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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부상길과 애순이 결혼까지 해버렸다면

폭싹 속았수다 - 그럴 수도 있었던

폭싹 속았수다



​폭싹 속았수다

그 이야기에서
애순은 관식을 택했고,
끝내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녀가 관식이 아닌
부상길과 결혼했다면 어땠을까요.

이 이야기는,
‘말렸어야 했던 인연’이
끝끝내 맺어졌을 때
그녀의 삶이 어디로 흘러갔을지를
조심스레 상상해 본 기록입니다.

사람이 바뀌어 달라진 게 아니라,
그 거친 마음을 감싸 안고
조금씩 길들여 간 세월이
결국 사람을 바꾼 이야기입니다.

사랑이 먼저가 아니었지만,
사랑만은 결국 남게 된..
그런 결혼 이야기입니다.


“니, 걔가 무슨 인간인 줄 몰라서 그르멍?”

“입만 댈 때마다 욕이 줄줄 나오는 인간 허네.”

“그 집 식구덴 니를 귀하게 볼 생각 털끝만치도 없을 거우다.”

​하지만 애순은 고개를 저었다.
사는 게 하루하루 버거운 때였다.
그 시절, 사랑보다 현실이 먼저였다.

​작은엄마가 말끝에 덧붙였다.
“그 집에서 대학도 보내준 허난 허드라.
시집도 내줘 신다 마씸.”


​그 말이,
애순의 귀를 불현듯 뜨겁게 만들었다.
심장 깊숙한 곳에서
익숙한 체념 말고
그 말에 애순은 대답 대신 잠시 숨을 삼켰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살금살금 기울던 현실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만큼은
‘귀하게 자라라’는 말보다
‘살아남아라’는 말이
더 절실한 위로였다.



처음부터 순탄하진 않았다.
부상길은 투박했고
기분은 날씨보다 변덕스러웠다.

비린내보다 쉽게 상하는 게
그의 말투였고
사람 마음에는 거칠게만 닿았다.

​“밥이 짜네.”
“말대꾸는 또 왜 그렇게 야무지게 해?”
“시집왔으면 좀 조용히 살아.”

​애순은 담담히 맞받았다.
“시끄럽게 살아야,
귀도 열리고..
가슴도 열리는 거예요.”

​그 말에,
부상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기분 나쁜 것도, 웃긴 것도 아니었다.
그냥 처음 듣는 종류의 말이었다.


​그에겐 이미 전처에게서 얻은 아들 둘,
오성과 한음이 있었다.
처음엔 눈빛부터 곱지 않았고,
식탁에 마주 앉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애순은 억지로 그들의 엄마가 되려 하지 않았다.
다만, 날마다 밥을 지었고
밤마다 문 앞에 조용히 물컵을 두고 갔다.

시간이 걸렸지만, 어느 날 한음이 밥그릇을 들고 말했다. “고맙습니다, 엄마.”

​그 한 마디는, 그 집에 처음 불이 들어온 날 같았다.


그날은 바람이 심상찮았다.
라디오에선 태풍주의보가 연달아 흘러나왔고,
서쪽 하늘은 벌써부터 꾸역꾸역 먹구름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애순이 마당에 널어둔 빨래를 걷으며 말했다.
“오늘, 축대 쌓으러 가는 날 아니었어요?”

​부상길이 담배를 입에 문 채 뻐끔거리다 대답했다.
“학씨… 이런 날은 삽질도 절단 내야지.”

​그러고는 자리를 툭 털고 앉아 신문을 폈다.
“지들이 그렇게 급하면 지들이 하라 그래, 안 그래?”

​애순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식탁 위엔 따뜻한 수제비가 놓여 있었다.

은명이 반죽 자투리를 손으로 쥐며 장난을 치고 있었고, 오성과 한음은 숟가락을 들고 국물 속을 휘젓고 있었다.

동명이는 식탁 끝에서 작은 손을 까치발로 뻗어, 찬장 위의 사탕통을 힐끔거리며 보고 있었다.

​“동명이, 안돼. 밥 다 먹고.”
애순이 말했지만, 아이는 이미 두 발을 들고 찬장을 향해 기웃거리고 있었다.



순간

쾅!

사탕통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사탕들이 타닥타닥 바닥을 굴렀다.

​“동명이! 왜 혼자 꺼내려 그래?”
애순이 버럭 하며 일어났다.

아이의 눈가에 금세 눈물이 고였다.

“엄마.. 안아..”

그 작은 목소리가 수제비 김 사이로 흘렀지만,
애순은 당황한 얼굴로 사탕만 줍기 시작했다.


그때 동네 아이가 집 앞으로 와 소리쳤다.
“금명이가 자전거 타다 오토바이랑 부딪혔어요!”

​애순은 벌떡 일어났다.
“어디서! 많이 다쳤어?”

은명도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말에 동명이 울음을 삼켰다.

​애순이 밖으로 나서려 하자,
부상길이 헛기침을 했다.

