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편리한 세상이다. 여행지를 찾을 때 키워드 몇 개만 입력하면 추천 여행지가 우수수 쏟아진다. 이번 여행지는 단 하나의 키워드로 선택됐다. 은하수.
청산도는 완도항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남해의 작은 섬이다. 사실 청산도가 국내 은하수 명소 중 손꼽히게 유명한 곳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한참을 스크롤을 내려가며 찾아낸 청산도를 선택한 이유는 슬로시티(slow city), 그리고 서편제라는 흥미로운 키워드가 덧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차를 십여 대는 거뜬히 실은 거대한 배도 청산도 출신은 아니었는지 전혀 슬로(slow) 하지 않게 섬에 도착했다
2022년 8월의 무더운 어느 날 여름휴가를 쓰고 선풍기 바람을 쐬며 멍하니 침대에 붙어 있었어야 할 나는 어찌 된 일인지 완도항에서 선박 시간표를 보고 있었다. 전 날 밤 꿈에서 근사한 은하수라도 봤었던 모양이다. 서울에서 아침 댓바람부터 다섯 시간을 버스를 타고 내려오자마자 선착장으로 뛰어왔더니 배도 고프고 숨도 찼지만 가장 빠른 출항 시간이 10분도 채 안 남아 있었다. 슬로시티라는 키워드에 혹해서 내려왔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일사천리로 티켓을 끊고 배에 올라탔다. 이제 배에 탔으니 여유를 즐겨야지 하는 마음으로 난간에서 바다 바람을 쐬는 것도 잠깐이었다. 이내 선실로 들어가 바닥에 퍼질러져 뻐근한 다리를 주물렀다. 차를 십여 대는 거뜬히 실은 거대한 배도 청산도 출신은 아니었는지 전혀 슬로(slow) 하지 않게 섬에 도착했다.
뙤약볕을 맞으며 섬에 발을 디뎠다. 오랜만의 항해가 여행의 설렘을 심어줬는지 잔뜩 기분이 좋아져서 주위를 둘러봤다. 분명 선실에 앉아 있을 때만 해도 주위에 왁자하게 떠들던 무리가 여럿 있었는데 섬에 발을 디디며 배에서 내려선 건 나를 포함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내리쬐는 햇볕에 눈을 찡그리며 다시 배를 쳐다보니 햇빛을 반사하며 수 십 대의 차량 행렬이 섬으로 상륙하고 있었다. 다시 앞을 보니 그나마 같이 두 다리로 배에서 내린 몇몇도 섬 주민인 듯 여기저기 익숙하게 빠른 걸음을 걸으며 멀어지고 있었다. 차를 타고는 반나절도 안 걸려 한 바퀴를 두를 수 있을 섬을 걸어서 둘러보겠다는 사람이 없다니, 여행의 낭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여행론이라도 설파해주고 싶은 노릇이었다.
그렇게 항구를 벗어나 10분 정도를 걷다 보니 여행론이고 뭐고 아무것도 모르고 섬에 들어온 건 나뿐이구나 하는 부끄러움이 몸을 덥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몸을 덥힌 건 화창한 한 여름 하늘의 태양이었다. 이건 도저히 걸어 다닐 날씨가 아니었다. 나름 걷기 여행 구력이라면 어디서 뒤처지지 않는다 자신했고, 평소에도 걷기라면 자신이 넘쳤는데, 이 날씨에 걷는 건 계산 밖이었다. 더위가 문제가 아니라 이대로면 온몸에 화상을 입을 것 같았다. 얼른 예비용으로 챙긴 수건으로 목 뒷덜미를 감싸고 모자를 눌러썼다. 자외선은 어떻게 차단을 했지만 더위는 배가됐다.
10분간 더위에 짓눌려 항구에서 멀리 못 벗어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이 조그만 섬에는 항구 주변 상가 외에는 듬성듬성 있는 숙박 업소들 외에 이렇다 할 편의 시설이 전무했다. 얼른 항구로 돌아가 재정비를 하는 게 우선이었다. 먼저 수분 보충을 위해 메뉴판에 물냉면이 있는 식당에 들어갔다. 찬 바람을 맞으며 물냉면을 국물까지 싹싹 비운 후에야 좀 제정신이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사장님께서는 이 날씨에 걸을 생각을 한 게 용하다며 요구르트를 한 잔 내어 주셨다. 객기에 대한 보상까지 단숨에 들이마시고서는 낮에 예정했던 일정을 모조리 취소하고 얼른 숙소로 가서 해질 무렵에 다시 나오는 것으로 계획을 바꿨다.
몸에 열이 내리자 판단력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판단력과 함께 객기도 돌아왔다. 1박 2일 일정으로 왔는데 한나절을 통으로 버리기엔 아까우니 항구에서 숙소까지 한 시간 거리는 걸으며 섬을 둘러보고, 잠시 휴식하고 나와서 다른 코스들을 돌아보기로 했다.
섬이라기 보단 바닷가의 작은 시골 마을을 걷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배를 채우고 목표도 하향 조정하고 나니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청산도 여객선 터미널에서 북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지리 청송 해변까지 가는 길은 바다와 완전 맞닿아 있지 않기에 섬이라기 보단 바닷가의 작은 시골 마을을 걷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코로나가 한창이었지만 여기서는 마스크를 내린다고 눈치를 받을 일이 없어 보여 슬쩍 마스크를 내렸다. 쿰쿰한 흙냄새가 코를 타고 새어 들어왔다. 트랙터, 미니 포클레인, 낡은 주택과 널브러진 비닐더미. 섬이라는 공간보다는 시골이라는 공간에서 연상하기 쉬운 무언가들이 내 발걸음과 같은 속도로 등 뒤로 지나쳐갔다.
