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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현진 Mar 25. 2024

중문의 하얀 밤

수필

2012년 4월 서귀포시 중문동의 <하얀 밤> 라이브 카페에서 들국화의 전설의 록커 전인권 님의 공연모습

                             사진 출처- 조엽문학회 카페


 

3년 전 봄이었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4월의 어느 밤,  중문의 라이브 카페에서의 추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날 조엽문학회 회원분이 수필집을 발간하여 동료 문학회원들과 함께 출판 기념회에 참석했다.

행사 장소는 중문에 위치한 고깃집이었다. 고깃집에서 식사를 하며 출판기념회 행사를 할 때까지는 여느 출판기념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출판기념회 행사가 끝나고 뒤풀이를 하기 위해 <하얀 밤>이라는 라이브 카페로 갔을 때 평생 잊을 수 없는 꿈같은 일이 현실로 다가올 줄 누가 알았을까..

사실 고깃집에서 나와 뒤풀이를 하러 간다고 했을 때, 비도 오고 피곤하기도 해서 뒤풀이 대신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렇게 비도 많이 오고 피곤한데 무슨 뒤풀이까지 한다고.. 게다가 노래방도 아니고

 라이브 카페..?  아, 집에 가고 싶다..'


속으로 투덜댔지만 나 혼자 빠질 수는 없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동료 회원의 차를 얻어 타고 풀이 장소로 향했다. 어둠이 내린 길을 달려 라이브 카페에 도착했을 때 비는 어느덧 거의 그쳐갔다. 차에서 내린 우리 일행을 맞이한 라이브 카페의 첫 느낌은 <하얀 밤>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하얀빛이었다.  천막을 씌운 외관은 물론 실내의 기본 컬러가 흰색이어서 깨끗하고

정갈한 느낌을 주었다.  소박하고 운치 있는 카페 내부는 화려하진 않지만 아늑했다. 카페 안에 들어서자 정면에 삼나무와 녹차나무 가지를 사용하여 만든 한라산 능선 모양의 무대가 눈에 들어왔다.  무대에서는 이미 가수가 공연을 하고 있었다.  카페 안은 우리 일행 말고도 손님들로 북적였다. 우리는 무대 가까운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커피와 음료를 비롯해 갖가지 주전부리를 주문해 먹으면서 공연을 감상했다. 무대에서 공연하는 가수는 '제주도의 푸른 밤'을 부르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전설의 록밴드 들국화의 멤버 최성원이었다. 들국화의 최성원의 노래를 라이브로 듣다니,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최성원의 공연을 보면서 여기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두 번째 곡 '매일 그대와'를 부르고 나서 최성원이 이런 멘트를 하는 것이었다.


   "들국화의 전인권 씨가 이 자리를 축하하러 오셨습니다."


순간, 카페 안이 술렁거렸다. 나 역시 내 귀를 의심했다.  제주도 서귀포 중문의 이 작은 라이브 카페에 들국화의 전인권이, 전설의 록커 전인권이 오다니!  설마 하면서 반신 반의 하고 있는데,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현실로 눈앞에 벌어졌다. 들국화의 전인권이 바로 우리 일행이 앉아있는 자리의 통로를 지나 무대로 향하는 게 아닌가!

우리 옆을 스쳐 지나가는 전인권을 보고 나는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카페 안에 들어올 때 입구 쪽에 반백의 긴 곱슬머리를 묶고 검은 가죽잠바를 입은 나이 지긋해 보이는 남자가 앉아서 일행과 담소를 나누는 뒷모습을 본 기억이 났다. 머리 스타일이 특이하긴 해도 문학회 활동을 하면서 만나는 문인이나 예술가들 중에 독특한 개성이 넘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 이들 중 한 명이겠거니 하고 무심코 지나쳤던 것이다. 그런데, 그 반백의 묶음 머리 남자가 바로 전인권이었다니, 카페 입구 쪽 테이블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던 반백의 묶음머리 남자가 전인권일 줄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희끗한 반백의 긴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전인권은 회색 셔츠에 검정 가죽 재킷과 청바지 차림에 검은 선글라스를 썼는데 무대에 서 있는 자체만으로도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에 압도당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두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믿기지가 않았다. 전인권은 '제발'과 '사랑한 후에'를 불렀는데 음향상태도 안 좋고 , 치과치료로 컨디션도 좋지 않은 상태였지만 혼신을 다해 열창을 했다.  전인권의 카리스마 넘치는 음색이

카페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데 듣는 내내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짧은 공연이지만 과연 전설의 록커다운 멋진 무대였다. 평소에 접하기 어려운 전인권의 라이브 공연에 흠뻑 도취되었던 시간이 꿈만 같았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닌데 사인도 못 받고 사진 한 장 못 찍은 게 아쉬웠다. 문학회 선배언니가 공연을 마친 전인권에게 사인을 받으러 가는데, 소심한 성격의 나는 끝내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 언니가 다른 선배언니 것을 대신 받아주는 것을 보고 '언니, 제 것도 받아 주세요.' 하고 부탁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망설이며 쭈뼛거리는 사이 전인권은 환호하는 팬들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뒤풀이가 끝나고 일행과 함께 카페 밖으로 나가는데 문 밖에서 전인권이 지인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대로 얼어붙은 듯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뒷모습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잠시 담소를 나누던 전인권은 다시 카페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결국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돌아서야 했다. 뒤풀이가 끝나고 집에 온 후에도 '사랑한 후에'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며칠이 지나서 국수공장에 견학을 가기로 한 날이었다. 그때도 비가 몹시 많이 내렸는데, 문학회 회원들이

평생학습관 로비에 모여서 같이 제주시로 출발하기로 했다. 로비에서 아직 도착하지 않은 회원들을 기다리고 있던 그때 라이브 카페 <하얀 밤>에서 전인권의 사인을 받았던 선배 언니가 자신이 받은 사인을 내게 주는

것이었다. 전인권의 공연 때 몰입해서 즐기는 내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보기 좋더라며 자신은 전인권의 팬도 아니고 그냥 기념으로 받았는데, 자기보다는 내가 그 싸인을 가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면서 전인권의 친필 싸인을 건넸다.  그러지 않아도 전인권의 사인을 받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던 터에 선배언니의 예기치 않은 뜻밖의 선물에 뛸 듯이 기뻤다. 어떻게 내 마음을 알고 그 소중한 전인권의 싸인을

내게 양보해 준 것인지 선배언니가 정말 고마웠다. 전인권의 사인을 보물단지처럼 받아 들고 수필집에 끼워 넣었다가 비에 젖을 까봐 다른 데로 옮겨 놓았는데, 안타깝게도 그 이후로 그 싸인을 다시 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아마 싸인지를 다른 데에 옮겨 보관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 같다. 여기저기 찾아봤지만 지금까지 찾지 못했다. 도대체 어디다 옮겨 놓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비록 전인권의 싸인은 잃어버렸지만  비 내리는 어느 봄밤에 선물처럼 다가왔던 추억은 두고두고 가슴에 남을 것이다.   


그때 이후 <하얀 밤>에 공연을 보러 갈 기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하얀 밤>은 언제나 먼 빛의 그리움이었다. 테이크아웃으로 산 따끈한 카페라테가 담긴 컵을 손에 들고 귀에 꽂은 이어폰을 통해 노래를 들으며 거리를 걷다 보면 마치 중문의 <하얀 밤>에서 라이브 공연을 즐기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아무런 걱정이나 고민 없이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해 즐길 수 있는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이 봄이 가기 전에 라이브 카페 <하얀 밤>에 가서 음악의 향연에 흠뻑 취해보고 싶다.


                   -2015.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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