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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영 May 11. 2023

버티다 넘어지긴 다 마찬가지야

힘 빼고 기다리기


1. 김연수『이토록 평범한 미래 - 난주의 바다 앞에서』, 문학동네



정현은 강연 요청을 받고 남해의 섬 추자도에 갔다. 그곳에서 추리 소설 작가 손유미 씨를 만났는데 낯익은 얼굴이다. 알고 보니 둘은 대학 시절 같은 동아리 친구였다. 그녀는 은정이라는 본명 대신 손유미라는 가명을 사용하고 있었다. 삼십여 년이 지나 남해의 한 섬에서 그들은 우연히 재회했다.


삼십여 년이란 긴 세월 동안 그녀에겐 많은 일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고, 결혼도 했고, 아들도 낳았다. 그렇게 행복할 줄만 알았던 어느 날, 9살 아들이 악성종양 진단을 받고 5년 투병 끝에 사망한다. 아들을 잃고 너무나 힘든 시간을 보낸 그녀는 남편과도 이혼한다.


아이를 잃고 혼자가 된 그녀는 어떤 기억도 추억도 없는 낯선 곳을 찾아 떠났고, 그곳이 바로 추자도였다. 그곳은 200년 전 천주교 박해로 가족을 잃고 자신의 아들 또한 관노가 될 처지가 된 정난주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그녀는 정현에게 정난주의 바다 이야기를 해준다.


정약용의 조카 정난주. 부러울 것 없는 집안에 태어나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은 천재(황사영)와 결혼해 예쁜 아들을 낳은, 만인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정난주. 정조가 죽고 천주교 탄압이 시작되자 하루아침에 정난주의 평탄한 삶은 끝난다. 남편은 사지가 찢기는 극형을 당했고 자신과 두 살배기 아들(황경한)은 제주도로 유배되어 곧 관노가 될 처지였다.


난주는 배가 추자도에 잠시 머물 때 몰래 포대기에 싸인 두 살 아들을 해안가 갯바위에 내려놓았고, 자식을 살리기 위해 본인은 죽으려고 바다로 몸을 던졌다. 자신이 죽으면 아기도 같이 죽은 줄로 알 것이고 그러면 자신의 아들은 노비가 아닌 신분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들만은 살기를 바라며 바다에 몸을 던진 정난주.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안 그녀는 기도한다. '제가 죽어야 제 아들이 살 수 있습니다.' 그때 들려온 음성. 하느님은 정난주에게 올바르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제가 살아야 제 아들이 살 수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아들을 위해 죽으려 했던 그녀는 아들을 위해 살기로 한다. 그 후 그녀는 삼십칠 년을 더 살았고, 그녀의 아들 또한 얼마든지 살 수 있었다.


정현은 손유미로부터 들은 '정난주의 바다'를 찾아간다. 안내판에는 그들이 탄 배가 추자도를 지날 때 아들이 평생 죄인으로 살 것을 염려한 정난주가 아들을 섬 동쪽 갯바위에 내려놓고 떠났다고 적혀 있었다. 그것을 보며 정현은 두 여인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2. 세컨드 윈드



불행은 뜬금없이 찾아온다. 


손유미를 찾아온 아홉 살 아들의 악성종양도, 정난주를 찾아온 남편의 죽음과 두 살 아들과의 이별도. 이렇게 불행은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다. 그 불행은 그들이 녹다운이 될 때까지 마구 편치를 날린다. 그들은 맞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소용없다. 죽도록 맞고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그들에게 다음이란 없다. 이젠 끝이라는 생각만 든다.


김연수 작가는 그들에게 말한다.


'버티고 버티다가 넘어지긴 다 마찬가지야. 근데 넘어진다고 끝이 아니야. 세상이 뒤로 쑥 물러나면서 나를 응원하던 사람들의 실망감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바로 그때 바람이 불어와. 세컨드 윈드.' (p.60)


운동을 하다 보면 호흡 곤란, 가슴 통증, 두통 등의 고통으로 인해 운동을 중지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때를 사점(dead point)이라고 한다. 이 사점을 지나면 고통이 줄어들고 호흡이 안정되면서 운동을 계속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는데, 이 상태를 세컨드 윈드라고 한다. 


뜬금없는 불행의 펀치를 맞고 쓰러진 그들이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상태, 세컨드 윈드.  


아이를 잃고 큰 슬픔에 빠진 손유미는 어떤 기억도 추억도 없는 낯선 곳을 찾아 떠났다. 그곳 추자도에서 정난주의 바다를 만난 손유미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고 소설가로 제2의 인생을 맞이한다. 손유미에게 세컨드 윈드는 정난주의 바다였다. 


아들이 평생 죄인으로 살 것을 염려한 정난주는 아들을 섬 동쪽 갯바위에 내려놓고, 아들만은 살기를 바라며 바다에 몸을 던진다. 그때 들려온 하느님의 음성. 그것을 듣고 아들을 위해 죽으려 했던 그녀는 아들을 위해 살기로 한다. 정난주에게 세컨드 윈드는 하느님의 음성이었다.  


세컨드 윈드와 뜬금없는 불행의 공통점이 있다. 세컨드 윈드가 누구나 운동하는 중에 경험하는 것이듯, 뜬금없는 불행 또한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 경험하는 것이다. 그 불행은 그냥 물러나는 법이 없다. 녹다운이 될 때까지 펀치를 날릴 것이다. 여기서 그만둘 것인가? 이것만 기억하자. 곧 세컨드 윈드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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