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고마워
시간은 흘러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슬슬 선선해지려고 하는 9월이 되었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됐고, 저와 아내는 다시 함께 캠퍼스를 거닐며 연애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달에 저희도 '100일'이라는 기념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저는 그때도 유달리 낭만도, 배려도 없었습니다. 그토록 중요한 날이 토요일이었단 이유로 아내를 제가 다니던 성당에 데려와 교리교사 견학을 시켰었죠. 지금의 저도 그때의 제가 무슨 생각을 했던 건지 알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교리교사 활동이 끝나고 저녁이 되어서야 아내와 함께 데이트 장소로 갔으니 이 날 또한 저에게는 엄청난 흑역사인 셈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날은 저와 아내가 서로를 사랑할 이유를 찾은 날이기도 했습니다. 그날 저녁 저희가 향했던 장소는 '선유도공원'이었습니다. 이전 글에서 언급했던 동기 K가 데이트장소로 선유도공원이 괜찮다며 추천한 게 이유였었죠. 해가 다 저문 뒤의 선유도공원에 도착한 저는 나름의 준비랍시고 직접 요리한 도시락을 내밀면서 아내에게 먹어볼 것을 권했습니다. 솔직히 그 도시락을 맛있다고 표현할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아내에게 도시락을 주었을 때 이미 도시락 안의 음식은 다 식어버려서 맛을 제대로 느낄 수도 없는 상태였거든요.
그러나 그날 아내는 제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걸 준비했었습니다. 공원 벤치에 같이 앉아있던 아내는 제게 갑자기 폰으로 뭔가를 검색하도록 시켰습니다. 검색어는 '색소실조증'. 눈, 피부 등에 발생하는 희귀성 유전질환이었습니다. 뜬금없이 의학용어를 검색하라는 아내를 이해할 수 없던 저였지만 일단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리고 인터넷 문서를 봤던 저는 심한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이렇게 심한 병을 내 여자친구가 앓고 있다는 사실을 그날에서야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이어서 자기가 준비한 걸 마저 다 보여줬습니다. 자기가 사실은 뇌전증 환자이고, 한쪽 눈도 없다는 사실을 털어놓은 겁니다. 그리고는 제게 편지 한 장을 보여주는데, 아내가 제게 쓴 편지가 아니었습니다. 12살이었던 아내에게 장모님께서 쓰신 편지였죠. 아내가 12살이던 시절 같은 반 남자 애들 몇몇이 아내의 시각장애를 가지고 '눈깔병신'이라는 소리를 하며 놀려댔었는데, 하루는 참다못한 아내가 수업 도중 소리를 쳤었답니다. 그런데 이걸 장모님께서 아시고는 밤새 고민을 하면서 아내에게 편지를 썼었는데, 그 편지를 제게 보여줬던 것이죠. 편지에는 눈물 자국으로 펜이 번진 부분이 곳곳에 보였습니다.
제가 그 편지를 보고서 아내에게 느낀 감정은 '한없는 미안함'이었습니다. 사실 아내는 여러 장애를 앓고 있는 것과 달리 겉보기에는 아무 이상 없어 보이기 때문에 그걸 몰랐던 저는 아무런 배려도 하질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내는 누구보다 많은 배려가 필요했던 것이었기에 너무 미안했었죠. 그리고 그제야 이전에 아내가 했던 말이 이해가 됐습니다. 처음 고백했던 날 왜 같이 사귀면 많이 힘들 거라고 했던 건지, 왜 이전에 나한테 갑자기 '의안'이라는 용어를 검색하게 했었는지, 그때가 돼서야 그 이유를 깨달은 것이죠. 그 미안함 때문에 저는 그곳에서 하염없이 울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아내에게 여러 번 미안하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반응을 봤던 아내는 사실 많이 당황했었다고 합니다. 아내는 사실 100일 날 제게 사실대로 다 털어놓은 다음 앞으로도 같이 사귀기는 어려울 듯하니 헤어지자고 말할 생각이었거든요. 그리고 자기가 아프다는 사실을 말하고서 울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답니다. 그런데 제가 펑펑 우는 모습을 보고서 자기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펼쳐진 것에 당황했던 것이죠. 그러면서 '아, 얘가 내가 갖고 있는 장애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는구나'라고 속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아, 내가 얘를 계속 만나도 괜찮겠구나
그렇게 저희의 첫 번째 기념일이었던 100일에, 저희는 서로를 계속 사랑할 이유를 찾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아내를 배려하지 못했던 미안함과 책임감 때문에, 아내는 자신의 장애에 대한 제 마음 때문에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