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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금명이 박영범과 결혼했다면?

폭싹 속았수다 -그럴 수도 있었던

양금명이 박영범과 끝내 이별하지 않고 결혼했다면?


폭싹 속았수다


그 이야기에서

금명과 영범은 결국 이별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끝내 헤어지지 않고

결혼까지 이어졌더라면 어땠을까요.


이 이야기는,

그 ‘만나지 말았어야 했던 인연’이

끝끝내 함께했다면 생겼을지도 모를

또 하나의 인생입니다.


사랑이 끝이 아니라,

사랑을 믿었던 선택이

끝이 되는 이야기.




영범은 무릎까지 꿇었다.

“금명아.. 너 없으면 안 돼.
엄마 문제는.. 내가 해결할게.
결혼만 하자. 제발.”

금명은 잠시 눈을 감았다.

믿어보겠다는 마음이었다.

처음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던 날처럼,
마음 하나만 있으면,
세상도 이겨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사랑은 처음이었고,
그래서 어리석었다.

하지만 그땐 몰랐다.
자신이 택한 게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믿기로 한 마음’이라는 걸.



결혼 후, 부용은 금명을 사돈 딸이 아니라
집안 허드레로 대했다.

직장 다니는 날에도
매주 토요일마다 불려 가
된장 풀고, 전 부치고, 와이셔츠까지 다려야 했다.

말은 뼈를 긁었다.

“국물은 또 왜 이렇게 맹숭해?
아직도 국 하나 제대로 못 푸니?”

“내가 늘 말했잖아.
사람은 물 들고 흙 드는 데서 크는 거라고.
배운 것도, 쌓인 것도 없으니, 티가 안 날 수가 있나.”

“그리고 그 돌, 내 아들 가슴에 내려놓는 거라고?
그게 그렇게 무거웠다면,
애초에 결혼이란 걸 할 생각을 말았어야지.”

영범은 중간에서 눈만 깜빡이다,
집에 와서야 금명에게 말했다.

“엄마가 말이 좀 심하긴 해도,
금명아.. 널 생각하니까 그러시는 거야.
그냥.. 좀 참고 넘기면 안 될까?”

금명은 거실 쇼파에 앉아
조용히 손등을 바라보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그 손으로 날 꺼내주겠다고 했잖아.
지금은, 그 손으로..
날 다시 밀어 넣고 있어.
당신 어머니한테.”



2년 후, 금명은 아이를 낳았다.

육아는 고되었고,
부용은 그마저 간섭했다.

아이 이름도 부용이 지었고,
첫돌엔 금명의 부모는 초대조차 받지 못했다.

어느 날, 이유식을 먹이던 금명이
그릇을 식탁에 조금 세게 놓자

부용은 수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밥상머리에서 그릇 놓는 소리부터가
그 집안 품격이 나오는 거야.
이래서 사람이 배워야 되는 건데 말이지.
네 엄마 아버지가 딱 그랬겠지.
거기서 뭘 배웠겠어?”

공기가 싸하게 얼어붙었다.

부용은 늘 하던 말을 덧붙였다.

“난 말 안 하면 병이 나.
그래서 말하는 거야.
속으로 곪느니, 그냥 꺼내놓는 게 낫잖아?”

그날 밤, 금명은 아이를 안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

택시 창밖으로 지나가는 도로 위로,
아버지 관식의 기타 소리가 떠올랐다.

그리고 어머니 애순이
식당 지분을 팔며 내뱉던 말도.

“엄마는 너를 세상 바깥으로 꺼내려고 애썼다.”는
그 말이 마음을 쳤다.

자신은 지금, 누구를 위해..
무엇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걸까.



영범은 현관 앞까지 나와
금명의 손목을 붙잡았다.

“금명아.. 이혼은 너무한 거잖아.
나, 진심으로 버텼어.
힘들었지만, 너랑 살고 싶어서.. 애썼다고.”

금명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말끝에 숨이 떨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건 알아.
근데 그건..
나 때문에 버틴 게 아니었어.
그냥 조용히, 눈 감고 견디는 척…
결국 엄마 눈치만 봤잖아.

그날부터 넌 그냥,
내 옆에 있는 사람이었지.
내 편은 아니었어.”

영범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금명의 말은 조용했고,
금명의 목소리는 나무젓가락처럼
부러질 듯 가벼웠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은 무쇠였다.

어디에도 울부짖는 소리 없이,
이별은 그렇게, 조용히 끝났다.

금명은 아이를 안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길게, 길게 이어진 제주 가을바람이
그녀의 머릿결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3년 후, 늦가을. 서점 안.

‘양금명 북토크 & 사인회’
흰 천 위에 글씨가 쓰여 있다.

금명은 평소보다 말수가 적었다.

사인을 해주며 고개를 들었을 때,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충섭이었다.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눈빛은 오래된 기억처럼,
담백하고 진지했다.

“양금명 씨.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말한 적 있었어요.
금명 씨는 크리스마스트리 같다고요...

양금명 씨는, 그때도 지금도..
그냥 멀리서 봐도 알아보겠더라고요.”

금명은 그 말을 들은 순간,
어느 결혼식 날 오후가 불쑥 떠올랐다.

하객 속에 섞이지 못한 채
멀리서 바라보다가 돌아갔던 누군가.

그땐 몰랐다.
그게 충섭이었다는 걸.

충섭이 내민 책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충섭이 말했다.

“그날.. 알고 있었으면,
좀 더 빨리 찾았을까요?”

금명이 조용히 웃었다.

“아니요... 그땐..
마음속에 켜진 불이
하나도 없었어요.”

잠시 고요.

하지만 그 고요는 오래되지 않았다.

금명은 충섭을 바라봤다.
오래 닫혀 있던 창문이
조심스럽게 다시 열리는 순간처럼.

“지금은요..

불이 조금씩 다시 켜졌어요.

그래서, 예전보다 따뜻해요.”

충섭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이 이야기는,
양금명과 박영범이
이별하지 않고 끝내 결혼을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그 상상에서 시작된
또 다른 ‘폭싹 속았수다’였습니다.

사랑만으로는 부족했던 두 사람,
그들이 함께했기에 더 아팠던 나날.

결국엔 사랑보다 더 단단해야 했던 용기를
끝내 갖지 못했던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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