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백조의 호수' 관람기
I. 나쁜 여자 증후군
프랑스어의 팜므파탈(Femme fatale)이라는 말은 외국어지만 악녀를 가리키는 대명사처럼 쓰입니다.
중국에서는 경국지색, 즉 나라를 기울게 할 정도의 미인들이 있었으며 달기, 서시, 초선, 양귀비 등을 꼽지요.
우리나라에도 당연히 팜므파탈이 많이 있었겠지만 그리 두드러지게 회자되지는 않는 듯합니다. 사극 선덕여왕에서 고현정 배우가 열연했던 미실 정도가 생각납니다.
서양에선 단연 마타하리가 꼽힙니다. 2차 대전 중 독일과 프랑스의 2중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당한 미모의 여인이었다고 하죠. 얼마 전 옥주현 배우 주연으로 본 뮤지컬 마타하리에서는 사랑만을 좇다가 독, 불 양국으로부터 이용당한 비련의 여인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예쁜 여자에게 눈길이 가는 건 신이 남자에게 심은 본능 같은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그것도 한 꺼풀 더 들어가면 잔인한 측면이 있습니다.
집에서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나를 위해 헌신하는 착한 아내보다, 밖에서 짙은 화장, 분장, 변장으로 무장한 다른 여자, 남의 여자, 심지어 거리의 여자나 술집여자에게 더 눈길이 가는 것이지요. 요즘은 성희롱 방지법이 하도 엄격해 맘대로 바라보지도 못하지만.
II. 러시아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차이콥스키 작곡의 발레 백조의 호수를 모스크바 라 클라시크 발레단의 공연으로 보기 위해 일산 아람극장을 찾았습니다. 러우전쟁 초기에는 러시아 예술인들의 공연이 줄 취소됐는데, 러시아 발레단의 공연이 열리는 걸 보니 분위기가 조금 나아졌나 봅니다. 아님 냄비가 식었거나.
공연이 서주로 시작될 때부터 아쉬운 게 하나 있었는데, 연주가 오케스트라의 라이브가 아니라 녹음된 MR을 트는 것이었습니다. 같이 호흡을 맞춘 오케스트라까지 내한하기에는 비용이나 여건이 만만치 않았겠지만, 현장 공연 관람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가 전자기기가 아닌 악기 자체의 음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기에 이해는 하지만 서운하기도 했지요.
덕분에 평소라면 오케스트라가 위치했을 O구역 3열 중간의 R석에서, 발레리나의 토슈즈가 플로어에 닿는 소리까지 느끼며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막이 오르자 바비인형 같은 늘씬한 러시아 미인들이 늘어서 있어서 바로 안구정화가 됐습니다.
발레 백조의 호수는 누구나 들어봤을 것 같은 익숙한 스토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왕자 지그프리트의 스무 살 생일에 축하파티가 열리고, 어머니인 여왕은 각국에서 온 공주들 중 신붓감을 고르라고 합니다. 맘에 드는 여자는 없고 마음이 착잡해진 왕자는 호수로 사냥을 나갑니다. 그곳에서 낮에는 백조로, 밤에는 사람으로 변하는 저주에 걸린 오데트를 보고 한눈에 반하고 사랑을 약속합니다. 새벽이 되어 왕자는 떠나고 오데트는 다시 백조가 됩니다.
2막에서 왕실 무도회가 열리고 수많은 공주들이 왕자의 여인이 되기 위해 찾아옵니다. 그러나 왕자는 오데트만을 찾는데 이때 오데트에게 저주를 건 마법사 로트바르트가 자신의 딸 오딜과 함께 나타납니다.
왕자는 오데트와 너무도 닮은 오딜에게 사랑의 약속이자 신부로 맞는다는 표시인 부케를 건넵니다. 먼발치에서 이를 보던 오데트는 슬퍼하며 떠나고 오딜은 그 순간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며 부케를 땅바닥에 내동댕이 칩니다.
