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경험해야지 알 수 있는 것
나에겐 사랑스러운 아들 한 명이 있다. 아이를 낳고 키우기로 결심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 부부에게는 당연한 결과였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에 말이다.
그렇지만 아이를 키우는 일에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평소 아이에 대한 관심이 적었던 나에게 아이를 사랑으로 잘 키울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항상 존재했다. 다행히도 작년에 도영이가 태어나고, 실제로 그를 키우면서 아이에 대한 사랑이 너무 커져서 지금은 주체할 수 없는 팔불출이 되었다. (하하)
지난 1년간 아이를 키우는 일은 나에겐 행복한 일이었지만, 마냥 웃을 수 없었다. 주중에는 대부분 회사에서 보내야 했기에 홀로 아들을 돌보며 힘들어하는 아내의 얼굴이 매일 떠올랐다. 새벽이나 저녁타임, 주말에는 최대한 내가 아들을 돌보려고 노력했다. 그 짧은 시간의 아들은 가끔 매콤할 일도 있었지만, 감당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래서 몰랐다. 너무 짧은 시간 보았기에 아들의 진짜 모습은 아직 내가 보지 못했다.
최근 11월부터 새롭게 일을 찾고 있다. 이로 인해 우리 부부가 그토록 꿈꾸던 공동 육아를 짧은 시간이지만 즐기게 되었다. 함께 아침에 일어나 산책하고, 아들과 다양한 추억을 만들며 너무나도 좋은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육아에 대한 자신감이 커졌다. 지난주 토요일 아내가 친구를 만나러 나간다고 할 때, 호기롭게 홀로 돌보겠다고 이야기했다.
점심시간까지는 괜찮았다. 아침에 아내가 나가고 중간에 아들이 낮잠도 자서 여유로운 하루를 보낼 줄 알았다. 그러나 2시부터 비극은 시작되었다. 아들은 이유 모를 짜증을 계속 부리기 시작했다. 밥도 먹었고, 기저귀 문제도 아니었다. 물도 마셨고, 그동안 충분히 놀아주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짜증을 부렸다. 그가 말로 의사표현을 할 수도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졸려서 그런가 싶어서 3시에 30분 동안 그를 재워보려고 했지만, 그는 30분 내내 짜증만 내면서 잠을 자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짜증은 가라앉지 않았고, 4시 반에 다시 재워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머릿속에서는 화가 오르락내리락했지만, 결국 인내심을 가지고 아들의 기분을 맞추었다. 그리고 저녁쯤에 아내가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날의 경험을 회고해 보면,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육아에 대한 관점이 달라졌다. 아이를 돌보는 것은 누군가의 철저한 희생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한 생명을 온전히 돌보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큰 힘이 들어간다. 그것을 그동안 혼자서 묵묵히 감당했을 아내에게 너무 고맙고 미안했다.
그동안 혼자서 도영이를 돌보는 일이 적었다. 대부분 함께 아이를 돌봤기에 중간에 서로 쉬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아내의 배려로 내가 크게 과부하가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홀로 아이를 키우니 실제 육아에 들어가는 노력은 생각 이상으로 힘들었다. 물론 그날 아들의 컨디션이 최악인 변수도 있었지만, 그것을 1년간 홀로 경험했을 아내에게 미안함 마음이 들었다.
아내에게 매주 아이와 분리된 온전한 휴식시간을 정기적으로 가질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방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도 소용이 없다. 아이의 소리는 문을 닫아도 너무나 선명하게 잘 들린다. 해서 아내에게도 재충전할 시간을 정기적으로 제공해 그녀가 힘을 낼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겠다고 결단했다.
또한, 부모님에 대한 감사함과 사랑의 마음이 들었다. 내가 잊었다고 나를 키우느라 고생한 부모님의 노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너무 귀한 것을 잊고 살아가지 않았나 돌아보며 반성하게 된다. 앞으로 그 사랑에 감사표현하며 더욱 부모님과 소통해야겠다고 다짐도 하게 되었다.
이번에 찐육아를 경험하면서 생각의 폭이 넓어졌음에 감사하다. 어떤 일이든 직접 경험해 봐야만 그 어려움을 알 수 있다.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얼마나 편협한 생각을 하게 할 수 있는지 반성했다. 앞으로 다른 일에도 이러한 사고를 적용하여 신중하게 생각하고 판단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