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의외의 가까운 사람들

외국생활 초보백서 1-4

by 정하서


언제 고향을 떠났다는 걸 느껴요?




인자한 주름으로 한가득 웃음을 짓던 할머니가 계약서 한 장을 내밀었어요. 지난 룸렌트를 거치며 계약서의 중요성을 깨달은 참이니 옳다구나 받아 들었죠. 모든 구절은 아니지만 몇 가지가 기억나요.


- 외부인을 데려오지 않는다. 타당한 이유가 있을 시 하루 숙박비 $10을 지불한다.

- 지하 1층에 위치한 부엌 만을 사용한다.

- 입주 시 첫 달 렌트비와 함께 마지막달 렌트비 또한 디파짓으로 지불한다.

- 여권 사본을 제출하고 퇴실 날 돌려받는다.


1층에 위치했던 제 방은 큰 방에다 판자를 대고 세 개로 나눈 한 칸이었어요. 싱글 침대와 작은 책상, 의자, 옷장 그리고 미니 냉장고가 있었죠. 1층에도 부엌은 있었지만 주인집 부엌이라 요리를 하려면 지하 1층으로 내려가야 했어요. 필요 식용품을 옮기는 용도로 쓰라며 파란 플라스틱 박스도 하나 건네받았죠.


할머니는 60세 주부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물어볼 게 있으면 언제든 자신을 찾으라고 했어요. 한 달에 한 번씩 다 같이 벤을 타고 코스트코를 간다고도 했죠. 느낌이 좋았어요.


사실 이곳의 위치는 딱히 제게 좋은 편은 아니었어요. 지하철을 두 번이나 타야 학원으로 갈 수 있었고 주변에 카페나 식당이 있는 것도 아닌 딱 거주지였거든요. 그곳을 선택한 이유는 하나였어요. 그 당시에 만나던 전남자친구의 애원. 걔가 바로 두 역이 떨어진 누나 집에서 살고 있었거든요.


어느 날, 이혼을 하지 못해 산다던 그 누나 집의 공기가 너무 냉랭하다며, 그 애는 내게 어려운 부탁을 해왔어요. 하룻밤만 재워달라. 10불을 내고 솔직하게 말하면 되지 않느냐. 내 등 뒤에서 조용히 웃고만 있는 그 애를 위해 사실과 거짓말을 조금 보태어 주인 할머니에게 허락을 받고 돈을 지불했죠. 불행히도, 그 애의 막무가내는 처음만 어려웠어요.


어느 날, 기분 좋게 친구들과 술을 된통 마시고 버스를 탔어요. 구토가 올라온다는 그 애는 제가 내려야 하는 정류장에서 따라 내렸죠. 집에 들어가 잠깐 잠만 자고 바로 나가겠다며 소리를 질러댔어요. 차가운 겨울비가 그친 새벽 3시예요. 이러다 모두를 깨워 오해를 받진 않을까 결국 걔의 입을 틀어막고 방으로 들이고 말았죠. 제발 아무 소리도 내지 말고 한 시간만 있다 가라고. 제발. 제발. 샤워를 마치고 돌아오니 깜깜한 방 안엔 아무도 없었어요. 갔나 싶던 순간 방문이 열리고 걔가 들어왔죠. 눈이 댕그래진 날 향해 그 애는 사색이 된 얼굴로 속삭였어요.


구토끼가 올라와 정문을 열고 나갔더니 여러 명이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더라고, 눈을 마주쳐 이리로 도망 왔노라고.


숨소리도 없이 고요해진 방은 금방 주인 할머니가 부르는 내 이름과 노크 소리가 연달아 울렸어요. 문이 열리고 컴컴히 꺼져있던 진실이 망설임 없이 눌린 스위치 한 번에 모두 밝혀졌어요.


내가 한국에 아는 사람이 사이버 수사대에서 일을 한다. 네 여권사본으로 부모 직업이나 주소 알아내는 건 일도 아니다. 몸을 이렇게 굴리고 다니는 것, 네 부모도 알고 있느냐.


억겁 같던 긴 시간이 지나고 방에 혼자 남겨지자마자 집을 뛰쳐나왔어요. 새벽 4시쯤이었겠죠. 얇은 판자 너머의 학생들이 날 비웃는 소리가 뒤를 따라왔어요.




그 당시에 저는 대학교 입학 원서에 필요한 언어 과정을 이수하고 있었어요. 새로 옮겨간 학원은 훨씬 작고 교실도 몇 없는 곳이었죠. 이전의 대형 학원과 달리 친해진 선생님도 있었어요.


메슥거리는 속을 감춘 채 모든 수업이 끝나고, 갈 곳이 있지만 갈 수 없었던 저는 집 계약과 관련해 도움을 청할 수 있다고 나와있는 여러 곳에 전화를 걸고 방문했어요. 하지만 미성년자도 아니었던 제게 돌아온 대답은, 변호사를 찾아가는 게 좋겠다. 똑같은 한마디였죠.


조용한 학원 한편에서 몰래 울고 있던 절 찾아낸 사람은 바로 당시의 담당 선생님이었어요. 복잡한 자초지종을 온갖 단어로 조합됐을 뿐인 영어 문장으로 다 알아듣고서 날 꽉 껴안아 주었죠. 심지어 당신의 집에서 오늘 밤을 보내겠느냐 물었어요.


매일 아침 눈이 부어 오는 내가 도시락 통에 흰쌀밥만 이틀 연속으로 싸 오자 같이 학원을 다니던 두 한국인 언니가 망설임 없이 내 도시락 통을 끌어당겼어요.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매일 같은 말을 했죠. 이 김 좀 같이 먹어봐라. 반찬 좀 팍팍 집어 먹어라. 내일 먹고 싶은 건 없니?


