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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현진 Apr 20. 2024

화이트 나잇(White Night) 1

단편소설

 #1. 그 여자의 가을


-그 여자의 가을은 극도의 불안과 우울, 고통과 상처로 얼룩진 계절이었다.- 


서귀포시 외각에 위치한 허름하고 오래된 H아파트의 작고 어두운 북쪽 방.  

북향이라 햇빛이 잘 들지 않아 한낮에도 어두침침한 작은 방 안 침대 위에 창백한 얼굴의 여자가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여자 앞에는 각종 처방전과 검사 예약서, 휴대폰등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데. 그것들을 바라보는 여자의 눈빛은 우울함과 불안감이 가득 서려있었다.  

여자는 검사 예약서 몇 장을 들어 대충 훑어본다.

   

    ㅇㅇ대학병원 채혈, CT검사 예약

    환자 명: 진여   나이: 30

    날짜: 2019년 1월 00일  

    시간: 09: 30

    장소: ㅇㅇ대학병원 영상의학과

    결과 보는 날: 2019년 2월 00일 혈액종양내과(담당의사: 최ㅇㅇ)


    ㅇㅇ대학병원 유방 초음파, 유방 촬영 검사 예약

    환자 명: 진여린   나이: 30

    날짜: 2019년 1월 00일

    시간: 10:00

    장소: ㅇㅇ대학병원 영상의학과

    결과 보는 날: 2019년 2월 00일 유방 외과(담당의사: 이ㅇㅇ)


   ㅇㅇ대학병원 산부인과 검사 예약

   환자 명: 진여린   나이: 30

   날짜: 2019년 2월 00일

   시간: 13:00

   장소: ㅇㅇ대학병원 산부인과

   담당의사: 김ㅇㅇ


여린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린다. 가슴이 짓눌린 듯 답답해진 여린은 검사 예약 지를 침대 위에 던져

버리고는 한숨을 길게 한 번 쉰다. 멍하니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있던 여린은 침대에서 벗어나 창가로

다가간다. 창가에 선 여린은 앙상하고 여윈 손가락으로 커튼을 젖히고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본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흐린 잿빛 하늘이 금방이라도 비를 퍼부을 듯하다. 아파트 주변의 나무들은 단풍이 들어

가을빛이 완연하고, 떨어져 쌓인 낙엽이 흙 위로 드러난 나무뿌리들을 덮고 있다.

방 안에 켜둔 TV에서는 날씨 예보가 나오고 있다. 올해 서귀포의 11월 기온이 높아 단풍이 늦게 시작되었는데, 11월 말에 이른 지금 한라산 백록담에는 이미 폭설이 내렸다는 뉴스 멘트와 함께 백록담에 하얗게 눈이 쌓인 한라산의 전경이 TV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잠시 고개를 돌려 한라산의 설경으로 가득 채워진 TV화면을 바라보는 여린의 얼굴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저 무덤덤할 뿐이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이 옮겨간다.  

노란 머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아파트 화단 주변에 쌓인 낙엽들이 바람결에 흩날린다.  

   

여린은 집을 나서기로 결심하고 외출준비를 한다.  많은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온몸을 짓누르는

우울감이 밀려와 이대로 있다가는 정신이 조각조각 찢겨 흩어지고 미쳐버릴 것만 같아서 견딜 수 없었다.

목이 늘어 어두운 베이지색 셔츠 회갈색 코트를 걸쳐 입은 여린은 같은 색깔의 니트 비니를 눌러쓰고

낡고 큼직한 크로스백을 어깨에 맨 채 집에서 나왔다.

딱히 어디로 갈지 목적지를 정한 것은 아니다. 그저 이 지독한 우울과 불안,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 줄 위로와 힐링이 필요했다. 여린은 발길이 닿는 데로 정처 없이 거리를 걸어 다녔다. 아직 해가 남아있는 오후인데도

흐린 날씨 때문에 일찍 어두워져 가는 서귀포의 거리는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과 차량들, 가게마다 경쟁하듯

밝히고 틀어대는 화려한 조명과 흥겨운 음악, 요란한 호객하는 소리들이 뒤섞여 북적였지만, 여린의 마음은 스산하기만 했다.  

낙엽이 쌓인 보도블록 위를 흐느적거리듯 걷던 여린은 여성복 가게 앞을 지나다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푹 눌러쓴 비니 밑으로 삐져나온 가늘고 힘없는 머리칼은 끝이 엉켜 있고, 생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파리하고 푸석한 얼굴에 초첨을 잃은 눈빛은 공허하고  불안해 보였다. 여린은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항암 치료를 받았던 지난봄의 아픈 기억을 떠올린다.


