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 그럴 수도 있었던 마지막
우리가 몰랐던,
제니 엄마와 가정부언니의 오래된 이야기
폭싹 속았수다
그 드라마를 보며 우리는 수많은 '만약'을 떠올렸습니다.
"영범이 금양이랑 결혼했더라면?"
"예순이 부상길과 이어졌다면?"
그리고 이번엔
‘제니 엄마, 김미향에게도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면?’
화면 너머, 그 인물들의 보이지 않던 과거와 감정을
가상의 이야기로 엮어보는 [그럴 수도 있었던] 제3화입니다.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상상의 산물이지만,
어쩌면 그들이 진짜로 겪었을 법한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1. 지금의 두 사람
지금은 졸부 소리를 듣는 김미향.
가수의 꿈을 꾸는 딸 제니를 키우며,
부는 생겼지만 말투엔 여전히 지난 삶의 흔적이 묻어나는 여자.
그 곁엔 언제나 말없이 일하는 가정부 언니가 있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어떤 날은 제니보다 미향을 더 잘 아는 것처럼 굴기도 한다.
“그 아이, 누굴 꼭 빼닮았더라고.”
그 말은,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인연 하나를 품고 있었다.
이야기는, 그들의 젊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2. 여관에서의 첫 인연
가정부 언니, 본명은 선자.
어머니의 장례식을 막 치르고 내려온 부산.
방 한 칸짜리 여관방,
머리엔 흰 리본을 매고 맥없이 앉아 있었다.
그때, 야반도주 중이던 한 커플이 다가왔다.
피로한 얼굴, 하지만 또렷한 눈빛의 여자와
말투는 거칠지만 손길은 따뜻한 남자였다.
“저기요, 저 아줌마 진짜 도둑이에요.
언니 자면 가방 바로 털려요.”
"만다 내까지 챙겨줬노?”
"언니도 가방 털리면 속상하니까..
같이 안 속상해야 더 좋죠."
그들은 관식과 애순이었다.
그 말 덕분에 어머니의 마지막 유산을 지킬 수 있었다.
선자는 감사의 마음으로 시장에서
두부를 사다 주었다.
그날 밤, 처음으로 눈물이 멈췄다.
그때까진, 그냥 스쳐갈 인연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인연이, 가장 깊은 뿌리가 되곤 했다.
3. 마담이 되기까지
생활은 곧 바닥을 드러냈다.
이력서에는 쓸 것이 없었고,
냉장고 속엔 소리마저 없었다.
그러다 룸살롱에서 일하던 선배 언니가 전화를 했다.
“내 룸에 애 하나 필요해.
말만 잘 들으면 밥은 안 굶어.”
선자는 며칠을 버텼지만, 결국 문턱을 넘었다.
첫 술잔, 첫 거짓 웃음.
그날 이후, 세상과 나 사이엔 늘 가면이 하나 더 생겼다.
선자는 늘 번쩍이는 블라우스에 진한 립스틱, 하이힐을 신었다.
웃음은 익숙했지만, 진심은 오래전에 접어뒀다.
어느새 그녀는 마담이 되었다.
사람 얼굴, 말투, 취향까지 꿰고
경찰과 사장을 눈짓으로 다루며
“무던히 조용히 오래 버틴” 마담이 되었다.
4. 미향과의 인연
하루는 고개도 제대로 못 드는 신입이 들어왔다.
말수도 적고, 겁도 많던 아이. 김미향이었다.
“김양아, 이 일 너무 오래 하지 마라.
사람이 무뎌지기 전에 나가야 돼.”
선영은 유독 미향을 챙겼다.
미향은 그게 귀찮으면서도,
이상하게 싫지만은 않았다.
5. 불길 속에서
어느 날, 업소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손님들은 이미 대피했지만,
미향은 업소 사장에게 강제로 잡혀 뒷방에 갇혀 있었다.
돈을 벌어줄 기계처럼 다뤄지던 미향은
“그만두겠다”라고 말한 직후였고,
사장은 미향을 협박하며 방 안에 가둔 채 문을 잠갔다.
