 물었더니, 대다수가 싫다는 대답을 했다고 해서 난 처음엔 좀 의아하게 생각했다. 젊음처럼 좋은 것이 없을 터인데, 왜 그랬을까 했는데 질문에 답이 있었다. 즉 현재의 기억을 갖고 과거로 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젊은 시절을 한번 더 사는 것이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젊은 시절의 고생과 갈등을 다시 겪고 싶지 않다고 한 것이다. 젊음이 아름답다는 것은 젊을 때는 잘 모르고, 나이 들어서야 알게 되는 것이니까.


어쨌든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좋든 싫든 뗄 수 없는 브로맨스의 관계이다. 나는 과거의 나를 사랑한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되고 싶었던, 아니 최소한 좋아할 수는 있는 사람일까? 내 젊음과 지금의 모습은 사랑의 브로맨스일까, 갈등의 브로맨스일까?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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