벚꽃이 만개하던 그해 사월에 항암제 부작용으로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감당이 안돼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밀어야 했었다.

거울에 비친 민머리의 자신의 모습이 여린은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벚꽃 잎이 바람에 날리던 봄날 오후, 머리를 밀고 나서 집에 돌아올 때의 그 심정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말로는 설명할 길 없는 그때의 심정을 

그나마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아마도 '을큰함(원통하고 서운하고 아픈 마음을 표현할 주로 쓰는 

제주어)'이지 않을까 하고 여린은 생각했다.

면역력 저하로 인해 병원에 갈 때 외에는 거의 외출을 하지 못하고 집에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던 여린은 창 밖의 바람결에 흩날리는 벚꽃 잎을 바라보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대니보이(Danny Boy)'를 듣다가 

북받치는 감정에 못 이겨 꺼이꺼이 흐느끼며 울었었다.

여린은 지금도 그때의 그 '을큰했던 마음'과 그 기억을 잊을 수 없다.


물기를 머금은 축축하고 쌀쌀한 바람이 여린의 야윈 몸을 휘돌고 지나갔다. 코트가 얇아 한기를 느낀 

여린은 너무 오래 입어  가장자리가 닳은 코트 깃을 세우고 헐거워진 코트 단추를 다시 제대로 채우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잠시 걸음을 멈추고 십 년은 족히 신은 밤색 앵클부츠의 해진 

앞 코를 무심히 내려다본 여린은 왠지 모르게 서글퍼졌다.

횡단보도 앞에 이르러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보도블록 위에 빗방울이 점점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빗줄기가 굵어지며 시내의 거리가 젖어들어갔다. 여린은 우산을 챙길 생각도 못하고 

정신없이 집에서 나온 터라 당황했다. 손으로 머리를 가리고 어찌할 바를 몰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급한 대로 가까운 편의점으로 들어가 비닐우산을 하나 샀다. 푸른 물방울무늬가 그려져 있는 비닐우산은 

보기에 그리 튼튼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린은 그나마 비를 막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편의점에서 나와 우산을 펼쳐 쓰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우산에 듣는 빗방울 소리가 쓸쓸하게 귓전을 

두드리고, 비에 젖은 거리를 걷는 발자국 소리와 엇갈리며 톡톡톡..  또각또각..  이어졌다. 

비가 계속 내리면서 옷이 젖어 추위가 엄습해 왔다.


지난겨울, 암 수술을 받을 때도 오늘처럼 비가 왔었다. 수술을 받는 동안 비가 계속 내렸고, 늙으신 어머니는 수술을 받는 막내딸을 걱정하며 수술실 앞에서 내내 우셨다. 수술이 끝나고 의식이 완전히 회복된 후 병실에 돌아온 여린은 병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를 보자 수술실과 회복실에서의 불안감과 두려움에서 벗어난 상황에 안도하면서도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여린이 누워있는 침상으로 다가오는 어머니는 두 눈이 퉁퉁부어있었다.  어머니는 물에 적신 수건으로 여린의 얼굴을 닦아주며 주저리주저리 말했다.


   "느 수술받는 동안 난 혼짓내 저들멍 울멍 시루엇져. 느 어멍 혼자 수술실 앞이 앉앙 얼마나 애가 

좆아신지 알암댜?"

   "(너 수술받는 동안 난 계속 걱정하면서 울었어. 네 엄마 혼자 수술실 앞에 앉아서 얼마나 애가 탔는지 

알고 있냐)?"


여린은 의식은 회복되었지만 마비가 풀리지 않아 몸을 움직일 수 없고 말도 할 수 없어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어머니는 다시 수건을 물에 적셔서 눈물로 범벅이 된 여린의 얼굴을 묵묵히 닦고 또 닦아주었다.


여린은 마른기침을 하며 상념에 젖은 눈빛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길가의 가로수 잎들이 비에 젖어 축 늘어졌다. 잎새에 미끄러져 떨어지는 물방울이 마치 서러운 눈물처럼 느껴진다. 거리에는 비가 서서히 잦아들고 안개가 끼기 시작한다. 여린은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2. 골목끝의 버스 정류장


발길이 닿는 데로 걸으며 서귀포 시내를 배회하던 여린은 시내 외각의 후미진 골목에 이른다.