숙소가 모여 있는 목적지 즈음 다다라서야 바다가 가까운 목 좋은 곳으로 접어들었다. 숙소에 집을 풀고 2층 침대 두 개가 있는 방으로 안내받아 들어갔다. 나 말고는 두 팀이 더 있는 듯했지만, 다른 방에 묵는 듯했다. 보통 이 시기에는 당일로 섬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가는 경우가 많은 듯했다. 정수기 물을 연달아 벌컥벌컥 마시고 방에 들어가 찬물 세수를 하고 에어컨을 켜고 침대에 그대로 엎어졌다.
다음 목적지는 진산 갯돌 해변이었다. 동쪽으로 이동하는 경로였다. 한여름에 땡볕에 혼자 걷겠다고 섬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일출 명소를 일몰 시간이 다 되어서 가다니. 그 와중에 일몰은 또 놓치기 싫어 진산 해변으로 갔다가 다시 일몰을 보기 좋은 숙소 쪽 청송 해변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시간 여유를 두고 태양이 해안선에 너무 가까워지기 전에 짐을 추슬러 밖으로 나섰다.
짐도 가벼워지고 해도 중천에서 조금 내려와 걷기에 조금은 수월했다. 항구에서 청송 해변으로 오는 길에 비해 수목도 우거지고 바다 경치도 좋아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엄지발가락만 한 조그만 게들이 이따금 도로를 건너는 게 눈에 띄었다. 게들도 그늘에 숨어있다가 이제서야 집으로 가려는 차인가 싶었다.
고개를 들면 하늘에도 푸른 길이 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청송 해변에서 진산 해변으로 가는 길은 청산도 슬로길 9코스라고 이름 붙어 있었다. 길을 가다 보면 슬로길 코스별 인증 도장을 찍을 수 있도록 도장함이 있었는데 어느 곳은 도장이 들어있고, 어느 곳은 텅 비어 있었다. 9코스를 따라 걷다 보면 끝자락에서 단풍길을 마주친다. 한여름이라 단풍으로 물들어 있진 않지만 처음으로 가로수가 도로에 그늘을 드리운 길을 마주하게 되는 지점이라 감동이 있었다. 아스팔트 길 양 옆으로 빼곡하게 늘어선 단풍나무들로 인해 고개를 들면 하늘에도 푸른 길이 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루종일 얄궂던 해를 떠나보내려니 또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단풍길을 지나 이제는 제법 선선해진 길을 터덜터덜 걷다 보니 진산 갯돌 해변에 도착했다. 일출을 보러 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감상을 하며 해가 어디쯤 갔나 돌아보니 톡 치면 해안선에 통 튕길 정도로 많이 기울어 있었다. 괜스레 마음이 조급해져서 지나왔던 슬로길을 힘차게 내디뎠다.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갈 생각이었기에 오는 길에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덕분에 나름 새로운 경치를 보는 기분으로 기분 좋게 걸을 수 있었다. 국화리라는 이름이 붙은 작고 아기자기한 마을 옆을 지날 때쯤 바닷가에 노을이 번지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얄궂던 해를 떠나보내려니 또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해가 해안선 너머로 넘어가고도 한 동안은 붉은 잔상이 밤길을 밝혀 주었다. 다시 청송해변으로 도착해 숙소로 돌아오자 하늘의 조명은 꺼지고 밤이 시작되어 있었다. 짐을 풀고 씻고 나와 가볍게 요기를 하고 밤하늘을 보러 해안가로 나갔다. 펜션의 사장님이 옆 방의 손님과 함께 나와 하늘을 보고 있었다. 이 쪽이 명당이라며 옆으로 와 하늘을 보라는 사장님 손짓에 냉큼 근처로 가 자리를 잡았다.
캄캄한 해안가에서 파도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하늘을 들여다봤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밤하늘이 한참을 쳐다보자 그제야 낯이 좀 익었는지 감추고 있던 별들을 하나 둘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삽시간에 밤하늘이 별로 뒤덮였다. 당최 눈이 안 좋은지라 사진으로 보던 것처럼 진한 은하수는 못 보았지만 저게 은하수구나 싶은 별 뭉치가 언뜻언뜻 보였다. 별이 가득 찬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니 하늘로 뚝 떨어져 깊은 우주에 빠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맵시 좋은 바다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전날 호되게 당한 게 있어 다음날은 새벽부터 일어나 서편제 촬영지를 찾아갔다. 서편제는 영화와 뮤지컬로 모두 보았는데 아무래도 영화에서의 먹먹한 감각이 내 취향에는 더 맞았다. 특히 진도 아리랑을 부르며 길을 걸어오는 장면은 지금도 종종 찾아볼 정도로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었다. 한참을 오르막을 올라서야 서편제 촬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영화에서 보던 장면이 떠오르는 풍경은 아니었다. 그래도 관광지화가 되어있는 곳이다 보니 어제와는 달리 맵시 좋은 바다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청산도 여행은 마무리됐다. 은하수도, 서편제도 부풀었던 기대만큼 대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청산도는 더욱 묵직하게 마음에 남았다. 청산도는 여유가 있는 섬이다. 청산도를 걷다 보면 멈춰 있는 섬 위를 시시각각 지나는 태양만이 흐르는 시간을 대변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아무리 섬 여기저기 혼자 조급해 돌아다녀도 섬은 여의치 않는다는 듯 느긋하게 지켜봐 준다.
만일 기가 막히도록 아름다운 은하수를 봤다면 청산도는 은하수로만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혹은 진도 아리랑의 감동이 그대로 떠올랐더라면 청산도를 서편제로만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청산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청산도는 은하수나 서편제라는 파편적인 키워드로 기억되길 거부했다. 그저 지독히도 쉼 없이 움직이던 내 삶에 쉼표 하나를 찍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