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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ma May 21. 2023

[엄마, 안녕]10. 엄마의 얼굴은 말갛기만 했다. 3

3. 죽어도 되는 나이. 아직 살고 싶은 나이


입원 둘째 날은 본격적인 검사가 시작되었다. 검사를 위해 엄마는 자정부터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었다.

가장 먼저 기관지 내시경을 하고 온 엄마한테 안 아팠는지 물었다.

"마취를 해서 하나도 안 아팠어. 근데 검사하면서 뭐가 나왔다는데, 나한테 가져갈 건지, 아니면 자기들이 써도 되는지 묻대? 그래서 내가 '아이, 뭐 그런 걸 가져가요. 필요하면 다 갖다 써요.'라고 해줬지."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었다. 엄마가 그 말의 의미를 알았는지, 몰랐는지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난 그 말을 듣고서야 엄마가 암일 수 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었다. 그전에는 그냥 떼어내면 되는 무엇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아니 그러길 바랐던 것도 같다.     

엄마는 기관지 내시경은 안 아픈데, 며칠 전부터 생긴 허리통증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허리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계속 뒤척이고 있었다. 그리고 거의 12 시간 정도 물을 마시지 못해서 목이 마르다고 했었다. 전날 설명할 때, 기관지내시경이 끝나면 물을 마실 수 있다고 해서 많이 마셔도 되는지 간호사한테 물어보니, 마셔도 된다고 하다가 아직 조직검사가 남아서 안 된다고 했다. 내가 확인하지 않고 물을 줬으면 어쩔 뻔했나 하는 생각에 불신을 갖고 엄마한테 가서 물을 마시지 못한다는 말을 전했다. 엄마는 알았다고 하면서 잘 참아냈다.

엄마는 늘 그랬었다.

의사가 하라는 거 열심히 하고, 하지 말라는 건 절대 하지 않았었다. 의사의 말을 절대적으로 믿었었다.

    

오후에는 CT를 보면서 등에 바늘을 찔러 넣어 조직을 떼어내는 검사가 남아 있었다. 부작용으로 기흉이 생길 수 있다고 했었다. 조직검사 전에 호흡기내과 주치의가 왔고, 엄마는 아직도 아랫배가 아프고 허리도 너무 아프다고 호소했다. 주치의는 진통제를 주겠다고 했고 배와 허리가 아픈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 뼈 스캔 검사와 PET CT(당을 먹고 암이 모이는 곳을 확인하는 검사)를 추가로 하겠다고 했다.

“암인가요?”

난 의사 옆으로 바짝 다가가서 조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고 난 엄마를 볼 수가 없었다.     

 

조직검사를 하고 온 엄마는 38.8℃의 발열과 오한에 몸을 덜덜 떨었다. 그리고 종일 피를 빼고 아무것도 먹지 못해 얼굴에 거무스름한 반점들이 보였다.

흡사 죽음의 얼굴 같았다.

난 너무 무서웠었다. 죽음이 바로 코 앞에 있는 거 같았다.

     

뭐가 잘못된 걸까? 내가 엄마한테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을까?   

   

한 보따리의 약을 처방받고 퇴원했었다. 마약성 진통제, 항생제, 기침약, 가래약 등이었는데, 간호사는 약에 대해 아주 빠르게 설명했었다. 잘 이해하지 못했고 약국에서 약에 대한 설명을 들었으나, 역시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난 급성통증이 있을 때 먹는 마약성 진통제인 설하정(혀 밑에 녹여 먹는 약)과 다른 마약성진통제를 한 번에 물과 함께 줬었다.   


주말이 돼서 오빠가 여수에서 올라왔다. 뭘 사가냐고 묻기에 엄마가 평소 좋아하고, 몸보신에 좋을 거 같은 갈비찜과 갈비탕을 사 오라고 했었다. 엄마는 잘 넘어가지 않지만 아들이 사 온 것이라 성의를 생각해서 열심히 먹었다. 오빠는 돌아가는 길에 엄마가 너무 안타까운데 어떻게 해줄 수 없는 것이 답답한 듯, 엄마의 어깨를 두 번 두드렸었다. 평소 스킨십이 없던 모자 사이라 그 행동은 더 애틋하고 마음 아프게 느껴졌었다. 그리고 엄마는 오빠가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구토를 했었다. 차마 아들이 사 온 것을 먹고 그 앞에서는 구토를 할 수 없었다고 했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금식하느라 먹지 못하고 화장실을 못 간 엄마는 변비가 생겼었다. 약국에 가서 변비약을 사다 드렸지만 별 효과가 없었고, 엄마는 관장을 하면 좋을 거 같다고 해서 관장약도 사다가 드렸다. 관장을 하고 아주 조금 변을 봤었다. 그리고 다시 구토를 했고, 연이은 구토로 속이 쓰리기 시작했었다. 늦은 밤, 엄마가 속 쓰림이 심하다고 해서 근처 편의점에서 우유를 사다 줬었다. 엄마는 흰 우유 대신 딸기 우유를 좋아해서 딸기 우유를 사다 줬었다. 그리고 엄마는 밤새 구토를 했었다.

