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갑작스러운 부재가 내게 던진 숙제
한번도 상상해본 적은 없었다. 아니다. 어쩌면 막연하게 짐작을 해보았을 뿐이다. 예상하던 그의 부재는 내가 더 나이가 들었을 때 다른 세상으로 떠나버린다는 어차피 겪을 수 밖에 없는 당연한 엔딩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를 추억하며 슬픔을 어떻게 감내 해야할까, ‘못해 준 것은 무엇이 있을까. 지금부터라도 화내지 말고, 짜증내지 말아야지’ 라고 언젠간 닥쳐올 그 불행이 좀 더 늦게 오기를 바라며 상상을 마무리 하곤 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부재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 이었다. 같은 세상에서 숨을 쉬고 있지만 퇴근 후 집에서 만날 수 없는 아빠, 여행을 함께 다닐 수 없는 아빠, 가족 외식에 불참하는 아빠. 몇십년 동안 가족의 보호자 역할을 하던 그는 이제 병원에 갇힌 절대적 피보호자가 되어버렸다. 하루아침에. 한 순간에. 급성뇌출혈이라는 병으로 아빠가 없는 우리가족의 특별한 삶은 그렇게 날벼락처럼 날아왔다.
처음에는 불행의 이벤트라고 생각했다. 살아가면서 생길 수 있는 사고 같은 것 말이다. 그러니 치료를 받으면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호전은 되겠지만 결코 예전처럼은 될 수 없다” 라는 의사의 말도 그 의미가 자전거를 타거나 달리기 같은 무리한 운동은 할 수 없는 정도라고 여겼다. 소식을 들은 나는 서둘러 반차를 내어 응급실로 향했고, 엄마는 아빠가 '생사의 갈림길에 있다'라는 소견을 듣고 반쯤 넋이 나가있었으며 코로나 확진으로 형부, 조카들과 격리 중이었던 언니는 수화기 너머로 울기만 했다. 당장 그날 병원에서 받은 충격을 수습하기에도 정신이 없었다. 그러니 그것이 현실이라고는 쉽게 체감 될 리가. 며칠이 지나고, 검사실 앞에서 만난 아빠가 나를 알아보지 못했을 때도 곧 괜찮아 질거라 근거 없는 희망을 가졌더랬다.
아빠가 대학병원에 입원 해 있던 한달. 그 사이에 상황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코로나19로 인해 면회가 자유롭지 못하므로 환자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답답함은 길어졌다. 거기에 눈물 흘릴 여유도 넉넉하지 않았다. 간병인을 구하는 것에서부터 병원으로 물품을 조달하고, 퇴원 후 적합한 재활병원을 찾는 일까지. 그의 병에 관한 모든 것들이 우리 가족의 일상을 장악했다. 뇌는 신의 영역이라고 했던가. 언어장애, 인지장애, 거동장애, 연하장애(먹고, 삼키는 작용)는 결코 쉽게 좋아지는 병이 아니었다. 장애 없이 살아온 날이 훨씬 많았던 아빠에게도, 그런 그를 지켜봐 온 우리에게도 감정소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1년 후에나 걷는다더라, 말하는 데까지 2년이 걸렸 다더라…주변에서 먼저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의 모든 말들이 막연했던 희망을 서서히 갉아먹었다. 이 병에 대해 우리는 무지했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으니까.
아빠의 발병 후 2년이 지났다. 우리집 경제 주체였던 아빠가 강제적으로 일을 접으면서 나는 돈벌이에 더욱 신중해졌다. 강인 해 보였던 엄마는 배우자가 장애인이 되면서 기약 없이 그의 호전만 기다리는 망부석이 되었으니 그녀도 더 이상 나만을 위한 보호자가 될 수 없다. 아빠의 특별한 부재가 내게 남긴 숙제는 복잡하다. 돌봄 가족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환자에게 빼앗기고 종내에는 극단적인 끝에 이른다는 어느 기사들을 보며 나는 내 삶을 어디까지 가족에게 그리고 이 상황에 할애 해야 하는지 매일 고민한다. 나도 행복하고, 우리 가족 모두가 행복한 순간들로 그의 재활을 지켜볼 수는 없을까. 이 기록은 그 바람이 실현되기를 바라며 쓰는 나와 우리 가족의 희망 재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