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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람쥐덕션 Jan 16. 2024

편하게 웃을 수 있기까지

아빠의 통장1

   아빠는 쓰러지기 전까지 세탁소를 운영했다. 40년 동안 한눈 한번 팔지 않고 알차게 꾸려온 그 공간은 아빠의 유일한 자부심이었다. 남들에게는 푼돈이라 여겨질 수도 있는 소액들을 차곡차곡 모아 자식들 대학 등록금까지 해결 했으니 그 덕분에 언니와 나는 빚 없이 졸업 후 바로 사회에서 편하게 출발할 수 있었다. 아빠의 바람 중 하나는 배달용 스쿠터를 사서 몰아보는 것이었는데 구매 비용이 아까웠는지 아니면 안전의 이유에서였는지 평생을 자전거로 배달을 다녔다. 그리고 그날도 배달을 다녀오던 길, 집 앞에서 자전거와 함께 쓰러졌다.  


   발병 후 아빠는 한동안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검사실 앞에서 만난 나를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했다. 내가 손을 잡아도 가만히 있었고, 말을 걸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누구신지 라는 표정. 아빠는 기억에서 나를 잠깐 지웠구나.     


   너와 내가 함께 공유한 기억들이 대화로 만나면서 밀도를 높여가는 것이 관계라고 생각해 본다면, 상대가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일은 분명 불행이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마치 멈춰버린 시계와 같다. 아빠는 한 달 만에야 나를 알아봤지만 다른 기억에 대한 질문 10개를 던지면 2-3개의 질문에는 잘 대답하지 못했다. 그 모른다는 사실이 상처가 될까, 혹시 안 좋은 기억을 자극하지는 않을까, 기억이 사라진 자리를 걱정으로 채울까.   

“재활 열심히 해, 우리는 잘 있어”   

아빠와의 대화는 언제나 이 두 가지로 무척 단조로웠다. 엄마와 나의 일상 대부분도 아빠에서 시작해 아빠로 끝났다. 모든 것은 아빠로 귀결 됐다. 우리가족은 1월의 그날로부터 모든 기록을 멈춘 듯 했다.     


   아빠가 쓰러진 후 5개월 째 되던 어느 주말이었다. 엄마와 면회를 가니 따뜻해진 봄 날씨 덕인지 휠체어를 타고 이동 보호사와 함께 면회실로 내려온 아빠의 표정이 좋아 보였다. 나는 그날따라 왠지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재활 열심히 해서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해야지. 아빠 쓰러지기 전에 자전거 타고 다닌 거 기억 나?“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무표정하게 엄마와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한다. 언어장애로 어어어 밖에 못하는 아빠에게 노트와 펜을 쥐어주니 왼손으로 부들부들 거리며 힘겹게 단어 하나를 적었다.


    '가게'  자전거로 배달하던 기억에서 파생된 것 같았다. 올 것이 왔다. 아빠의 기술과 엄마의 보조로 운영되던 세탁소를 지속 할 수 없음은 당연했다. 급하게 처분하면서도 우리는 이 사실을 아빠가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도 언젠가는 말해야 할 것이다. 엄마 혼자 일하고 있다면 또 다른 걱정을 할 테니까. 조심스럽게 가게를 팔았다고 소식을 전했다. 어? 어어어 어어어- 아빠가 갑자기 왼팔을 마구 허둥이며 소리를 질렀다. 오른팔과 오른다리의 마비로 그나마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팔이 왼팔 하나였으니 그 팔을 있는 대로 흔들어댔다. 역시 충격은 컸구나. 모든 게 다 괜찮다고 아무리 설명 해줘도 막무가내다. 불안해 하는 얼굴, 흔들리는 눈동자. 40년을 어렵게 꾸려온 가게를 우리 멋대로 처분했다는 것에 화가 난 것 같았다. 아빠가 서둘러 왼손에 펜을 쥐고 노트에 다시 글씨를 썼다.


   '통장'  예상치 못한 단어가 튀어 나온다.

“당신 거기에 통장 놔뒀어?”

역시 흥분한 엄마가 물었다. 아빠가 손짓으로 최선을 다해 설명한다. 다리미판 바로 위 천장 선반에 올려뒀다고. 사실 그 손짓은 아빠가 가족들을 제대로 알아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면회만 가면 계속 해왔던 행동이었다.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 우리는 다리미 열이 위험하니 조심하라는 뜻 인가보다 했다. 이 상황에도 나를 생각 한다며 엄마는 매번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그게 바로 통장이었다니. 아빠 도대체 무슨 통장이야?


   비상금 통장이란다. 황당해 하는 엄마와 절박한 아빠 사이에서 나는 웃음이 터졌다. '100'  100만원이나 들어 있다고 한다. 노트의 단어를 본 엄마가 정색을 하며 아빠 손에 펜을 다시 쥐어줬다. 늘 서로 지지 않으려 용호상박의 케미를 자랑하던 두 사람의 신경전이 시작된 거다.

“통장 찾아 줄 테니 여기 비밀번호 적어봐”

아빠가 자신 있게 앞자리 두 개를 적었다. 그런데 세 번째 자리에서 멈춘다. 눈동자를 허공으로 굴리며 왼손을 들어 이마를 짚고 생각을 한다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생각이 안 난다며 씨익 웃었다. 애가 타는 엄마가 다시 잘 떠올려 보라고 했지만 아빠는 단호했다. 기억 나는데 일부러 안 나는 척 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삐뚤빼뚤 아빠의 100만원

      

   나는 계속 웃음이 났다. 엄마가 없는 틈을 타 매일 천장선반에서 통장을 꺼내 보며 뿌듯해 했을 아빠를 상상했다. 가끔씩 친구들에게 밥을 얻어 먹고 왔다는 날 중에는 분명 아빠가 쏜 날도 있었을 거다. 조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핸드폰을 사주겠다는 약속도 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다. 오래 전 엄마에게 경제권을 넘긴 후 인생에 소소한 재미와 행복이 되었을 통장이라 싶으니 아빠의 반응이 조금은 애잔했다. 우리는 집으로 오는 길, 그 비상금 통장에 얽혀있을 기억들을 서로 유추해보며 아빠를 생각했다. 아빠가 쓰러지고 난 후 거의 처음이었을 거다. 우리가 웃으며 아빠의 평범했던 이전 일상을 대화로 나눈 것이. 엄마와 나에게는 없었고, 아빠만 가지고 있던 기억 속에서 아빠를 다시 들여다보게 된 것이 신기했다.      

    

   2년이 지난 지금, 아빠는 꽤 많은 것들을 기억 하지만 여전한 언어장애로 일상적인 소통은 어렵다. 그저 “기억나?”라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면 기특 해 하고, 친척과 친구들의 이름을 노트에 쓰며 근황을 물을 때 발병 전 아빠로 온전히 돌아온 것 같은 착각이 들어 기쁘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한동안 면회 때 마다 끊임없이 아빠의 기억창고 속으로 화살을 쐈다. 물리적인 장애가 우리 삶의 단조로움으로 굳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아빠의 머릿속에 담겨진 세상은 어디까지 일까. 쓰러지기 전처럼 단골손님들의 옷 자리를 척척 찾아내고, 잔돈 계산을 빠르게 하던 아빠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가족이 함께 웃을 수 있는 다채로운 대화의 기억을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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