서귀포 토박이라 시내 방면의 길은 모르는 곳이 거의 없지만 지금 새로 발견한 이 골목은 왠지 모르게 낯설고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어슴푸레한 가로등 불빛아래 축축한 공기에 섞인 눅눅하고 비릿한 냄새가 풍기는 좁고 어두운 골목은 비가 내리는 날씨에 더욱 음침하고 우중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화려한 조명과 흥겨운 음악

속에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시내 거리와 시장과는 달리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한 골목의 분위기에 여린은 당혹스럽고 살짝 두려움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호기심이 일었다. 항상 익숙한 길을 걷다가 가보지 않은 낯길을 발견했을 때 여린은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어디로 길이 이어질지 없는 미지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기도 하지만 익숙한 길을 걸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낯설고 새로운 길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이 강하게 일곤 했다. 오늘 발견한 낯선 골목 역시 미지의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여린의 발길을 끌어당겼다. 골목에 들어선 여린은 우산을 받쳐 걸음을 재촉했다.  골목 안에는 슬레이트 지붕의 간판도 없는 허름한 국숫집과 붉은 벽돌로 지어진 모텔, 촌스러운 컬러의 조잡한 그림이 벽과 출입문에 그려져 있는 다방, 옷가게와 수예점등이 있었는데, 건물들이 하나 같이 지어진 지 수십 년은 된 듯 낡고 오래되어 보였다.  골목을 벗어나자 환한 조명이 켜진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여린은 홀린 듯 불빛을 따라 버스 정류장에 들어갔다.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 정류장의 버스 노선 안내를 확인하던 여린은 외돌개와 매봉 방면의 버스 노선을 보고 문득 남극성(南極星)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남극성에 대해 검색해 본 적이 있었다.


[서양에서는 '카노푸스(Canopus)'라고 하며 동양에서는 남극성(南極星), 노인성(老人星),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 수성(壽星)이라고도 부르는 평화와 장수를 상징하는 별. 별의 고도가 낮아 북위 37도 18분 이상에서는 수평선에 가려서 보이지 않아 우리나라에서는 서귀포에서만 관측되며 추분(9월 22~23일)부터 이듬해 춘분(3월 20~21일) 사이인 50일도 채 되지 않은 기간에만 관측이 가능한 별이다.

남극성을 보면 행운을 얻게 되고 건강과 장수를 누릴 수 있다는 설이 있다.]


 카노푸스라는 남극성의 영어 이름이 여린에게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카노푸스는 여린이 좋아하는 전설적인 록 밴드인 '재이 밴드'와 관련이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재이밴드는 30년 전 짧은 활동 기간에도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큰 인기를 얻었던 전설적인 록밴드인데, 밴드가 해체된 후 지금은 영상으로만 노래와 공연을 접할 수 있음에도 여전히 그 시대를 함께 했던 올드팬들은 물론,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유입된 젊은 세대들에게도 영원불멸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밴드이다. 여린 역시 유튜브의 알고리즘으로 인해 우연히 알게 된 재이밴드의 매력에 빠져들면서 인터넷을 뒤져 리마스터 앨범을 구입할 정도로 열혈팬이 되었다. 재이밴드의 공연영상을 보면 리더이자 보컬인 재이가 항상 은빛 별 장식이 달린 펜던트를 착용하고 있는데,

그 은빛 별이 바로 카노푸스였다. 언젠가 몇 안 되는 희귀한 재이의 인터뷰 영상을 찾아보다가 그가 늘 착용하는 카노푸스 펜던트에 대해 설명하는 영상을 통해 카노푸스가 남극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남극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서귀포 앞바다에서만 볼 수 있으며 그마저도 추분과 춘분사이 50일도 채 되지 않은 짧은 기간에만 만남이 허락되는 별, 남극성을 여린은 절실히 보고 싶었다. 서귀포에서 나고 자랐지만 여린은 단 한 번도 남극성을 보지 못했다. 남극성을 보면 잃어버린 건강을 되찾고 지금의 우울함과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11월이라 남극성을 볼 수 없다. 남극성을 보려면 내년 3월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여린은 정류장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현실, 내년 봄을 다시 맞이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불안하고 막막한 현재의 상황이 아프게 다가온다.

그렇게 한동안 우두커니 앉아있던 여린은 정류장 벽면에 붙여진 록밴드 공연 홍보 포스터에 눈길이 머문다. 평소 록과 헤비메탈을 좋아하는 여린은 자연스레 록밴드 공연 포스터에 관심이 끌렸다.

