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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ma Jun 14. 2023

[엄마, 안녕] 15. 연명치료계획

생각과 실제의 사이

"난 저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


TV에서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는 환자의 모습이 나오면 엄마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런 말에는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하는 게 싫은 것도 있었지만, 괜히 자식들한테 짐으로 남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었다. 나도 엄마가 그렇게 누워만 계시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연명치거부의향서를 작성한 적은 없지만, 늘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전에 응급실에 입원을 하고 엄마는 각종 검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점심 즈음에,


"PCN을 해도 안되면 중환자실에 가야 할 수도 있는데,..."


전공의인지 인턴인지 알 수 없는 의료진이 와서 뭐라고 하는데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우선 PCN이 뭔지 몰랐고, 그걸 해도 안된다것이 무슨 말인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와 나는 중환자실은 안 간다고 했다. 중환자실은 산소호흡기를 달고 죽음도 삶도 아닌 시간을 보내는 곳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견을 들은 의료진은 알겠다고 하고 갔다.

뭘 알았다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PCN(경피 신루 설치술)은 소변이 정상적으로 배출되지 못할 때 몸 밖에서 카테터를 신장에 넣어 소변을 배출하는 것이다.


엄마는 오후에 응급으로 PCN 시술을 했다. 신장이 왜, 어떻게 안 좋은지 정확한 설명을 들을 수는 없었다. 암이 요관을 막고 있어서 소변 배출이 원활하지 않았던 것인지, 많은 약들로 인해 신장기능이 안 좋아진 것인지, 둘 다 인지 우리는 알 수 없었다.

시술을 하고 나자 병원 입원이 확정되어 나는 급하게 짐을 꾸리려 집에 다녀와야 했다. 엄마는 조심해서 잘 갔다 오라고 했다. 의연하게.

내내 응급실 밖에서 대기하던 오빠와 함께 집에 가서, 여행 가려고 샀던 캐리어에 다시 병원을 가기 위한 짐을 쌌다. 한번 싸봐서 그런지 병원 짐 싸는 것이 익숙했고, 시간도 짧게 걸렸다. 그러나 병원에서 집이 멀어 왕복 3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을 혼자 견딜 엄마가 마음에 걸렸었다.  병원으로 가는 길에 응급실에서 전화가 오니, 난  마음이 더 급해졌었다. 오빠는 다급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옆에서 나를 다독였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오빠는 다시 응급실 밖에 있고 난 보호자로 병원에 상주하기 위해 코로나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일반 병실이 날 때까지 단기응급병동이라는 곳으로 옮겨졌었다.

엄마가 오빠는 어딨는지 물어봐서 응급실 밖에 있다고 했다. 평소 같으면

"집에 가지 뭐 하러 있어."

했을 텐데, 오히려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리고는 날 보고 시술이 너무 아팠다고 했다.

의연하게 나를 보냈지만, 너무 무서웠구나.

너무 아픈데, 불친절하고 삭막한 응급실에 엄마 혼자 두었 것이 너무 미안해졌었다.

난 엄마의 손을 잡고

"울 엄마, 많이 아팠어? 힘들었겠네."

위로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응급실처럼 삭막하고 소란스럽지는 않았지만, 단기응급병동에서의 밤도 길었다.  

항암치료를 하겠다고 병원에 오던 새벽에 눈도 못 뜨고 기운이 없던 엄마는 시술도 하고 항생제, 진통제 주사 등을 맞아서 그런지 한결 편해 보였고, 밤새 잠도 조금 자는 거 같았다.  


오전 9시경, 전날과 다른 전공의가 왔다.

연명치료 얘기는 들었냐고 했다.

전날 어떤 분이 와서 무슨 말을 했는데,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전공의는 이 시술(PCN)을 했는데도 호전되지 않으면 투석을 진행할 수 있는데, 산소호흡기, 제세동기, 투석 등은 연명치료의 마지막 단계라고 했다.


