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에 가자는 말은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이라는 어느 시인의 글을 읽고는 올해 꼭 삿포로를 가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일본은 가깝다는 핑계로, 부산엔 눈이 오지 않기에 눈을 보고 싶다는 핑계로, 일본엔 여러 번 가보았지만, 삿포로는 아직 가보지 않았다는 핑계로, 당신을 좋아한다는 핑계로.
입국 수속을 마치고 삿포로로 가는 기차를 탑니다. 기차가 역을 벗어나자 내리쬐는 강렬한 햇볕에 눈이 멀듯 합니다. 아니, 올려 쬔다 해야 할까요. 터널에서 벗어난 삿포로는 설국이었고 눈에 반사된 강렬한 햇볕은 평소의 몇 배의 강도로 제 눈에 입사되어 시각을 마비시킵니다.
설국. 그야말로 설국. 이미 입춘을 지나 3월에 접어들었음에도 삿포로의 들판에는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순결한 눈으로 가득했고 집들은 아직 녹지 않은 눈으로 하얀 털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본 것과는 또 다른 설경이, 온 세상 가득 쌓인 순백이, 저를 감동하게 합니다. 비행기에서 읽었던 책이 슬펐던 탓인지, 햇빛이 너무 강해서인지, 순백의 세상에서 유난히도 하얗던 당신을 본 것인지, 이내 눈시울이 붉어지지만, 눈물을 흘리진 않습니다. 눈물을 통해 보는 세상은 아지랑이 흩날리듯 어지러이 퍼지기에, 이 순백을 눈에 담기 위해 기어코 참아내고는 그저 콧등을 한번 으쓱일 뿐.
역에 도착해 간단하게 소바와 맥주 한 잔을 마시고 버스를 탑니다. 오전에 먹은 감기약에 취해 이내 곯아떨어지고, 버스는 이내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숙소에 짐을 푼 뒤 동네를 가벼이 산책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와 노곤해진 몸을 뜨거운 노천탕에 뉩니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뒷산 너머로 사라지고 낮도 밤도 아닌 어정한 시간.
밤하늘의 별과 달을 보고 싶건만 별이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기에 나중을 기약하며 목욕을 마무리하고 자리를 옮깁니다. 때아닌 휴식으로 따뜻한 우롱차를 한잔, 그리고 커피를 또 한잔 마시며 설산을 바라봅니다. 눈앞의 거대한 설산은 세상 모든 소음 끌어안은 듯 고요하고 황량하여 쓸쓸함을 더해주지만 외롭지는 않습니다.
숙소에서 늦은 저녁을 먹으며 사케를 한잔합니다. 한 잔은 적고 한 병은 많으니 도쿠리로 한 병. 한 병으론 성에 안 차 다시 또 한 병. 그렇게 약간의 취기가 오른, 하지만 너무 취하진 않은 상태로 다시 한번 노천탕에 들어가 몸을 데웁니다. 어느새 어두워진 밤하늘을 보니 목성과 금성은 아직 이별 중이고 밝은 달과 별이 저를 위로합니다. 술에 취해, 열에 취해, 말랑해진 저는 고요한 설산에 걸린 밤하늘을 바라보며 당신을 생각합니다.
삿포로에서까지 당신을 생각하는 저는 역시나,
당신을 좋아하나 봅니다.