 '내가 좋아하는 재이 밴드의 공연을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혼잣말을 뇌까린다.


특히, 밴드의 리더자 보컬인 재이의 팬인 여린은 병원을 다녀올 때마다 버스에서 이어폰을 꽂고 재이의 

노래를 듣곤 했다. 재이의 노래를 들으며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었고, 그의 목소리가 위로를 

해 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린은 간절하게 보고 싶었던 남극성조차 볼 기회를 기약할 수 없는 지금, 서글픔과 절망감이 밀려드는 

마음에 위안을 얻고 싶어 휴대전화를 꺼내 플레이리스트에서 재이밴드의 노래를 재생한다. 


 "단 혼번만이라도 남은 생(生)이 다 허기 전에 재이밴드의 라이브 공연을 볼 수 이시믄, 재이의 노래를 

직접 들을 수 이시믄 얼마나 조코..."

 "(단 한 번만이라도 남은 생(生)이 다하기 전에 재이밴드의 라이브 공연을 볼 수 있다면, 재이의 노래를 

직접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재이의 노래를 들으며 여린은 간절한 마음을 토로하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느덧 내리던 비가 그치고, 비에 젖은 도로에 차들의 불빛이 뒤엉킨다. 흐려진 눈으로 거리의 불빛들을 

바라보던 여린은 어느샌가 기분이 몽롱해진다. 그때 붉은 외투를 입은 할아버지가 차롱(제주도에서 음식을 

보관할 때 사용하는 대나무로 만든 뚜껑이 있는 바구니)을 옆에 끼고 정류장으로 어기적 어기적 걸어왔다.

키가 작달막하고 왜소한 체격의 할아버지는 마치 콘헤드처럼 기형적으로 이마가 위아래로 넓고 어깨까지 

늘어진 긴 머리카락과 가슴께까지 길게 기른 수염이 눈처럼 새하얀데 눈빛이 형형하면서도 온화한 느낌이 

들었다. 옆 의자에 앉은 노인은 여린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조캐, 비도 오곡 날도 어두근디 혼자 어디가젠 햄서?"

  "(젊은이, 비도 오고 날도 어두운데 혼자 어디 가려고 하나?)"


여린은 당황해서 딱히 뭐라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한마디 대답했다.


  "몰르쿠다."  

  "(모르겠어요.)"


노인은 지그시 여린을 바라보고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차롱 뚜껑을 열었다. 차롱 안에는 탐스러운 

숭아가 가득 들어 있었다. 여린은 차롱 안의 복숭아들을 보며

'지금은 복숭개가 나올 철이 아닌디, 저 삼춘은 어디서 이추룩 큰큰허고 잘 여문 복숭개를 하영 사와신고?'

'(지금은 복숭아가 제철이 아닌데, 저 어르신은 어디서 이렇게  크고 익은 복숭아를 많이 사 왔을까?)' 

하고 의아해했다. 노인은 차롱에서 가장 큼직하고 잘 익은 복숭아 하나를 꺼내 여린에게 먹어보라며 건넸다.


  "조캐, 어디 아파신가? 얼굴이 너미 유울어신게. 이 복숭개 호나 주크매 먹어봐. 호썰 베롱해질거라."

  "(젊은이, 어디 아픈가? 얼굴이 너무 야위었네. 이 복숭아 하나 줄 테니 먹어봐. 좀 나아질 거야.)"


얼떨결에 복숭아를 받은 여린은 당혹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삼춘, 이거 무사 나신디 줨수과? 영 받아도 될꺼꽈?"

  "(어르신, 이걸 왜 내게 주세요? 이렇게 받아도 되나요?)"


여린이 복숭아를 두 손에 받아 든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조심스레 묻자 노인은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기여,  기냥 먹어도 되난 어떵안하여. 이 복숭개 먹은 후젠 아픈 것도 낫곡 좋은 일이 이실거여. 

혼저 먹어보라."

  "(그래, 그냥 먹어도 되니까 괜찮아.  이 복숭아 먹은 후엔 아픈 것도 낫고 좋은 일이 있을 거야.  

어서 먹어봐.)"


 "고맙수다예, 잘 먹으쿠다."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여린은 노인에게 감사를 전하고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먹었다. 복숭아를 베어 문 순간, 여린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마치 꿈에서 깬 듯한 기분이었다. 방금 전까지 분명히 손에 들고 있던 복숭아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붉은 옷을 입은 흰 수염의 할아버지도 보이지 않았다.




