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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 May 08. 2023

도대체 뭘 잘못했길래

 처음으로 업무 위탁을 맡게 된 곳은 R회사의 안건이었다. 중도 투입이 된 탓에 사람들과 친해질 겨를도 없이 곧장 업무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일본에 온 지 고작 4개월 된 신입에게 궁금한 것도, 도움을 받을 것도 없을 것이다. 나 또한 언어도 사고방식도 다른 이곳에서 어떻게 버텨낼지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나의 업무는 QA이며 회사 서비스가 모바일과 웹으로 개발되는 동시에 버그를 찾아내 보고를 하거나 디버깅이 되면 재확인 후 결과를 기입하는 일이었다. 처음 보는 항목서와 설명서뿐만 아니라 무슨 보안이 이렇게나 철저한지 URL하나 보내는 것도 별도의 채팅 프로그램을 사용해야 했다. 낯선 것 투성이었던 환경에 당황해하던 나에게 한 사원이 다가왔다. 그리고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허벅지와 허리는 위로 세우고 두 팔은 테이블 위에 올려 테스트용 스마트폰을 보여주었다.


 "이 화면은 어떻게 재현했어요?"


 모바일에서 테스트를 하려고 하는데 어느 화면으로 이동하여 확인했는지 묻는 것이었다. 팀원들과 공유하고 있던 테스트 항목서에 내가 OK라고 결과를 기입한 케이스였나 보다. 물어보는 건 좋은데 왜 이 사람은 허리를 숙이는 것도 아니고 무릎을 꿇는 것일까. 바닥이 더러울 텐데, 옆에 아무도 안 앉아있는 의자가 있는데 도대체 이 사람은 뭘 잘못했길래 투입된 지 일주일도 안 된 나에게 무릎을 꿇는 것일까.


 당황한 나는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여기 앉으세요"라고 애원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 의지의 일본인은 괜찮다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답이 길어지자 계속 무릎을 꿇고 있는 이 사람에게 미안한 감정이 생기면서도 왠지 내가 의미있는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팀원은 대화가 끝나자 밝은 목소리로 고맙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자리로 돌아갔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부족한 건 항상 나였다. 일본어 능력이 뛰어나지 않다는 핑계로 무슨 말인지 한 번 더 부탁한다며 되물어버리거나, 더군다나 한국어도 조리 있게 구사하지 못하는데 일본어로 애쓰자니 상대방에게 내 의견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한 것이 왜 자기 설명이 부족했던 탓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내가 똑 부러지게 말 못 한 것이 왜 자기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상대방은 항상 사과와 감사의 말을 반복했다.


 이처럼 일본에서 일을 하면서 가장 좋은 점은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단지 예의상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말 한마디에 쉽게 감동하는 나로서는 몽글몽글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물론 업계와 회사,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적어도 내가 만나 본 사람들의 대부분은 감사하게도 내 존재를 의미있게 해 주었다.




 내가 무릎을 꿇어본 것은 어릴 적 엄마 몰래 돼지 저금통에서 동전을 꺼내 장난감 뽑기에 죄다 올인했을 때이다. 무릎을 꿇는 게 굉장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그냥 손바닥 회초리를 맞으면 안 되냐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결국 한 시간 정도 무릎을 꿇고 손도 들고 있었지만 내가 그렇게 잘못한 일인가 싶어 분했던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드라마에서도 엄청난 잘못을 해서 사죄를 할 때 무릎을 꿇는데 그 사람은 왜 고작 질문 하나에 그랬던 것일까. 그것도 나 따위에게. 어쩌면 나 따위라고 표현할 만큼 자존감이 그리 높지 않은 나에게 자존심을 지키기는커녕 오히려 배려와 존중의 마음을 전해 주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행동 하나로 내 자격과 자존감의 깊이를 논하게 되어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사소한 질문을 하기 위해 일면식도 없는 갓 투입된 외국인 사원에게 무릎을 꿇을 수 있을까. 대화를 주고받으며 자연스러운 감사와 사과의 말을 내뱉을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을 만나서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이 순간을 오래 간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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