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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세이 천사 Aug 09. 2023

결혼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결혼은 왜 했나요?

당신은

 왜?

 하필, 나랑 결혼했나요?

남편에게 물었다.

막연한 질문인가 싶어

객관식으로 나열해 주었다.

하나,

그때는 좋았으니까?"

둘,

 예뻐서? 갖고 싶었으니까?

셋,

 하고 싶을 때마다

쉽게 할 수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다들 결혼하니까?

생각보다 쉽다는 표정으로 남편이 말했다.

"그때는 사랑했으니까."

그의 사랑은 참소주였다.

 혼미한 취중이라

술김에 결혼한 것처럼 말했으니.

깨고 나면 숙취만 남아

머리 아픈 결혼생활이 되었다는 투다.



우리의 결혼은

무엇이 잘 못 된 걸까?

결혼생활이란 것이

왜 이리 복잡하고 지루한 건지.

딱 한마디로 규정되는

결론도 없이 이어지는지.

모래성 속에 사는 것처럼

헛헛하기만 한지.

결혼한 후론 웃음조차

백화점에 가서 사야 될 상황이

되고 말았다.

결혼하고 나니 남편의 여자는

언제나 창밖의 여자였다.

속된 말로 남자에게 마누라는 가족이지

여성이 아니라는 말이

누가 말했는지 정답이다 싶었다.

헤어스타일이 변해도

옷차림이 달라져도 남편은

그 모습이 그 모습이구나 눈치였다.

결혼하고 나니 남편에게 아내는

여성이 아니라 마누라라는

구닥다리 성별이 되어 있었다.


창밖에는

햇살이 반짝이고

동백잎은 파랗고 견고했다.

쉽게 접히지 않을 푸른빛이라

 서늘하기만 했다.

푸른 표정 속에서 피어 난

동백꽃은 붉었다.

겨울을 삼킨 이른 봄의 혈맥이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

동백을 바라보며 기도하던

순정의 시간이 결혼생활을

겨우 이어나가고 있는 시점이었다.


원인도 모르는

부부싸움 해결책은 그냥

없었던 일로 넘어가는 식이었다.

서로 백기를 내밀지 않는

팽팽한 전투였으나

아무런 득실도 없었다.

그러면서 체념을 달래듯

우리의 부부싸움도 곪아 터지다

 진액으로 고이면 꽃이 될 것이라 믿었다.

그래야만 살 수 있다고

굳게 다짐했기 때문이었다.

부부사이란 것이

연애처럼 추억이었노라며

삭제할 수 있는  문장이 아니었으므로.

오래된 옷이라고

헌 옷수거함에 던져버릴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혼은

사랑이라는 말이

얼마나 추상적이며 비 현실적인지를

알게 하는 특효약인지도 모른다.

더 나은 삶을 위한 투자항목으론

심히 고심해야 했어야 했다.

그만큼 우리의 결혼은 무작정

불꽃 속으로 뛰어든 불나비의

모험이었음을 알게 했다.

살아갈수록 고갈되는

감정이라는 잔고는 거의 깡통 수준이었다.

하지만 손절할 수 없는 특이한 항목이

결혼이란 것이었다.


에로스는

결혼이 던진 달콤한

미끼 같은 것일까?

결혼까지 약속하게 된

우리의 사랑도

운명의 장난으로 시작되는

 에로스였기 때문이다.

프시케에게 홀린

에로스의 실수로 닿은

큐피터의 화살이었던 셈이다.

기분 나쁠 때 떠 올리면

실수로 시작된 것이었다.

신화는 인간의 현실을

아름답게 묘사했으나, 그 속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게 한다.


어찌 되었든 우여곡절 끝에

에로스와 결혼한 프시케도

고생 많았다.

고상하게 말하자면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는

진통을 겪어야 했다는 이야기가

남의 불행인양 위로가 되었으니까.


우리의 결혼도

애벌레가 나비로 탈바꿈되는

과정에 있는지도 모른다.

 부부 싸움을 하고 나면

굼벵이처럼 느릿느릿하게

기어 다니는 불쾌한 감정들이

벗어던진 허물로 가슴에 쌓인다.

그 속에서 스믈스믈거리며

마음의 혈관을 괴롭히는 포기와 체념들.