약 2주 동안 오후 4시에 학원이 끝나면 그때부터 염치없는 메시지를 여러 군데 보냈어요. 혹시 오늘 날 재워 줄 수 있어? 한 고마운 언니는 저녁 11시가 되면 주인이 잠에 드니 얼른 그때 들어가 자고 주인이 일어나기 전에 나가게 해 주었어요. 이미 언질을 해 뒀고 외부인이 금지된 곳도 아니었으나 며칠을 머물러야 하니 괜한 눈치를 보지 말라고 배려해 준 거였죠. 오전 7시쯤 일어나 조용히 씻고 언니가 주는 흰쌀밥을 담아 학원으로 향하는 매일을 보냈어요.


그렇게 4군데의 집을 전전하며 약 3주를 살았어요. 새로운 방을 구하고 있었지만 저는 돈이 모자랐거든요. 찾기가 쉽지 않았어요. 주인 할머니와 문자로 나눈 대화에서 나가라는 말에 3일 내로 방을 비워주겠다고 이야기를 끝냈지만 미리 지불했던 마지막 달 방값과 살지 않고 나갈 이번 달 차액을 돌려주지 않았거든요. 내 머리맡으로, 아프도록 밝은 빛이 쏟아졌던 그 새벽에. 무릎을 꿇었던 날 일으킨 할머니는 첫날 작성했던 계약서를 가져와 부르는 대로 받아쓰라 명령했어요. 미리 지불된 (흐릿한 기억상) 700-800불을 돌려받지 않겠습니다.


이 쯤에, 집을 구하던 제 옆에서 매일 핸드폰 게임이나 들여다보며 11시까지 못 버티겠다고 집으로 훌쩍 가 버리던 그 남자애가 제주도로 돌아갔어요. 시차가 다르다, 일 시간이 안 맞다, 밥을 먹어야 한다, 친구를 만나야 한다. 셀 수 없는 이유들로 연락이 드물어져 갔죠. 정말 아팠거든요. 그 외면이 너무 아팠어요.


그런데요, 아까 말했던 영어 학원의 언니들이요. 이제는 고기도 싸가고 김도 싸가는 내 도시락을 여전히 조용하게 끌어 당기며 내 입에 반찬 하나가 더 들어가는지 봐 주었어요. 자세한 사정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들 돈 아껴 사는 외국인 신분이면서 나 하나 더 챙기는 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그랬을까요. 그럴 수 있었을까요.


대학 이수 점수를 달성하고 졸업 증서를 받던 날. 담당 선생님이 조용히 다가와 물었어요. 요즘은 괜찮아? 잘 자니?


마침내 세 번째로 만난 새로운 방의 주인 분은 7일이나 먼저 들어가야 하는 제 사정을 모두 이해하고 정식 입주일 전까지 빈 침대에서 잘 수 있게 해 주었어요. 마주칠 때마다 크게 가깝지도 그렇다고 무심하지도 않은 정도로 웃어 주셨어요. 집주인이라는 존재가 무서웠던 내 작은 손을 꽉 잡아 주었죠. 집이 좋은 것도 아니었고 온몸이 덜덜 떨릴 만큼 외풍이 심해 옷과 목도리, 양말까지 껴 입고 신어야 했지만 마음이 따뜻했어요.




한국인을 만나면 영어를 배울 수 없다. 외국에선 한국인을 가장 조심해야 한다. 돈 주고 다니는 학원은 당신의 게으름을 돌봐주지 않는다. 책임 소재를 따져야 하는 계약에서는 제 밥그릇만 잘 챙겨야 한다. 다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그 속에서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작은 연민이 있었고 작은 애정이 있었어요. 나의 긴 해외생활을 돌아보니, 힘들었다 말할 순간이 4분의 3을 넘긴다 할지라도, 결국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작음들이 아주 차곡히 쌓여 있었어요.


첫 번째 파트인 외국생활 초보백서를 내 입 밖으로 꺼내기까지 정말 긴 시간이 걸렸어요. 하지만 결국에 털어낼 수 있게 된 건 나를 토닥여주었던 많은 사람들 덕분이에요. 안으로 밖으로 그저 "나"를 안쓰럽게 보아준 사람들, 보듬어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해외살이도 결국에는 흘러가고 또 흘러간답니다.




[첫 장. 외국생활 초보백서] 완료!

1-1 홈스테이와 룸렌트

1-2 당신은 어학원에 돈을 갖다 바쳤다

1-3 영어를 빨리 배운다고? 제일 조심해야 하는 게 바로 연애!

1-4 당신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의외의 가까운 사람들


두 번째 장. 캐나다 학생비자로 미대에서 살아남기

2-1 한국어는 생명줄이야

2-2 Your Work is Disgusting

2-3 배움에 인종차별이 없다고? 아닐걸

2-4 나대고 깔짝대고 손을 번쩍 들어라


세 번째 장. 한국 출신이 외국에서 제일 잘났어

3-1 내 영어 인터뷰 속 문법은 다 틀렸다

3-2 MBTI요? 당신은 이제부터 그냥 E인 거예요

3-3 동료에겐 쉽게 회사에겐 어렵게

보너스 - 택스리펀을 이해하면 매해 200만원이 돌아온다


네 번째 장. 그래서 나의 고향을 되찾았을까요?

4-1 내 웨딩플래너는 보이스톡

4-2 웨딩 리셉션에서 제일 만취하는 사람은 바로

4-3 외국에 사는 나의 부모님

4-3 따뜻해진 토론토의 날씨 속에서 마무리하는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