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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가는대로 Mar 23. 2023

[멋대로 영화 보기] 중경삼림: 사랑에 빠질 준비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들의 사랑 이야기

하나.. 둘.. 셋.. 넷..


일반적으로 사랑에 빠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7초라고 한다. 수 만년 전 선조들은 죽음의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는 야생에서 유전자 정보를 남기기 위해 적절한 번식 상대와의 빠른 신뢰 구축이 필요했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사랑에 빠지는 시간’이 극단적으로 짧았던 적자만이 생존해 우리의 선조가 되었을 공산이 크다. 그렇게 가장 잔혹하고 야만적인 진화 법칙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유전자에 각인되어 가장 낭만적인 본능으로 작용하고 있다. 


다만 유전자에 각인된 첫눈에 반하는 사랑은 인류의 발전과 함께 점차 변화해 갔다. 이제는 다급하게 첫눈에 사랑에 빠질 상대를 찾지 않더라도 생존에 위협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여전히 7초라는 사랑의 법칙은 유효하지만, 사람마다 7초가 카운트되기 이전에 넘어야 할 허들이 무수히 다양해졌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가 길어지고 환경이 복잡해질수록 그 사랑의 허들은 다양해지고 있다. 중경삼림은 낭만적인 사랑을 맞이하는 현대인들의 여러 허들을 비춰주는 렌즈이다. 생존과 번식이 아닌 위로와 자극을 위해 사랑을 택한 이들의 이야기는 낭만을 잃고 지쳐가는 모든 세대에게 지침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중경삼림은 서로 다른 이성에게 사랑에 빠진 두 남녀의 이야기이다. 하지무와 페이는 각각 금발 가발의 여인과 경찰 663에게 사랑에 빠진다. 상대의 이름 따위는 중요치 않다는 듯 네 인물의 작중 비중에 차이가 없음에도 그 둘의 이름은 알 수 없다. 하지무와 페이에게는 상대가 흑발 가발의 여인이든, 단발의 여인이든, 또 경찰 555든 소방관 123이든 아무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그들의 사랑의 허들을 넘어선 금발과 경찰이 그들 앞에 나타났을 뿐이다.


개봉되지 않은 통조림은 개봉된 것보다 유통기한이 길기에


하지무를 사랑에 빠지게 한 것은 결핍이다. 그는 애인으로부터 이별을 통보받은 후 파인애플 통조림으로 자신에게 생긴 결핍을 게걸스럽게 채웠다. 하지무는 단절을 참을 수 없었고, 스스로가 동요 없이 안정적인 상태로 유지되길 바랐다. 그래서 하지무는 참을 수 없는 단절의 순간이면 한 치의 등락도 없이 일관되고, 시작과 끝이 없이 영원한 원형의 트랙을 찾아 끊기지 않는 트랙 위를 질주하였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안정을 추구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본질은 외로움이었다. 외로움은 결핍의 감정이다. 그래서 영원하지 않은 인간의 감정으로는 그 틈을 영원히, 그리고 안정적이게 메울 수 없다. 새로운 인연은 그저 잠시 그 외로움의 틈새를 메워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하지무는 오히려 그렇기에 누구라도 좋으니 지금 당장에 자신의 결핍을 충족시켜 줄 대상만 있으면 괜찮았다. 현재의 결핍을 메워줄, 자신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줄 ‘아무나’를 기다린 하지무는 예정한 대로 금발 가발의 여인에게 사랑에 빠진다. 그는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사랑에 빠졌다. 단지 그 순간 그녀가 거기 나타났기에. 그에게 그녀와 상호 간의 정서적 교류는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그저 한 순간이라도 스스로의 결핍을 망각하게 해 줄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는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녀와의 기억마저 유통기한이 영원하길, 하다 못해 만년이라도 가길 바랐다. 하지만 어쩌면 그녀가 누구인지 끝까지 아무것도 몰랐기에 그녀야 말로 하지무에게 필요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개봉되지 않은 통조림은 개봉된 것보다 유통기한이 길기에.


같은 속도로 돌아가는 서로 마주 보는 쳇바퀴는 서로가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인다


페이를 사랑에 빠지게 한 것은 권태이다. 그녀가 꿈꾸는 것은 넓은 세상으로의 일탈이었다. 그녀의 에너지는 외부의 대상이 아닌 스스로의 변화에 집중돼 있었기에 헌신적인 사랑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단지 그녀의 욕구가 어떻든 여전히 그녀의 일상은 쳇바퀴의 연속일 뿐이었다. 그렇게 쳇바퀴 속에서 그녀는 경찰 663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같은 속도로 돌아가는 서로 마주 보는 쳇바퀴는 서로가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 똑같이 무료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그들은 반복적으로 변화하는 일상에서 서로가 멈춰 있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눈에 띄었을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권태에 지친 페이에게 663이 눈에 밟힌 것과 달리 이별이 오래지 않은 663은 주변에 둘러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페이의 마음에 싹튼 관심의 씨앗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은 663의 전 애인이 남긴 편지 때문이다. 스튜어디스. 페이는 몰래 그의 편지를 펼친 순간 꿈꾸던 넓은 세상으로의 일탈을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자신이 꿈꾸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 그리고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 페이는 663의 전 애인에게 자신을 투영하고 동일시했을 것이다. 상대에 대한 사랑이 아닌 상대를 사랑했던 이에 대한 동경. 페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663의 가장 가까웠던 그녀가 되다. 그렇게 페이도, 663도 서로에게 친숙함을 느꼈으리라. 하지만 663의 전 애인이 그렇게 했기에, 페이 역시 주저 없이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그럼에도 페이는 여전히 663을 사랑했다. 한 곳에 정박하여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갈 663의 단조로움이 이제는 자유로운 일상에 권태를 느끼며 살아갈 그녀에게는 또 다른 일탈이기 때문에.


하지무에게는 자신의 결핍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사람, 페이에게는 자신의 권태로움을 깨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방식이나 의도가 어찌 되었든 그들의 허들을 넘은 금발 가발의 그녀와 663에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물론 극 중 부각되지 않았을 뿐 결핍과 권태 이외에도 무수한 개인적인 크고 작은 허들이 있었을 것이다. 외모든, 재력이든, 목소리든, 태도든 무엇이든 허들이 될 수 있다. 단지 결핍과 권태가 그들의 가장 큰 허들이었을 뿐이다. 허들을 넘어 눈앞에 나타난 상대에게 그들이 사랑에 빠지는 데 걸린 시간은 덧없었다. 



우리의 사랑도 영화 속 그들과 다르지 않다. 많은 이들이 나이가 들수록 사랑에 빠지는 낭만적인 경험은 사라지고 현실적이게 된다고 자조한다. 하지만 여전히 모두가 낭만을 누릴 자격이 있다. 단지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쌓여 감에 따라 앞에 놓인 허들이 더 많아졌을 뿐이다. 그러니 낭만적인 사랑을 포기한 채 낙담하지 말고 다시 기대해 보는 게 어떨까. 어쩌면 지금도 내 앞에 무수히 놓인 이 허들을 차근차근 열심히 뛰어넘으며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을 상대가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런 상대가 당신 앞에 나타난다면 누군가 말해주지 않아도 당신은 알게 될 것이다. 마음속으로 찬찬히 7초만 샌다면.


다섯.. 여섯.. 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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