​“당신 나가지 마. 지금 바람 장난 아닌 거 안 보여?”
당신은 여기 있어.
애 혼자 두고 나가게 생겼어?
세 살짜리 놈 집에 두고 비바람 속에 뛰쳐나가게?”

​부상길은 이미, 왼발 운동화, 오른발 고무신.
우비는 한 팔만 걸친 채였다.
“에이씨, 어디 간 거야, 이 짝은..”
입에선 욕이 나오는데
손은 젖은 우비 챙기고 있고,
등짝엔 이미 수건 한 장이 걸쳐져 있다.

​“내가 데리고 올게.
남의 딸이라고 허투루 안 해.
그리고… 여긴 누가 지켜, 지금?”

​애순이 말릴 틈도 없이
부상길은 문을 벌컥 열고 빗속으로 나섰다.

​“금명인 내가 데려올게. 밥은 다 식겠네.”


10분도 안 돼서,
빗물에 흠뻑 젖은 부상길이 금명을 업고 돌아왔다.
온몸이 젖어 땟국물처럼 흘러내려도
표정만은 담담했다.

“무릎 좀 까졌어..
다행히 많이 다친 건 아니고
근데 애가 얼마나 겁먹었는지… 어휴.”

​애순이 입을 열기도 전에
부상길은 어색하게 기침을 하고 돌아섰다.

​금명은 코끝이 빨갛게 얼어 있었지만 눈빛은 또렷했다.

​사탕 몇 알을 쥐고 있던 동명은 조용히,
엄마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날 밤,

뉴스에선 태풍 속 실종된 아이 이야기가 나왔다.

같은 또래.

같은 시간.

다른 집.



애순은 동명이를 안은 채 중얼거렸다.

“우리 아들… 오늘 정말… 고마웠어.
엄마가 바로 안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부상길은 말없이 창문을 바라보다,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한 모금 들이켜다 말고,
다시 입술 사이에서 꺼내며 말했다.

“.. 내가 아빠 노릇 잘 몰라도,

오늘 하루는.. 나도 잘했네.”




애순은 변하지 않았다.
바뀐 건 부상길 쪽이었다.

​방 안이 어질러져도
애순은 날마다 창문부터 닦았다.
하루가 수선스러워도
애순은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애순은 여전히 시를 썼다.

​누군가는 손가락질했고
누군가는 웃었다.

​부상길은 처음엔
그걸 ‘고집’이라 불렀다.
조금 지나선 ‘버릇’이라 여겼다.
그리고 어느 날엔,
그걸 ‘성품’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 조용한 성실함이
자기 안의 먼지를 털어내는 데
십 년쯤 걸렸을 뿐이었다.




열두 해쯤 지난 늦여름,
부상길은 소파에 앉아 귤을 천천히 까고 있었다.
귤껍질을 접시 위에 하나씩 포개며,
말은 없었지만 눈길은 자꾸만 애순에게 머물렀다.

애순은 소파 앞 작은 탁자에 앉아
한 장 한 장 원고지를 넘기며 시를 쓰고 있었다.
어깨너머로 햇빛이 부드럽게 내려앉고,
펜 끝은 느리지만 단단하게 움직였다.

부상길은 까놓은 귤을 반 갈라
탁자 위에 툭 올려놓으며 중얼거렸다.

“그 시에… 내 욕은 좀 뺐으면 좋겠다.”

애순은 웃음도 없이 펜을 멈추고
귤 반쪽을 들어 한입 베어 물었다.

“뺐지.
다 빼고 나니까..
사랑 얘기가 되더라.”

부상길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봤다.
말은 없었지만,
입가엔 괜히 껄끄러운 듯한 미소가 걸렸다.


어느 늦가을 저녁
둘은 작은 전기난로 앞에 마주 앉아 귤을 깠다.

​부상길이 조용히 말했다.
“나 요즘 가끔 그런 생각 들어.
그때 당신이 아니었으면..
내 인생은 그냥 시끄럽기만 했을 거라고.”

​애순이 귤 반쪽을 나눠주며 웃었다.

“당신 덕분에 나도 배웠어요.
사람은 말로만 배우는 게 아니라,
같이 살아가며 배우는 거구나.”

​귤 향 사이로
사람 냄새가 따뜻하게 번졌다.



지금까지 이 이야기는,

오애순이 양관식이 아닌 부상길과
끝내 결혼을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그 상상에서 시작된 또 하나의
‘폭싹 속았수다’였습니다.

욕이 먼저였고,
불같은 기질이 앞섰던 부상길,

그리고 말보단 삶으로 견뎌내려 했던 애순.

그들이 함께해서
조금은 시끄럽고 조금은 덜 다정했던 나날.

하지만,
그래서 더 진짜였던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다음 이야기
제니 엄마와 가정부 이모의
아무도 몰랐던 젊은 날의 이야기도 기대해 주세요!!

그 한 줄의 상상 속으로
또 한 걸음 걸어가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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