왕자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며 머리를 감싸 안다가 사라진 오데트를 쫓아갑니다. 호수에서 오데트를 만난 왕자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사랑을 고백합니다. 왕자와 오데트는 마법사의 저주를 이겨내고 해피엔딩을 맞습니다.
러시아 발레단의 공연은 전체적으로 힘찼습니다. 특히 발레리노들의 점프력과 체공시간은 놀라웠고, 발레리나들을 솜털 들듯 가볍게 들어 올리곤 했습니다.
III. 왜 러시아 여자들은 예쁠까?
우리나라에 남남북녀라는 말이 있듯이 유럽에서는 남자는 남쪽 서쪽으로 갈수록 잘생겼고, 여자는 북쪽 동쪽으로 갈수록 예쁘다는 말이 있답니다. 그래서 이탈리아, 스페인 남자들이 멋있고 벨라루스, 러시아 여자들이 예쁘다고 하지요.
물론 더 동쪽으로 간 우즈베키스탄은 한때 김태희가 밭 매고 송혜교가 빨래한다는 농담이 있었는데, 이쪽저쪽에서 침략을 많이 받은 역사 때문에 혼혈이 많아서 그렇다는 말도 있더군요. 전 진위여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여자들 중에 미인이 많은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바비인형 같은 여성을 미인으로 보는 관점이 일반화되어서인 듯합니다.
이번 공연이 모스크바에 베이스를 두고 있는 발레단의 공연이라서 당연히 발레리나들이 대단한 미인이었고, 발레리노들도 멋있었습니다.
IV. 왜 흑조가 더 매력적일까?
이 공연의 주인공은 지그프리트 왕자와 백조인 오데트, 그리고 흑조인 오딜입니다. 1막은 백조 중심, 2막은 흑조 중심의 흐름이지요. 그리고, 오데트와 오딜이 똑같이 생겼다는 설정 때문에 같은 발레리나가 1인 2역을 맡습니다. 이번 공연에서는 수석 무용수인 리나 셰벨레바가 그 역할을 맡았습니다. 같은 작품 내에서 전혀 상반된 두 성격을 표현해야 하는 고 난이도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심리적으로 우호적이 되는 백조보다 흑조가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봤는데, 하얀 백조들의 발레 의상이 눈에 익은 상태에서 강렬한 흑조의 검은색이 자극적일 수도 있고 백조의 춤이나 파드되(pas de deux 주인공 두 사람의 춤. 영어로 직역하면 step of two)는 정적이었던 것에 비해, 흑조의 춤, 특히 지그프리트와의 파드되는 무척 역동적인 영향도 있을 것입니다.
1막에서도 역동적인 부분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백조들의 파드캬트르(pas de quatre, 네 명의 춤)인데, 그것도 오데트가 아닌 다른 백조들의 춤입니다. 음악도 흥겹고 춤도 재밌어서 참 좋았습니다.
어쨌든 몇몇 이유가 있겠지만, 나쁜 여자, 즉 팜므파탈에 쏠리는 남성의 눈길도 그 한 요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아, 흑조의 춤 중에 오딜이 연속해서 32회전을 하는 부분이 있는데, 감탄과 함성이 자연스럽게 터져 나왔습니다. 오늘 공연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V. 에필로그
제가 문화생활 중 가장 늦게 입문한 게 발레였고, 당연히 지금도 초보 관람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관람만 한다면 발레만큼 쉽게 익숙해지는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전, 호두까기인형으로 시작해 이제 지젤, 백조의 호수 정도밖에 못 본 초심자지만 발레의 아름다움은 충분히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발레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데, 여성 일곱여덟 분이 이 더위에, 러시아 발레단의 공연 관람을 하고 나오는 관객들에게 항의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공연을 보는 것은 우크라이나 민간인을 죽이는 미사일 구입비용을 주는 것이다'라면서요.
진짜 그렇게 생각해야 되는지는, 뭐 생각해 볼 일이지만 냄비는 아직 완전히 식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들어갈 때 항의해서 김새게 하지않고, 나올 때 어필해 주신 것은 감사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