중환자실에서 투석을 하면서 마지막을 맞고 싶은지 물었다.


 질문 너무 무서웠다.

중환자실이란 말이 무서웠고,  중환자실에서 투석을 하며 마지막을 맞는다는 것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곳에서 팔다리 묶인 채 계속 피를 뺏다 넣었다 한다니......


투석이 연명치료의 마지막 단계라는 것은 몰랐었다.

연명치료는 산소호흡기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제세동기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엄마의 친구분 중에서도 투석을 거의 매일 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것이 연명치료였다는 것인가? 

연명치료는 안 하려고 했는데, 수치가 호전되지 않으면 엄마는 어떻게 되는가?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하지만 엄마와 난 중환자실에서 얼굴도 못 보고 죽는 건 싫다고 했다. 산소호흡기를 하는 것도, 제세동기도 싫다고 했다.

전공의는 투석만 진행할 것인가 물었다.

그래도 되는지 물었고, 투석만 진행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만 동의를 했다. 그럼 동의서에 사인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전공의는 서류를 가지러 갔다.


난 잠시 밖으로 나가서 오빠한테 전화를 했다. 오빠는 엄마를 응급실에 입원시키고 늦은 밤에 다시 여수로 가서 일을 하고 있었다. 오빠가 전화를 받자, 막상 말이 나오지 않고 눈물만 나왔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데 창피한 것도 모르고 한참을 울다가 겨우 울먹이며 상황을 전했다.


실은 울고 싶었다. 너무 무서운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가능하면 크게 소리 내서 울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 앞에서 울 수는 없어서 전화를 핑계로 했던 것도 같다.


오빠도 놀랐다. 그러나 나보다는 침착해서 앞으로 어떤 치료를 할 수 있는지 다시 확인해 보라고 해서 엄마 병실로 갔다.


엄마는 전공의가 이미 동의서에 사인을 받아갔다고 했다. 놀라고 무서운 내 감정만 생각하고 또다시 중요한 순간에 엄마를 혼자 있게 다. 엄마한테 너무너무 미안했다.

"엄마 무섭지 않았어?"

"그러게, 말을 그렇게 무섭게 하냐."

"그래도 혼자서 사인했네."

엄마는 울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점심으로 나온 식사를 엄마는 아주 많이 먹었다. 며칠 전 항암치료를 한다는 얘기를 듣고, 청국장에 양배추 삶은 것을 먹었던 이후 처음이었다. 그날 너무 힘들게 구토를 했던 엄마는 잘 먹지 못했었고, 구토가 나올까 봐 먹지 않았었다.

그런데 점심에 나온 빵 1/4조각과 밥 두 숟가락을 국에 말아서 먹었고, 가자미도 열심히 먹었다. 이렇게 먹어도 되나 걱정은 되었지만, 엄마가 잘 먹으니 좋아서 난 반찬으로 나온 가자미 살을 자꾸자꾸 발라줬었다. 


나중에야 엄마도 너무 무서웠구나 생각이 들었었다.

'저렇게 살고 싶지 않다.'

나도 엄마와 같은 생각이었었다. 엄마뿐 아니라, 내 삶의 마지막도.

이런 막연한 생각을 했지만, 폐암을 진단받고 연명치료동의서를 작성하는 순간이 오자, 연명치료라는 말은 TV 속 다른 사람의 이야기나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당장 엄마의 죽음을 계획하고, 삶을 제한하는 것 같았다.

죽음을 선고받은 느낌이었다.


며칠 전 청국장에 양배추를 먹었던 것은 치료에 대한 의지, 삶에 대한 욕심이었다면, 이날의 엄마의 점심은 '죽고 싶지 않음' 같았다.


PCN관에서는 계속 피가 나오고 있었고, 수치는 호전되지 않았다. 다시 PCN 시술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엄마의 투석이 결정되었다.

연명치료의 마지막 단계라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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