그날 이후 엄마는 먹는 것마다 다 토해내기 시작했다. 약을 먹으면 약이 나왔고, 밥을 먹으면 밥이 나왔었다. 구토가 갈비찜 때문인지, 마약성 진통제 때문인지, 변비약 때문인지, 관장약 때문인지, 딸기 우유 때문인지.

내가 해주는 일마다 엄마를 더 아프게 하는 것 같아서 난 너무 혼란스러웠고, 무서웠었다.

다음 날 새벽, 그렇게 아픈 엄마를 두고 난 미처 조율하지 못한 일정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섰고, 그날 종일 엄마는 혼자서 고통을 견디다가 오후에 겨우 걸어서 약국에 가서 겔포스를 사다가 먹었다고 했었다.

그것도 내 잘못 같았다.

     

그리고 5일 후 결과를 들으러 병원에 갔었다. 언니도 함께.

의사가 사진을 보여주는데 까만 곳이 암이라고 했고, 까만 곳이 너무 많았다.

폐와 신장부위, 그리고 아픈 허리에도 왼쪽 배에도 암 덩이가 있었다.

전이가 돼서 말기라고 했다.

표적치료제가 맞는지 유전자 검사를 하고, 그게 안 되면 항암주사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다. 허리 아픈 곳은 방사선치료를 하면 통증이 조금 좋아진다고 했었다.

언니는 자꾸 옆에서 얼마나 살 수 있는지 물었다. 엄마가 듣고 있는데 그런 질문을 하는 언니가 이해되지 않았었다. 답답했지만, 그 자리에서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의사는 표적치료를 하면 2년 이상 10년까지도 산다고 했고, 항암주사도 2년 이상은 살 수 있다고 했다.

진단을 받고 엄마는

“머리카락 많이 빠져요?”

하고 물었다. 엄마는 암보다는 머리카락 빠지는 것이 더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엄마와 언니가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조용하게 물었다.

"코로나 걸렸었는데, 그것 때문일까요?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 작년 여름 나 때문에 코로나에 걸렸었었다. 난 그 와중에 죄책감을 덜어보려고 했던 것이다.

“치료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돼요?”

치료를 하지 않으면 2~3개월이라고 했었다.     



진료실을 나오니, 엄마는 의자에 앉아서 나를 보고 있고, 언니가 울면서 나에게 다가왔었다. 그런 언니를 보자 나도 눈물이 나서 뒤돌아서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다음 진료 일정을 잡고 간호사가 알려주는 대로 중증환자 등록을 위해 접수창구를 왔다 갔다 하다가 의자에 앉아 있는 엄마를 봤었다.   

  

엄마는 나를 보고 있었는데, 아무 표정이 없이 그저 말간 얼굴이었다.

      

그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엄마를 보는 거 같은 느낌도 들게 했었다.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엄마가 돌아가신 후, 그 말간 얼굴이 불쑥불쑥 생각났었다.  그때마다 죄책감은 더욱 커졌고, 가슴은 더 미어졌었다.

 

나중에 엄마는 날 혼자 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린다고 했었다. 그때, 엄마는 울었다.   

  

엄마는 진단을 받고 집에 와서 가장 먼저 미용실에 가서 파마를 했었다.  

항암치료를 하면 머리카락이 빠져서 파마를 못하게 될까 봐 그랬을까?     

그래도 그때는 치료를 받으면 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던 가 보다. 우리 모두가 그랬듯.

  



병원에 입원해 있던 12월의 어느 날 엄마는 말했었다.     

이만큼 살았으면 죽어도 되는 나이야, 나인데...... 이제 살만해지니 죽는다는 게......”     

엄마의 그 말에 난 어떤 위로도 해주지 못했었다. 그저 퉁명스럽게,

“죽기는 왜 죽어. 살려고 치료하고 있는데.”

라고 했었다. 나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면서.     

 

“조금 더 사시면 좋을 텐데, 안타깝다.”     


엄마가 아닌 다른 누구였다면, 나도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내 주변에서 그렇게 말했듯이.

엄마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을 알기에 그런 말을 했을 테지. ‘죽어도 되는 나이.’라고.

나는 눈 하나 아픈 것도 걱정되고 혹 실명이 되면 어쩌지? 시술을 해야 하면 어쩌지? 하고 고민이 되는데, 엄마는 암이라니 얼마나 무서웠을까.

무서웠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살고 싶었을 것이다.

‘죽어도 되는 나이’가 아닌 ‘아직 살고 싶은 나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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