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험가 김현국의 트랜스 시베리아
1996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시베리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시베리아를 횡단하기 위한
2대의 모터사이클은
이미 극동의 한 도시인
하바롭스크 공항세관에 도착해 있었다.
20대 학창 시절을
여행을 통해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고서
시도해 보는
새로운 길에 대한 첫 도전이었다.
졸업 후 조급하게 이루어지는
'취직'이라는 일방적 선택에 대한
반감도 함께했다.
시베리아를 횡단하는데
많지 않았다(거의 없었다)
'춥다'라는
고정관념으로
전혀 바라보려고 하지 않던 곳이었다.
서울을 20여 번 넘게 다녀와서야
횡단에는 아직도 부적절한
비자를 하나 얻을 수 있었다.
6개 월 여의 준비기간 동안,
연필로 끄적거리듯
시작한 시베리아 횡단계획서를
여러분들의 애정 어린 지도를 받아
형태를 만들고,
기업체를 찾아 설명회를 하고,
비용을 만들고,
2대의 모터사이클을 싣기 위해
보다 큰 기종의 비행기로 바꾸고,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녔지만
부족한 것들이
얼마나 더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막연하기만 했다.
겨우 몇 마디의 러시아어를
입술로 반복하면서
모든 것을 안고
도착한 시베리아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많은 벽들이 나를 가로막고 있었다.
인도나 티베트. 네팔. 중국. 중앙아시아. 터어키. 일본 등을
여행하면서
국경문제로
남북분단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바라보게 되었던 시베리아!
곧바로
관련 자료들을 찾아
1890년 안톤 체호프의 시베리아 여행과
러시아에 살고 있는
고려인의 역사와
시베리아 원주민들에 대해 정리를 할 수 있었다
1995년, 여름 방학 동안
동토의 땅인 시베리아를
처음 경험할 수 있었다.
고려인들의 이주 경로를 따라 이동하는 여행이었는데
출발지인 하바롭스크에서
“디마”라는
친구를 알게 되었다.
건축학을 전공하고
지역방송국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맡고 있는 젊은이였다.
화가이면서
종이접기 선생님이었으며
연극과 요가 등,
다방면에서 삶의 질을 위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어가 전혀 되질 않아
짧은 영어로 대화가 이루어졌지만
그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었다.
물론
지금은 한 가족의 훌륭한 가장이 되었고
깨어있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재능을 이웃과 나누고 있다.
냉전시대에 지구 절반의 리더로서
80년을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의 표준형 교육 프로그램을 받고
자란 지식인이지만
사회주의를 포기한 러시아는
많은 것이 혼돈이었다.
사회주의의 사회보장이
허물어지면서
불과 100달러 안팎의 월급을 받는
사회의 지식인들은
일과가 끝나면
시장에서 꽃을 파는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이인 “디마”의 미래관은 어떠했겠는가?
나름대로 생활의 중심을 잡아
여러 가지 면에서
재능을 잘 활용하고 있었지만
현실 생활에서 오는 불편과
어려움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그 불만은
정열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부럽게 바라보았다.
석 달 동안,
계획을 세우고
뜨거운 햇볕 속을 뛰어다닌
결과로 얻어진 티켓 한 장과
부족하기만 한
여행경비를 들고 온
나를 설명했지만
그의 눈에는 내가 여유 있는
외국의 여행자일 뿐이었다.
그와 함께
현재의 불만족스럽기만 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렇게 그와 헤어지고
안톤 체호프의 시베리아 여행을
모델로 시베리아 모터사이클
횡단계획서를 만들어
6개월여의 노력 뒤인,
96년
모터사이클 2대를 비행기에 싣고 만나러 왔다.
물론
그와 함께 시베리아를 횡단하기 위해서였다.
불만족스러운 서로의 환경을
불평만 하기보다는
무엇인가 노력에 의해
서로의 길을 만들어 보자는
마음으로 그를 만났고
다음날부터
모터사이클 횡단과 관련한 일들을
같이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관으로부터
모터사이클을 찾기 위한
많은 비용과 서류.
그리고
여행허가에 관련된
어렵고 많은 벽들이
우리 앞에 서 있었다.
무엇보다
장남인 “디마”에 대한
그의 어머니의 염려도
크게 부담이 되었다.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대륙을 가로지르는
모터사이클 여행은
국민인 러시아인에게도
생명의 위험을 느낄만한 것들이
많았던 것이다.
허가와 관련한
담당부서는 무척 위험하다는 이유로
서류를 계속해서 반송시켰고
나를 도와주고 싶었던 “디마”는 자주 화를 내었다.
여행을 하겠다는데
왜 그러느냐고!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
한 달 동안,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결론은 이러했다.
"외국인에게
모터사이클 여행에 따른
위험요소가 너무 많으므로
무장한 러시아 군인을 한 명 대동시키고
그에게 숙식과 월급을 제공할 것".
나는 끝까지 지마와
여행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보며
지쳐갔다.
여행기간이 늘어나
현재의 비자로는
모스크바까지 갈 수 없어
보완할 수 있는
비자를
다시 준비하기 위해
잠시 귀국을 하면서
디마와 헤어지게 되었다.
그동안에
그는 모터사이클 운전면허증을 만들어 놓겠다고 말했지만
다시 돌아와 보니 사라졌다.
그의 집을 찾아가 봤지만
그가 있는 곳을 알 수 없었다.
어머니의 걱정과
자신이 내게 짐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잠시 비켜난 것이다.
결국
고려인 안드레이 그레고리비치 윤선생님의
삶의 지혜에서 오는 귀중한 도움을 받아
수용소에서 14년을 지내다가 나온
“갠나지”라는 할아버지와 함께
초기 적응 구간을
동행하기로 하고
시베리아를 횡단해
10월 초에 모스크바에 도착하게 된다.
물론 매일이 고민거리였고
어려운 상황이었다.
- 100가지 중 99가지가 부작용이었다.
이 여행 이후
나는 새로운 길을 위해
도전하는 일을 포기하고
모두가 선택하는 길을 따라가는
조용한 소시민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탐험가라는 직업을 내려놓았다.
이후
나는 지구 유통라인의
한 축의 중심지가
된 모스크바에서
유학을 목표로 하는 평범한 생활인이 되었다.
학비와 생활비를 만들기 위해
아침 여섯 시부터
밤 열한 시까지
그리고 새벽 한 시까지
부지런히 걸어 다니고 공부했다.
어느 날
숙소가 있는
대학 기숙사의
긴 복도를 걸어 들어와
하루를 정리하다
삐거덕거리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맑은 푸른 하늘, 제법 싸늘한 바람.
온갖 색깔을 입고 있는 숲의 바다..,
이르쿠츠크에서
바이칼호수를 가기 위해
44 고개를
모터사이클로 넘어가면서
언덕의 정상에 오를 때마다
매 번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나를 감동케 했던 타이가림.
그리고 바이칼 호수.
갠나지와 타냐네 가족과
함께하던 휴식..,
하나의 기억이 99개의 상처들을 안아버리는 순간이다.
99년,
나는 새로운 탐험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짐을 꾸렸다..,
결국 소시민으로서의
모스크바에서의 생활은
시베리아에서의 상처들을
치유하는 시간 되었으며
탐험가로서
나의 색깔을 찾는데 도움이 되었다.
현재는
"변화에의 도전"이라는
캐치플레이로
현대적 의미를 부여한
지구의 대동맥들을 따라
이동하면서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변화"를 촉구하는 일을
탐험 프로젝트로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