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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기덕 Mar 31. 2023

6.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피검사 하셨는데 항인지질 항체질환으로 판명이 났어요.

임신이 잘 유지되려면 피가 잘 흘러야 하는데,

이 항인지질 항체 증후군이 있으면 일종의 혈액순환이 잘 안되는 상황이라서

태반이 만들어지고 임신이 유지되는데 좀 어려움이 있어요."


"그럼 습관성 유산, 그런건가요?"


"네."


"이번이 세 번째 임신이시네요?

이전 두 번은 모두 유산하셨고.. 어, 임신 7주 차시네요."


"네..."


습관성 유산으로 아이를 두 번이나 잃고 석형을 찾아온 이 산모는

세 번째로 찾아온 기적은 어떻게든 지키고 싶다.


처음 아이를 가졌을 때 그녀는 세상이 얼마나 따뜻한 지 느꼈을 것이다.

매년 마주했던 봄 햇살도 그 아이와 함께였을 때는 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부드러웠을 것이고,

단풍이 지고 떨어지는 낙엽도 이 아이의 탄생을 미리 축하하는 세상의 박수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첫 유산을 경험했을 때,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살아있으면서도 살아있지 않았다.


첫 아이를 떠나보내고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줄 알았던 기적이 다시 한 번 내 곁으로 다가왔을 때,

기필코 이 아이만큼은 지키리라, 꼭 지켜서 첫 아이에게 안아주지 못했던 만큼 이 아이를 꼭 껴앉아

누구도 이 아이를 데려갈수 없게 하겠노라 다짐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견딜 수 없이 두려웠을 것이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겪어봤기 때문에 두려운 것도 있었겠지만, 혹여나 다시 이 아이를 잃었을 때 힘들게 될 걱정보다는 이 아이에게 평생 미안해질까봐. 두 번째 아이를 내 뱃속에 품고 있는 모든 순간동안 조그마한 통증도, 움직임도 무섭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렇게 지키려고 했던 아이를 다시 한 번 잃었을 때 그녀의 몸에서는 영혼의 한 조각도 남지 못했고, 모든 하루하루가 목에 칼이 끼워진 것과 같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두 번째 이별을 겪고난 후 이 모든 것들은 그녀의 잘못이 되었다.



"약을 좀 쓰는게 좋겠어요.

헤파린 주사를 맞아야할 것 같은데,

이게 그러니까 혈액의 응고성 경향을 완화시켜주는 주사거든요.

생각보다 주사 맞는 건 어렵지 않아요.

당뇨환자가 인슐린 주사를 맞는 거랑 비슷하다고 보시면 되구요.

주삿바늘도 엄청 가늘어서 생각보다 아프지도 않을 겁니다.

주사 놓는 방법이랑 복약 지도는 우리 간호사 선생님이 자세하게 설명해주실 거구요.

저랑은 2주 뒤에 외래 오셔서 다시 볼게요."


산모의 상태를 본 석형은 차분하게 그 원인을 찾아본다. 그리고 앞에 앉아서 흐느끼는 산모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처방을 내리고, 여느 산모와 마찬가지로 2주뒤의 외래를 잡는다.

석형에게 이 산모는 난생 처음 생명을 품고 이 세상 모든 것들을 걱정하는 여느 산모와 같다. 모든 산모는 전부 각각의 다른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고 각기 다른 아이를 품고 있으니 모든 임신과 출산은 하나 하나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지금 앞에 앉아있는 이 산모 역시 그 기적을 이뤄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고, 나는 이 사람을 도와줄 것이다. 울지마세요, 괜찮을거에요. 라는 말도 중요하지만 석형에게는 냉정한 눈으로 이 사람의 몸과 마음을 똑바로 보아주고 있는 그대로 말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교수님은 이런 병 가진 산모들 워낙 많이 보시니까

이 정도 병은 병도 아니죠?"


"유산이 왜 병이에요?


유산은 질병이 아니에요. 당연히 산모분도 잘못한 거 없구요.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나...

앞으로 내가 뭘 조심해야 하나 물어들 보시는데 그런 거 없어요.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입니다.


이번에는 원인을 미리 알았으니까,

잘 대비하고 치료하면 좋은 결과 가질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주사 잘 맞으시고 당분간 안정 잘 취하세요."



아이를 잃었었던 지난 날 산모는 자신의 몸을 내다버리고 싶을 정도로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저주받은 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며 매일 밤 울며 스스로를 탓하고 또 탓했을 것이다.

어쩌면 계속 아이를 잃게 만드는 병에라도 걸린 것만 같은 나의 몸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특별한 치료법을 말해주길, 저주를 풀어주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고 말해주길 바랬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본인을 파괴하고 자책했던 산모는 오히려 유산은 병이 아니라는 석형의 말에 눈물을 흘린다.


어쩌면 산모 스스로도 속으로는 누군가 말해주길 기다렸을 그 말.

아이를 잃을 때마다 수백 번 수천 번 나를 자책하고 괴롭혔던 그 시간들을 위로해줄 수 있는 말.

내가 잘못해서, 내가 저주받아서, 내가 조심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일이라는 말.

그 말에 산모는 수 년간 무겁게 자신을 짓눌렀던 괴로움을 눈물과 함께 쏟아냈다.

그리고 다짐했다.

지금 내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미안해할 것이 아니라

내 잘못으로 어떻게 될까봐 걱정하고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다독이고 마음을 단단히 먹어 이 아이가 내 뱃속에서 편히 웃음지을 수 있도록 하리라.


우리는 살면서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거나 바라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그 잘못을 본인에게서 찾는 경우가 많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하다가도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스스로에게 그 원인을 찾으려고 애쓴다.

업무를 잘 해결하지 못하고 원하는 만큼 성과를 내지 못했을 때에는 내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내가 더 잘했어야 했다고 자책하고

사랑했던 사람과 이별하게 되면 나의 못난 면을 과할 정도로 크게 보고 후회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하지만 석형의 말처럼, 많은 좌절과 실패들은 나의 잘못이 아닌 경우가 많다.

아니, 나 뿐만 아니라 누구의 잘못도 아닌 그냥 그렇게 되는 게 우리의 삶이다.

계절이 지나며 푸릇한 잎이 시들고, 반짝이도록 이쁘게 폈던 꽃이 지고,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 왔을 때 아무도 이를 누구의 잘못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저 시간이 지나며 흘러온 것으로 받아들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꽃이 피어있는 화려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무는 원래 있던 그 때의 나무로, 하늘은 원래 그 하늘로 받아들이고 사는데,  우리의 삶에만은 너무도 엄격하다.


우리는 조금은 더 우리 스스로에게 따뜻해질 필요가 있다.

특히 나에게 어떤 슬픔이 찾아왔을 때에는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야. 그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일이야.

나는 그저 이 상황에 놓여져 있을 뿐이고,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스스로를 다독여야 한다.

세상에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수군대더라도,

적어도 나만큼은 나에게 자비로워야 한다.

그저 그렇게 되어버린 일을 내 탓으로 여기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슬픔으로 가득했던 지난 시간은 되돌릴 수 없지만,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시간은 내가 오롯이 행복으로 가득 채울 수 있기 때문에.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빠져 내가 바보같았다고, 내 잘못이라고 자책하고 있는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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