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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가는대로 Apr 11. 2023

[멋대로 영화 보기] 헤어질 결심:지자요수 인자요산

물은 산이 있어야 흐르고, 산은 물이 있어야 숨쉰다

헤어질 결심이라는 굳고 단호한 제목에 속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단 한 순간도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서래를 믿어도 되는지, 서래를 사랑해도 되는지, 서래에게 사랑에 빠진 게 맞는지 끊임없이 반문하다가 영화가 끝났다.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도 헤어질 결심을 내리지 못한 채. 



서래는 물 같은 사람이다. 담기는 그릇에 따라 모습이 바뀌고, 무엇을 품느냐에 따라 성질이 달라진다. 어항속의 물이 될 수도, 만조 때 밀려 들어왔다가 해변가 웅덩이에 고여버린 바닷물이 될 수도 있다. 그 중에서도 서래는 늘 어딘가 담긴 물이었다. 그렇기에 물로써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바다를 동경했으리라.


해준은 산 같은 사람이다. 산 정상을 오르기 위해서는 정해진 경로를 따라 가야하듯, 해준은 늘 정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해준의 가정도, 직장도 정해진 답으로 구성되어 작동하고 있었다. 그런 해준에게 서래는 일탈이었다. 모든 것이 논리적으로 설명 가능했던 해준의 삶에 나타난 미결 사건이었다. 그래서 해준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정답을 갈구했을 것이다. ‘왜 서래씨를 좋아하는지 알아요?’. 그에 대해 해준은 계속해서 나름의 답을 내어 놓았다. 그리고 서래는 그런 해준에게 그가 보고싶어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다. 마치 어항에 담긴 물처럼. 


서래는 사랑을 하는 방식마저 물과 같았다. 부지불식간에 밀고 들어와 빈틈없이 채우고는 모든 것을 적시고 유유히 흘러 나간다. 서래는 항상 자신을 담아줄 그릇을 필요로 했다. 그릇에 맞추어 자신의 모습을 바꾸었고, 그릇에 조그만 틈이라도 생기면 이내 흘러 나가 새로운 그릇을 찾았다. 

서래는 해준에게 스며들어와 준비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해준의 준비되지 않은 모습을 보았다. 

서래는 그렇게 늘 어딘가 담겨 고여 있었다. 그래서 서래는 해준이 붕괴되었을 때 그에게 더 깊이 빠졌을 지도 모른다. 깨어진 그릇 바깥에서 마침내 물은 자유롭게 흐를 수 있음을 알게 되어서.


공자는 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 仁者樂山)이라 하였다. 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한다. 지혜는 정해진 답에 대한 확인이 아닌 변화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한다.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영원 불변한 다양성들을 모두 포용하는 태도가 어진이의 덕목이기 때문일 것이다.



서래는 산보다 바다가 좋다 하였다. 그녀는 평생을 흐르는 대로 환경에 맞추어 자신을 바꾸어 온 물 같은 사람이기에 정해진 경로로만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산이 싫었으리라. 서래는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 판단을 쉬이 하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나쁜가요’라는 서래의 질문은 고정적인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지 않기를 바라는 호소였을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관점에서 신중하게 가치 판단을 하는 것이 지혜로운 자들의 태도이다.

해준은 산이 좋다 바다가 좋다 하는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그저 서래의 말에 ‘나도’ 라고 답하였다. 서래가 어떤 결정을 하든 해준은 서래의 결정을 따랐을 것이다. 그것이 어진 이들의 태도이다. 


그녀는 매 순간이 진심이었을 것이다. 단지 변화하는 것이 그녀의 본질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해준은 한 순간도 그녀에 대한 확신을 하지 못하고 붕괴되어 갔을 것이다. 해준의 본질은 물이 아니었기에. 


평생을 물처럼 살아온 서래는 결국 물이 되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서래의 모습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녀는 물이었기에 잡힐 듯 잡힐 듯 찰랑거리며 손틈으로 새어나갈 뿐 그녀의 본질을 쉬이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해준도, 관객인 나도 서래와 헤어질 결심을 하지 못한 채 헤어졌다. 하지만 목구멍 끝까지 차올라 한가득 적시고 유유히 사라진 그녀의 흔적이 아직 마음 속에 축축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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