그 때문에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은

울분의 파도에 휩싸여

애증의 관계가 되기도 한다.

전생의 원수란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연민을

배우게 하는 것이

결혼이다.


그와 나는 진정

사랑 때문에 결혼했을까?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 사이가 결혼할 만큼이었나?

되짚어 보게 된다.

몰라서 경솔했다면 늦기 전에

덮어야 하는 책처럼

결혼이라는 내용을 비로소

탐구하게 되는 시점이 온 것이다.


솔직하자면

서로를 필요로 했기에

결혼반지로 묶어 두기로 약속한 것이다.

혼자 버티기 힘겨운 세상살이

아름다운 생존을 위해서

결혼한 것이다.

가까이서 바라만 보다

합쳐진 나무였던 셈이다.

하나의 둥치가 잘려도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결혼의 생명력인지도 모른다.

한쪽이 부실해도

엉켜서 산 세월로 인해  견디는 것이다.

에로틱한 결혼의 환상도 부부사이가 되면

권태로운 일상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혼은 이상스럽게도

생명력이 강하다.

서로의 이기심이라는 가지를

잘라내면서 뿌리가 깊어지는

나무의 속성을 닮아 있다고 할까.

더구나, 열매를 맺기까지

삭풍과 서리를 견뎌야 하는 것이

결혼이다.


결혼은

에로스만으론

달걀 위를 걷는 것과 같다.

부부관계는 말 그대로

괴로우나 아플 때도 포기할 수 없는

순전한 신념이 있어야 유지될 수 있는

특별한 관계다.

위기를 만나면 목숨 걸고

서로를 지키는 유일한 관계로

발전되지 않는다면

적과의 불안한 동침일 뿐이다.

남편과 아내는

가정이라는 기업의 협력자가 되어야 한다.

아내의 눈물이 남편의 고통이

되어야만

운명의 끈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의 결혼은

에로스라는 성적욕망의 잔에

프라그마(pragma)가

  첨가되어 있다.

조건을 퍼즐로 맞춰 보는

현실적이면서 이기적인 사랑이다.

결혼이 이혼으로

변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살다 보면 서로 다르다는 사실만

눈덩이로 불어나고 조건 또한

욕심만큼 달라져서 불평이 늘어난다.


결국

결혼이 요구하는 사랑은

다이야 몬드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빛이

되어야 하는 것이 결혼이 가진 신성함이다.

때로는

 모래를 삼킨 후에야 영롱해지는

진주가 되길 요구하기도 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결혼할만한 사랑은

적어도 변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에로스라는 열정의 반지에

아가페라는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결혼마차는

비포장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덜컹거리다 서로의 생각이 부딪히고

엉덩이 뼈가 아파올 만큼

함께 가는 길이 불편하기만 하다.

어쩌면 우리는

결혼을 통해 진정한 사랑을

배워야 하는 사랑초등생끼리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사랑해서 결혼했다고

착각한 바보였는지도 모른다.


결혼이 가르쳐 준 것 중

또 하나가 있다.

부부는 제3의 인격체라는 것이다.

너와 내가 하나가 되어 부부로 탄생되는

새로운 인격체라는 의미다.

하지만, 칼릴지브란의 말처럼

지붕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이 되는 것이다.

함께 하면서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버틸 수 있는 관계다.

각자의 개성을 인정하지만

함께 살아야 한다는 이유로

서로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사회생활처럼 부부 생활도

자신의 모습을 발가벗겨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적당한 이미지 관리와 서로를 존중하는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어야

변질되지 않는 관계가 된다.

미혼시절의 나를 그대로 보존할 수

없게 하는 것이 결혼이다.

결혼생활을 통해 결혼에 알맞은

성품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지혜도 필요하다.

결혼의 심장은

가족의 안녕을 위한

거룩한 책임과 의무로 뛰는 것이다.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한

이타적인 삶으로 전환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서 불편한 것이다.

그래서 고집스러운 이기심으로 이어지면

 무미건조한 결혼생활이 되고 만다.


당신은 결혼하고도

새로운

에로스의 환상에 젖어 있는가?

결혼은 에로스의 완성이 아니다.

자신과 자신이 다투다

자신을 사랑하듯이 상대방을 바라보는

아가페로 나아가는 인생수업이다.


결혼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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