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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람쥐덕션 Jan 09. 2024

경쟁PT에서 졌을 때

  새해부터 열패감에 시달렸다. 내가 하는 일은 누군가에게 평가를 받고, 1등을 해야 오롯이 성과로 인정되는 일이다. 기획안을 써서 발주처에 제출하면 나같은 최소 3개에서 20개가 넘는 제안사들이 프리젠테이션으로 붙어 경쟁한다. 그리고 그 중 발주처의 선택을 받는 것은 단 1개 팀이다. 결과가 발표되는 순간 2-3주의 준비기간은 결실을 위한 훌륭한 과정이 되기도 하고, 허망한 작업으로 버려지기도 한다. 그 순간을 결정 짓는 평가의 기준은 꽤 예민하다. 컨셉이 좋아도 PT를 허술하게 하면 신뢰를 받기 어렵다. PT를 잘 해도 발표 순서를 잘못 받으면 심사위원들의 기억을 자극하기 어렵다.


승패는 수많은 변수에 의해 좌우된다. 그래서인지 경쟁에서 졌을 때 나는 항상 어떤 부조리함의 가능성을 떠올린다. 혹시 1등한 회사는 애초에 내정되어 있던 것이 아닐까? 부당한 수로 그 승리를 얻어간 것은 아닐까? 사실 이건 나의 실패에 대한 잘못을 면피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하다.


  나는 타고난 감각보다 노력에 의지하는 사람이었다. 사무실 책상에 오래 앉아 있는 것, 주말을 할애하고 하루 종일 생각의 끊을 놓지 않는 것. 그것이 내 승률을 끌어올리는 원동력이었다. 반면 내 옆자리에서 같은 일을 하는 기획자 A는 나와 정 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센스 하나는 타고 난 사람이었다. 내가 일주일동안 수백장의 논문과 기사자료, 관련 서적들로 정신이 팔려 있을 때 그는 짧은 시간에도 빠르게 자료를 서치하고 2-3일 만에 금방 컨셉 방향을 찾아 냈다. 비슷한 시기, 각자 PT를 앞두고 있을 때면 내가 야근을 하는 동안 그는 유튜브 예능을 보거나, 칼퇴를 했다. 평소 우리는 꽤 무난한 동료애를 자랑하는 사이였고, 가끔은 그가 가진 능력을 부러워 하기도 했다. 하지만 몇년 전 그때, 내가 연거푸 PT에서 떨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음 속 잔잔하게 숨어있던 그에 대한 시기심도 함께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느 날, A가 준비하는 새로운 프로젝트의 기획안을 보게 됐다. 컨셉, 전략, 내용 모두 훌륭했고, 흠 잡을 것이 없었다.  '내가 심사위원이라면 여러 기획안 중 꼭 이 안을 고를 것' 이란 생각이 드니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그가 이 프로젝트에서 수주를 한다면 내 열패감은 더 심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 순간을 어떻게 견뎌내야 하나. A가 수주의 결과를 받아 올 그 날의 내가 불쌍해져서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열심히 한 나보다 덜 노력한 그에게 성과가 주어진다는 사실이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불안과 초조, 화가 뒤섞인 하루하루를 보냈었다.


  며칠 후 그가 PT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안도하는 내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노력하지 않는 이에게 성과는 없는 게 당연하다는 진리가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소식을 누구보다 듣고 싶어 했던 나다. 그런데 막상 그의 실패를 듣는 내 기분은 그닥 좋지 않았다.  


  집으로 오는 길, 버스 안에서 나는 생각했다. 혹시 내 소심한 저주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내 못난 민낯이, 치졸한 마음이 밖으로 드러나 모두에게 발가벗겨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버스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 길을 스쳐가는 사람들, 누군지도 모르는 그들에게까지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와 밥을 먹는데 우겨 넣은 밥 한술이 몇 분동안이나 목구멍 안으로 넘어가지지 않았다. 그에 대한 시기심으로 애써 포장해 왔지만 실은 그의 실패를 통해 나의 열패감을 희석시키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나. 나는 그가 얼마나 노력하는지 사실 잘 모른다. 타고난 감각과 센스를 무기로 갖고 있으면서 집에서는 새벽까지 기획안을 다듬는 노력을 겸했을 지도 모른다. 예능을 보면서도 그 안에서 아이디어와 영감을 찾아내려 끊임없이 생각의 끈을 놓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도 PT에서 떨어지는 날이면 나처럼 처참한 모습으로 좌절감에 시달릴지 모른다. 그동안 그의 노력을 얼마나 과소평가하고 그의 방식을 얕잡아봤는가. 동료를 응원하던 얼굴 뒤에 숨겨진 이중적인 마음, 밑바닥까지 내려간 내 모습을 마주한 그날. 나는 밥을 입에 넣고 한참을 울었었다. 


  경쟁에서 졌을 때 힘든 이유는 어쩜 성과의 상실 또는 허무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패인을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졌다 라는 것은 변화하라는 일종의 신호다. 나는 오랜시간 일 해왔고, 수많은 PT에서 떨어져봤지만 아직도 실패를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경쟁에서 지면 기운을 내는 일은 어렵고, 그 어떤 변화의 실마리로 끌어오는 일은 더욱 쉽지 않다. 이럴 때 나는 몇 년 전 A와 있었던 일들을 가끔 떠올려 본다. 이번에 1등을 가져간 기획자 또한 분명 나처럼 며칠 밤을 고민하고, 수천장의 자료와 수십개의 영상을 보며 PT를 준비했을 것이다. 승리를 할 만한 분명한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이제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더 이상 그들의 승리에 집착하지 말고, 무뎌진 나의 무기를 나만의 방식으로 더 날렵하게 갈아내는 것이다.


  결과가 발표된 그날 나는 문구점에서 드로잉 패드 하나를 샀다. 거기에 아직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다음 프로젝트를 위해 미리 수집할 자료 목록들을 적어 책상에 붙였다. 그리고 매일 아침, 나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실패는 여전히 고통스럽지만 언젠가 찾아 가다보면 분명 답은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졌다’는 것에 의미를 두기 보다, ‘나의 성장’이라는 다음 단계에 더 의미를 둘 수 있는 방법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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