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성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없다.
할리우드의 유명한 연출가에게 한 신인 작가가 장편 원고를 들고 갔다. 그러자 그 연출가가 말했다.
"이봐요. 이 원고는 너무 길어요. 나는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해서 가져오도록 해요."
그래서 작가는 작품을 다섯 쪽 분량으로 요약해서 가져갔다. 그런데 연출가는 또 양미간을 찡그렸다.
"좀 더 내용을 압축할 수 없겠소. 한눈에 스토리를 알아볼 수 있게끔 말이오."
다음날 작가는 백지 한 장에 다음과 같이 써서 연출가에게 보여주었다.
"남자 주인공 중위, 여주인공은 그의 상관인 대령의 아내, 두 사람은 정열적인 사랑에 빠짐, 동반 자살함."
그러자 연출가는 그 종이를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이 작품은 곤란하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하고 내용이 똑같잖소."
오래전에 읽고 저장했던 독서목록을 살펴보다 멈췄다. 책 제목의 힘에 이끌려 마우스를 클릭한 글 속에서 진지하게 글을 써 내려간 당시의 나 자신을 발견한다. 우화 형식의 편한 글 속에서 삶의 소중한 깨달음을 전달받은 책이라고 쓰여있다.
글을 읽으니 당시의 시간적 경험은 기억나지 않지만 신기하게도 감정은 남아있음을 느낀다. 우리의 감정의 힘은 20년이 넘었을지라도 가볍게 찾아낸다. 어떤 이유일까.
우리가 같은 책을 읽지만 서평이 다르고 감동이 다른 이유는 경험에서 비롯된 선택적 지각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모든 기억은 편집된 데이터일지 모른다. 그 데이터가 쌓여 나의 서사를 완성할 따름이다. 하지만 이러한 편집의 오류는 진실을 왜곡할 위험이 있다. 그럴싸한 나의 서사는 상대의 진실의 반박 앞에서 선택적으로 연결된 기억이 무너질 수 있다.
요약과 편집에는 함정이 있다. 인간사에서 부딪치며 겪는 이야기들은 다양하다고 생각되지만 비슷하지 않다. 우리가 비슷하게 평가될 때는 죽음 이후일 타인의 평가 앞에서 일 뿐이다. 당시의 나의 글은 이러한 우려를 걱정하고 있었다.
인간은 불확실성에 대한 불편을 견디지 못한다. 무슨 일이든 빨리 완성하고 도착하기 위해 서두른다. 그러한 속도의 가치는 과정의 미덕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우리는 진리를 요약할 수 없으며 속성으로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현대인이 접하는 미디어 세상은 숏폼과 자극적인 뉴스카드로 도배되어 있다. '배우기'라는 관점에서 미디어를 검색하는 수고는 시간낭비일 수도 있다. 인터넷에서 짧게 떠다니는 요약버전에서 무슨 이해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고정관념은 질 좋은 사색에서 얻어진 것이었으면 좋겠다. 자신이 알고 싶은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온전한 몰입의 과정을 통해 얻어진 결론이 고정관념이라면 세상을 바라보는 노력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다시금 천천히 음미하고 싶어 책장 어디쯤 꽂혀 있는지 두리번거렸는데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지인에게 선물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