선자는 불길을 뚫고 뒷문으로 돌았다.
자주 쓰지 않는, 쓰레기 더미로 막힌 작은 창.
그 창을 부수고 안으로 기어들어가 미향을 데리고 나왔다.
그 일로 선자는 심한 화상을 입었다.
불길 속에서 미향을 끌어낸 그날,
그녀의 등과 팔에는 깊은 상처가 남았다.
겉으론 옷으로 가릴 수 있었지만,
여름이면 살은 쑤셨고,
속살이 다 타서 벌겋게 남은 자리엔 늘 옷자락이 붙었다.
걸을 때면 어깨가 조금씩 기울었고,
접시에 손을 얹는 속도도 예전 같지 않았다.
누군가 귓속말로 말했다.
“요즘 마담 언니, 왜 저렇게 축 처졌대?”
“소죽은 귀신 씌었나.. 완전 음침해.”
사장도 퉁명스럽게 뱉었다.
“다친 거 티 좀 안 나게 입고 다녀. 손님 놀라잖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 대신, 팔이 더 무거워졌을 뿐이었다.
얼마 뒤, 선자는 업소에서 사라졌다.
겉으로는 “휴식이 필요하다”는 말이 돌았고,
그 뒤로는 다른 가게로 옮겨졌다는 말도,
“팔려갔다”는 말도 나왔다.
6. 흩어진 길
미향은 업소를 떠난 선자를 한동안 수소문했다.
하지만 선자는 연락처도 남기지 않았고,
주변 사람에게도 “나 괜찮으니 찾지 말라”고 전해두었다.
“미안해하지 마라.
그날은 내가 그냥, 할 수 있었던 일을 한 거다.”
미향은 그 말을, 오래도록 마음에 품었다.
겉으로는 “고향 내려갔다”는 말이 떠돌았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 화재 이후, 업소는 손해배상과 뒤처리로 골머리를 앓았다.
보험은 타지 못했고,
그 피해는 결국 사람으로 메워야 했다.
“아가씨 한 명, 이쪽 업소로 넘겨주시면 서로 좋잖아요?”
그 말에 사장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선자였다.
화상 자국을 가진 그녀는
손님 앞에 더는 서기 어렵다고 판단됐다.
‘쓸모없다’는 말은 그렇게,
빚이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넘겼다.
그녀가 옮겨간 곳은
도심 변두리, 이름 없는 업소.
CCTV도 없는 낡은 룸.
손님은 거칠었고, 웃음은 날마다 닳았다.
긴소매로 흉터를 감추며, 말없이 테이블을 돌았다.
7. 미향의 또 다른 삶
미향은 단란주점으로 옮겨
그곳에서 부자 노인을 만나 동거하게 된다.
한때 착하고 겁 많던 아이는
욕망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점점 달라져갔다.
사람을 속여야 하고, 진심은 약점이 되는 곳에서
그녀는 강해지는 법부터 배웠다.
그 남자에게서
아파트 몇 채, 작은 상가, 그리고 딸 제니가 남았다.
수년 후, 미향은 부동산 투자로 졸부가 되었다.
오래된 상가를 보러 간 어느 날,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낡은 간판 아래,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던 사람.
희미한 조명 아래서도, 그 실루엣은 선자였다.
미향은 멈칫한 뒤, 그 뒤를 따라 허름한 룸살롱으로 들어갔다.
먼지 낀 간판, 반쯤 깨진 유리문, 오래된 술냄새.
모든 것이 지난 시간을 정지시켜 놓은 듯 낡아 있었다.
형광등은 반쯤 꺼졌고, 벽에는 바랜 광고지들이 들쑥날쑥 붙어 있었다.
미향은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 문틈 사이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머리를 질끈 묶은 여자. 손에는 쟁반이 들려 있었고, 팔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얼굴은 화장기 하나 없이 맨 얼굴이었다.
지쳐 보였고, 몸은 바람 한 줄기에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
한때 모든 걸 꿰뚫던 마담의 눈빛은 흐릿했고,
걸음걸이는 묵직한 피로로 가라앉아 있었다.
