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흑백 요리사'를 며칠 전 이틀에 걸쳐 다 보았다. 물론 12회분을 이틀 만에 보느라 좀비의 몰골이 되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스케일과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긴장감, 한 가지 재료로 음식이 아트(art)가 될 수 있다는 감탄, 하나의 요리에도 저마다의 스토리가 있다는 연출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내가 재미있게 본 포인트는 이 프로그램이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떤 감정을 노리는 건지를 슬쩍 엿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백수저와 흑수저로 사람들 사이에 계급을 나누어 백수저에 포함된 사람들은 묘한 우월감(너희들은 아직 나한테 안돼)을 가지게 만들고, 흑수저에 포함된 사람들은 계급상승 욕구(항상 따라가고 싶다고 여겼던 사람을 눈앞에서 봤을 때 감격스러워하고 행복해하면서도 막상 그들과 경쟁을 하게 되면 '내가 너 밟고 반드시 위로 올라간다'라는 이기고 싶어 하는 인간의 승부욕과 그 안의 욕망, 본성)를 건드렸다.
덕분에 보는 시청자들은 자기가 응원하는 사람(요리사)이 대결에서 이기면 꼭 그 사람이 '나'인 것처럼 환희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물론 대결에서 패했을 때의 아쉬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출연자들 중에 한식을 다루는 세 분(이모카세 1호, 급식대가, 한식대첩 우승자 영숙 세프님)에게 특히나 애정이 갔던 것 같다. 화려한 테크닉이나 기교 없이도 정갈한 음식을 만들어 내고 그 안에 담긴 따뜻함이 화면 너머로 전달되어서 인지 보면서 몇 번이나 울컥하는 감정을 추슬러야 했다.
흑백 요리사를 보면서 요리에 대해서 다시 한번 느낀 게 있다면 모든 요리는 그 요리에 맞는 본재료가 있고 그 재료에 충실해야 된다는 것이다. 욕심을 내서 이것저것 넣다 보면 만들려는 음식이 방향을 잃기 쉽다는 점이다. 또한 음식의 '간'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전채 요리든, 메인이든, 디저트든 간이 맞아야 한다. 너무 싱겁지도 너무 짜지도 너무 달지도 않아야 하는데 결국 간이 맞아야 그 재료의 장점이 부각되기 때문이다.
번외로 한때 유기농 식단의 식당이 유행이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의 유행인 것처럼 흘러지나 갔다. 왜일까? 어쩌면 외식 시장의 한 흐름이었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 원인을 음식의 '간'에 있다고 본다. 유기농 식단의 음식들을 먹어보면 대체로 간이 싱겁다. 그런데 싱거운 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싱거운 음식이 몸(건강)에 좋아서 먹을 수는 있어도 맛있다고 먹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유기농 재료들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잘 팔리지만 유기농 식단의 식당이 끝까지 유지되기 힘들었던 것은 그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내 생각이다.
'흑백 요리사'를 보면서 느낀 점 두 번째는 요리와 글쓰기의 공통점이다.
둘 다 요리와 글쓰기가 매개체가 되어 타인과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 그릇의 음식을 먹고 누군가는 명치끝까지 뜨끈해져 오는 뭉클함을 느낄 수도 있고, 한 편의 글을 읽고 누군가는 자신의 가슴 한켠의 아픔이나 그리움, 슬픔을 떠올리며 위로를 받기도 한다. 매개체만 다를 뿐 타인과 공감하고 그 공감을 바탕으로 앞으로 더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느꼈다.
또 둘 다 체력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결국 그 체력의 근간은 멘탈이고 멘탈을 유지하게 하는 힘은 평상시의 꾸준함인 것 같다. 끝장 토론을 방불케 하는 지옥으로 가는 요리에서는 요리가 얼마나 체력을 요구하는지를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비단 재료를 씻고 썰고 볶고 튀기고 굽는 행위만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창의력의 끝을 경험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창의력이 힘을 발휘하려면 정신적으로 얼마나 단단해야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지, 그 흔들림 없는 실력이 나오려면 평상시에 얼마나 꾸준히 자신의 일에 집중했는가 인 것 같다.
글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보기에는 움직이면서 쓰는 게 아니라 가만히 앉아서 하다 보니 굉장히 정적으로 보이지만 결코 정적이지 않으며 어마어마한 중노동에 가깝다. 쓰는 동안 내 안의 모든 에너지를 한곳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의 실타래를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며 글을 쓰고 또 쓰게 하는 건 결국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써오던 사람이 또 쓸 수 있다. 이건 사실 요리도 글쓰기도 해 본 사람만 알 것이다. 얼마나 많은 체력을 요구하는지를... 물론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겠지만 말이다.
'흑백요리사'를 보면서 느낀 점 세 번째는 요리와 인생의 공통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출연자 중에서 '애드워드 리'님이 인상적이었는데 요리를 잘해서라기보다(잘하시는 건 이미 다 알고 있는 상황이니까) 그분이 요리를 대하는 태도였다. 요리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그분이 인생을 대하는 태도를 보았다. 미국에 살면서도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으려는 모습, 오랜 미국 생활로 겉모습은 반은 외국인 같고, 언어도 영어와 어설픈 한국어를 섞어 쓰지만 가슴속 뜨거운 그 무언가는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 내가 누구인지를 끝없이 찾고 고민하는 모습에서 내가 나를 잘 아는 것이 살아가는데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또 그분이 경연 중에 하신 말 중에 만든 음식을 가지고 심사받으러 가는 그 길이 너무 멀게만 느껴져 되돌아가고 싶기도 했다고. 그런데 한 발짝 앞으로 걸어 나왔으면 계속 가야 하지 되돌아갈 수 없다고 했다.
우리 인생도 그렇다.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났으면 살아가는 일만 남는 것이다. 내가 한 행동들 때문에 후회되거나 되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수 없이 많을 수 있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는 결코 어제로 돌아갈 수 없다. 그게 인생이다.
흑백 요리사에 나온 100인 모두 각자의 레시피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요리를 나만의 레시피를 이용해 만드는 것. 나만이 만들 수 있는 요리를 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레시피 위에 나만이 할 수 있는 나만의 레시피를 가지고 나만의 요리를 할 것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레시피를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