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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기덕 Mar 22. 2023

1. 누군가를 불쌍해하는 마음

나의 아저씨

지안이 동훈의 모든 시간들을 도청한 사실을 동훈이 알게 되었을 때, 지안은 조그만 컨테이너 안에서 아픈 몸을 끌어안으며 앓고 있었다.
자기가 한 일을 안 동훈이 자기를 다시 찾지 않길 바라면서, 하지만 사실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알고도 자기를 찾아주길 바라면서.

조그만 행복조차 바랄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인 폭력과 좌절의 시간들을 겪었던 지난날처럼 혼자 끝없는 밑바닥을 헤매고 있을 때 즈음, 지안의 과거를 모두 알고 나서도 동훈은 지안을 찾아온다.
컨테이너 문을 열고 온 동훈의 얼굴을 보았을 때 소스라치게 놀라는 지안의 눈에는 슬프고 당황스럽지만 안도하고 있는 어린 소녀가 있었다.


「그지 같은 내 인생 다 듣고도 내편 들어줘서 고마워. 나 이제 죽었다 깨어나도 행복해야겠다.

너 나 불쌍해서 마음 아파하는 꼴 못 보겠고 난 그런 너 불쌍해서 못살겠다.

너처럼 어린애가 어떻게 나 같은 어른이 불쌍해서. 나 그거 마음 아파서 못살겠다.

그러니까 봐. 내가 어떻게 행복하게 사나, 꼭 봐.

다 아무것도 아냐. 행복하게 살 수 있어.

나 안 망가져. 행복할 거야. 행복할게. 」


세상이 볼 때는 치열하게 살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동훈은 여느 직장인들과 같이 40년이 넘는 세월을 스스로에게는 시체처럼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왔다.
그런 동훈이 지안을 만나면서 이제는 행복해야겠다고 말한다.
21살의 소녀의 밑바닥은 어둡고 아팠지만, 그런 아이가 나를 불쌍해한다는 그 사실이 가슴을 후벼 팔 정도도 훨씬 더 아팠을 것이다. 그게 너무 가슴 아파서, 이제는 자기가 행복해질 거라고 다짐한다.
동훈은 이제 본인이 행복해져야 할 이유가 생겼다.


「아저씨가 정말로 행복했으면 했어요. 」


21년 인생에 행복했던 적이 한 번도 없던 아이가 다른 누군가의 행복을 바란다는 것만큼 가슴 아픈 일이 있을까?
동훈이 찾아와서 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을 때, 지안은 인생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행복을 바라는 사람에게 소리 내서 행복했으면 했다고 말할 때, 그 말이 나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 자신 역시 이제는, 이제는 비로소 행복해지고 싶다고. 그래도 되겠냐고 말하고 싶었다.

누군가를 불쌍해하는 감정이 사랑이건 아니면 동정이건 그 여부를 떠나 그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감정으로 이어진다면 세상이 정말 따뜻해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불쌍하게 생각해도 되는지, 혹은 그러면 안 되는지를 가르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리고, 돈이 없고, 고생을 하며 살고 있어도 그 사람이 지안처럼 3만 살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인생의 고단함을 오롯이 이해할 수 없고 평가할 수도 없다. 나는 나대로 인생의 고단함을 버티며 살고 있고, 고된 하루를 버티고 집에 들어와 지친 몸을 뉘었을 때 따뜻한 집이 주는 그 위로를 그 누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의 고단함은 자신이 어릴 적 겪은 힘듦과 고생에는 비할 바 없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있더라. 그 정도는 버텨야지, 그 정도 가지고 앓는 소리 하면 안 되지 하며 본인이 생각하는 기준에 맞추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난한다. 비난받는 그 사람이 21살의 지안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른다.

세상 그 어느 누구도, 타인의 삶을 재단하고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불쌍해할 수 있을 뿐이다.
밝고 에너지 넘쳐 보이지만 그 속에 숨어있는 깨지기 쉬운 마음을 깨지지 않게 지켜주는 것.
세상 잘난 듯 으스대는 높은 콧대 뒤에 감추고 있는 눈물을 닦아주는 것.
동훈이 지안에게 그랬듯이 누군가가 큰 상처로 내 인생이 휘청거리면 어쩌지 좌절하고 있을 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보잘것없는 힘든 인생을 살았지만 온몸과 마음을 다해 누군가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

진정한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거창한 바람보다는, 살면서 만나는 누군가를 기꺼이 불쌍하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동훈과 지안이 서로에게 그랬듯이.


퇴근하면 드라마 보는 여의도 직장인.

두 손에 꼽아도 모자란 인생드라마들을

내 생각으로 채워보려고 합니다.

드라마의 한 장면을 가지고 생각을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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