#3. 바닷가 언덕길 


비가 그친 거리에 갑자기 안개가 짙게 피어오르며 정적이 흐른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안갯속에서 부르릉하는 소리와 함께 버스 불빛이 다가온다. 안개를 헤치고 달려온 파란색 버스 한 대가 

정류장에 멈춰 서더니 출입문이 열린다. 마치 어서 올라타라는 듯 열린 버스 출입문 앞에서 여린은 

탈까 말까 망설이다 무엇엔가 이끌린 듯 버스에 오른다. 여린이 올라타자 버스의 출입문이 닫히고 시동이 

걸린다. 눈처럼 새하얀 머리와 수염에 붉은 셔츠를 입은 버스기사의 모습이 묘한 분위기가 느껴지면서도 

친근하게 다가왔다. 여린은 버스기사가 정류장에서 복숭아를 건넨 할아버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 안에는 대여섯 명의 승객들이 있었는데, 저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거나 버스 의자에 기대어 조는 사람, 일행과 수다를 떠는 사람등 제각각이었다. 여린은 버스기사의 좌석 바로 뒤 창가의 빈 자리에 앉았다.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기대자마자 피로와 함께 졸음이 몰려와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버스는 안갯속을 

하염없이 달리며 마을 몇 개를 지나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깜박 선잠이 들었던 여린은 안내 방송이 

울리자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이번 정류장은 수성(壽星) 마을, 수성(壽星) 마을입니다."


버스가 멈춘 곳은 바다가 인접한 처음 와보는 낯선 마을이었다. 승객들이 모두 버스에서 내리자 여린도 

따라 내렸다. 안개가 자욱한 바다에서 바위에 철썩 철썩 부딪히는 파도소리가 처연하게 들려왔다. 여린은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과 함께 마을 어귀쪽으로 향하는데, 물기 머금은 차가운 바닷바람이 휙 하고 스치듯 

불어왔다. 갑작스럽게 옷깃 안으로 스미는 한기에 여린은 부르르 몸이 떨려왔다. 마을 어귀에 세워진 안내 

표지판에 '수성(壽星) 마을'의 지명 유래와 함께 붉은 도의를 입은 차림에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그려져 있고 설명이 적혀있었다.

두루마리 책을 들 있거나 혹은 불로초나 복숭아를 들고 있기도 하고 사슴이나 학, 선동자와 함께 그려져 

있는 이 노인은 '수성노인(壽星老人)'으로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별자리인 남극성南極星)을 의인화하여 

일컫는 말이며 수노인, 또는 남극노인이라고도 한다는 내용이었다. 여린은 복숭아를 들고 있는 수성노인이

정류장에서 만났던 붉은 옷을 입은 할아버지와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풍경도 서귀포 시내와는 다르게 낯선 분위기가 느껴졌다.

서귀포 토박이인 여린이지만 한 번도 이런 마을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버스에서 내린 승객들을 따라 

여린은 천천히 걸어간다. 해안가 근처의 언덕길에 접어들었을 때 어디선가 귀에 익은 올드팝이 들려온다. 


                  I left my heart in sanfrancisco

                (샌프란시스코에 두고 온 내 마음)

                                                                                 토니 베넷

파리의 아름다움은 어쩐지 슬프도록 빛나고

로마의 영광은 이미 오래 전 하루...

지독한 외로움에 빠져 맨하탄에 있다는 것 마저 잊었네..

언젠가 만을 지나 내 고향으로 돌아가리..

내 마음을 두고 온 곳.. 샌프란시스코..

언덕 저 위에서 나를 부르는

작은 전차(케이블카)가 별을 향해 오르는 그 곳

아침 안개가 차갑겠지만, 그래도 좋아

내 사랑이 있는 곳.. 샌프란시스코,

바람 일렁이는 푸른 바다가 있는 그 곳..

샌프란시스코여 네가 그리워 돌아갈 때,

빛나는 금빛 태양을 날 위해 비춰주렴


여린은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리며 사람들을 따라 언덕길을 올라갔다. 안개가 짙게 깔린 언덕길을 올라갈 

수록 노랫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왔다. 마침내, 언덕 꼭대기에 다다르자 안갯속에서 지붕도 벽도 온통 

하얀빛의 건물이 홀연히 눈앞에 나타났다. 은은한 가랜드 조명으로 둘러싸인 건물 앞에 세워진 나무로 된 

입간판에 하얀 글씨로 라이브 카페 화이트 나잇’이라고 써져 있었다.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의 하얀빛 

라이브 카페는 여린의 마음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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