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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가는대로 Mar 23. 2023

[멋대로 영화 보기] 컨택트: 언어의 힘

내가 쓰던 말이 나를 만들었고, 내가 쓰는 말이 나를 만든다.

나는 너를 사랑해. 나는 사랑해 너를(I love you). 

한국어는 내가 ‘너’ 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이 먼저 나온다. 영어는 너에게 내가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선행된다. 영화를 관통하는 사피어-워프의 가설은 이런 언어적 차이가 인간의 인지에 주는 영향에 주목한다. ‘너’를 우선시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한국인은 내 감정보다도 상대방의 존재가 선행해야 한다. 나와 네가 있어야 비로소 감정이 발생할 수 있는 사회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관계의 중요성이 높다. 반면 영어권 국가에서는 내가 느끼는 감정이 우선시 되는 언어를 사용한다. 상대방의 존재에 앞서 내가 ‘사랑’을 느낀다는 감정이 발생해야 한다. 개인적인 가치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야 주위 사람을 둘러볼 수 있는 사회인 것이다. 그래서 서구권은 개인주의가 심한 나라라고 일컬어진다.

사피어-워프의 가설은 현재는 언어심리학적으로 크게 지지받는 가설은 아니다. 하지만 그 관점의 흥미로움은 부정할 수 없다. 듣다 보면 꽤 그럴싸하다. 이누이트들은 눈을 표현하는 다양한 어휘가 있기 때문에 다른 인종보다 눈을 더 인식하는 방식이 더 다양하다는 가설은 반박의 여지가 충분 함에도 일말의 수긍할 만한 여지를 준다.

조금 더 나아가 생각해보자면, 단순히 사고에 머무르던 것을 글이든 말이든 언어적으로 표현을 하면 뇌는 언어로 치환된 사고를 시각적 혹은 청각적 자극을 통해 구체화된 정보로 받아들일 수 있다. 머릿속의 개념이 외부의 자극이 되어 다시 뇌에 각인이 되기 때문에 동일한 내용이더라도 우리 뇌가 인지하는 방식에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때때로 복잡하고 이해가 안되던 사건을 글로 정리해보면 명쾌한 해답이 내려지는 경험들이 그 근거로 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구조로 이루어진 언어를 사용하는 화자인가에 따라 언어에 따른 인지 변화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가설에 상당한 설득력조차 느껴진다.


틀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인과는 이미 고정되어 있다

영화로 돌아와 보면 영화에는 과거, 현재, 미래 시점을 동시에 표현하는 문자를 사용하는 외계인이 등장한다. 그들의 문자는 시작과 끝이 정해지지 않은 원형으로 표현된다. 그들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을 이해해 보자면 시간의 흐름이 있는 것이 아닌 운명이라는 큰 틀이 이미 짜여 있고 그 틀 속에서 사건들이 발생하는 시점들이 정해져 있을 뿐이다. 그 시점은 다른 시점보다 선행하지도, 늦지도 않으며, 틀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인과는 이미 고정되어 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인간 언어의 사고가 빚어낸 부산물일 뿐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에서 외계 문자를 연구하던 학자는 과거, 현재, 미래 시점을 동시에 인식하고 경험하게 된다. 언어가 세상에 대한 인식 체계에 영향을 준 것이다. 더 이상 학자는 과거의 사건이 현재를 만들고, 현재의 행동이 미래의 원인이 되는 인간의 방식대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저 이미 정해진 운명의 덩어리 위 모든 시점에 존재하며 관망할 뿐이다. 그녀에게 인간 관점에서의 미래의 사건이 현재 사건의 원인이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단지 이미 정해진 운명의 덩어리 위 고정된 두 시점 간에 인과관계가 발생했을 뿐이다. 


우리는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각기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실제로 언어가 인간 사고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주는지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다중 언어 사용자가 어떤 언어를 쓰는가에 따라 조금씩 다른 성향의 자아를 경험하거나, 반복적인 자기 최면이 실제 수행 능력 향상에 도움을 주는 등 여러 실증적 사례를 보면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사고에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만큼은 마냥 허무맹랑한 취급을 하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어떤 언어로 이 영화를 감상했는가에 따라 받아들이는 감상에도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각기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어를 어떻게 활용하여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긍정적인 말을 쓰면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부정적인 말을 많이 쓰면 부정적이게 된다는 류의 진부한 잔소리도 충분히 귀담아들을 만하다. 하지만 조금 더 나아가 단순 어휘보다 언어의 구조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메신저의 활용이 늘면서 우리는 문장과 문장 간의 연계를 통한 대화보다 파편화된 짧은 문장 언어에 익숙해지고 있다. 더군다나 안 그래도 짧아진 문장에 수많은 줄임말이 더해지고, 여기서도 모자랐는지 초성만을 통해 대화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다. 시대의 흐름을 교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러한 언어 습관의 변화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짚고 넘어가 볼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들어 청년 치매의 증가나 독해력 저하가 도드라지는 청년층의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유기적인 문장 활용률이 저조해지고 단어 위주의 파편적 언어 습관이 늘어난 것이 그 원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외에도 우리의 다양한 언어 습관들은 무의식 중에 우리의 행동과 사고에 영향을 주고 있을 수 있다. 갑자기 바른말 고운 말을 쓰자는 캠페인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말이 가진 힘을 염두에 두고 더 조심스럽게 다룰 필요성을 재고해 보자는 것이다.


나는 2017년 네이버에 해당 영화 평점으로 ‘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잘 짜여진 운명과 패러독스’라는 감상을 남겼다. 당시에는 영화에 몰입한 나머지 인간 언어의 관점에서 평점을 적는 것보다 헵타포드어 관점에서 시간에 따른 인과가 부재한 평점을 남기는 게 더 폼 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영화를 감상하고 나서 나와 비슷한 증상을 겪는 이들이 꽤 있는지 추천도 상당히 받아 상위 리뷰에 올라있다. 당시의 감상이 부끄러워 지우고 싶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시점에서 다시 평점을 남기라면 인간 언어의 관점에서 그들에 대한 평가를 다시 내려보고 싶다. 


내가 쓰던 말이 나를 만들었고, 내가 쓰는 말이 나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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