익숙한 그 사람이, 지금 이 허름한 곳에서 서빙을 하고 있었다.
미향은 그녀의 등을 바라보다, 마침내 다가가 입을 열었다.
“언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그 모습을 본 순간,
미향은 잠깐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들었고,
표정은 애써 담담한 듯 다가갔다.
“반가워서 그런 눈 하지 마라. 나는 괜찮아.”
목소리도 담담했다. 오히려 너무 조용해서, 더 마음이 저릿했다.
미향은 시선을 피하며 무심한 척, 시크하게 말을 이었다.
“나 요즘 가정부 구해. 밥도 좀 하고, 우리 딸이랑 수다도 좀 떨어주고. 뭐, 딱히 언니라서 그런 건 아니고.”
선자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대꾸했다.
“됐어. 난 여기가 더 익숙해.”
미향은 잠시 머뭇이다가, 툭 던지듯 말을 덧붙였다.
“언니가 해준 된장찌개.. 그거 생각나서 그래. 요즘 입맛이 도통 없거든.”
선자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미향은 뒤돌아 먼저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뒤도 안 돌아보고 한마디를 던졌다.
“.. 이런 데 있으니까 오지랖 부릴 데도 없잖아.”
복도 안쪽에선, 마담들의 목소리가 웃음 섞여 흘러나왔다.
“아휴, 저 선자년 또 사고 쳤대. 빚도 못 갚으면서 짐짝처럼 붙어 있는 것도 눈치 없지.”
“지가 아직도 마담이랍시고, 허세 부릴 때마다 웃겨 죽겠어.”
미향은 발걸음을 멈췄다. 짧은 숨을 내쉬고 돌아섰다.
문을 열고 들어선 미향 앞에서, 사장은 당황해 고개를 들었다.
“김 사모님.. 여기 웬일이세요?”
미향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 언니한텐 내가 진 빚이 좀 있어요.”
잠시 뜸을 들인 뒤, 천천히 말했다.
“그 빚은 내가 갚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덧붙였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그 언니.. 내 사람입니다.”
사장은 입을 다물었다.
선자는 말없이 조용히 미향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수십 년 전, 불길을 뚫고 서로를 끌어낸 그날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며칠 후, 미향의 집.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제니는 눈썹부터 찌푸렸다.
익숙한 냄새가 낯설게 퍼지고 있었다.
부엌에서 피어오른 건, 뽀글뽀글 된장찌개 냄새.
그건 제니가 한참 잊고 지냈던 ‘집 밥’의 향기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제니는 주방 문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익숙지 않은 모습의 여자가 조용히 찌개를 젓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은 익숙한 듯 부드럽게 움직였고, 입가엔 다정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안녕. 너 엄마가 내 찌개맛이 보고 싶대서.”
선자의 말에 제니는 고개를 갸웃하며 거실에 앉은 엄마를 바라봤다.
살짝 찡그린 얼굴로 물었다.
“또 어디서 데려온 사람이야?
이번엔 가정부 콘셉트야?”
미향은 고개를 돌려 딸을 바라보며 짧게 말했다.
“그 사람 앞에선 함부로 굴지 마.
나도 감히 못 그러니까.”
순간, 제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묘한 침묵이 흘렀다.
다시 주방 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찌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묵직한 냄비에서 피어오르는 된장향 속에
알 수 없는 포근함이 스며 있었다.
제니는 작게,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 음, 맛있겠다.”
이렇게 해서,
‘폭싹 속았수다’에서 파생된 그럴 수도 있었던 은
이 세 번째 이야기로 마무리하려 합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하고 마음속에만 품었던 이야기들을
한 줄 한 줄 꺼내 써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인물들의 마음은
아직 어딘가 살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가능성을 상상하고,
기록으로 남길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언젠가 또,
다른 드라마나 이야기 속에서
새로운 상상들이 말을 걸어온다면
그때 다시 펜을 들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그럴 수도 있었던 시리즈]를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