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선택지
방과 후 친구들과 눈사람을 만들던 때가 떠오른다.
차갑고 맑은 공기로 숨을 쉬는 이 순간을 소중히 간직하고 싶다.
학교는 조용했고 드넓은 운동장을 장악한 듯
힘차게 내리는 눈과 함께 내 마음은 두근거린다.
추위에 붉은빛이 돌던 볼과 입김을 보고도 추운지 몰랐다.
눈을 둥글게 만드는 방법 말고는 아무것도 몰랐다.
순수, 하다고나 할까.
맞는 것 같다. 간직하고 싶은 것이었기 때문에.
손바닥의 건조함, 바짝 마른 입술.
시간이 깨나 빨리 흘렀다.
순수를 간직하고 있는지 물어본다.
큰일이다. 마음이 너무 힘들다.
한 마디를 공감으로 이해하다가
한 사람을 공감으로 이해해 보려고 하니
간직하고 싶은 것이 존재할 리가 없다.
나의 할머니.
버선발로 밥을 짓고 계셨던 모습이 생생하다.
자린고비 할아버지의 등쌀에 편한 밤 못 지내시던 시절을 보내시다
이제야 두 다리 뻗고 한숨 돌리려던 평화로운 어느 날
이름도 생소한 파킨슨 병에 걸리시고야 말았다.
내가 왜 주먹을 못 쥐니.
내가 왜 변기 물도 못 내리니.
내가 왜 픽픽 쓰러지기만 하니.
아침 일찍 기차를 타야 했던 손녀를 위해 밥을 짓겠다던 할머니.
쌀을 푸다 쿵하고 쓰러지신 할머니.
자기는 됐다며 쌀을 주워 담으라고 하신 할머니.
담담한 척하시긴. 이마에 멍들었잖아, 할머니.
자꾸만 한 사람의 삶에 공감을 해 버려,
그리고 그 사람의 삶은 그리 행복하지 않아
마음이 힘든 것이었다.
이렇게 혼자 끙끙댄다고 해서
할머니의 건강이 호전되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하루하루를 잘 버텨달라고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심적 분리를 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래야 그 힘듦에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를 공감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어려울 거라고
차갑고 맑은 공기를 다시금 느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끔 가다 새삼스레 물어본다.
힘들진 않은가. 순수를 간직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